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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31) 승진하면 왜 변할까(2)] 인지 초과 스트레스가 보수적 리더로 만들어 

 

조직의 성과 압박이 외로움 초래, 불안 가중… 단순하고 익숙했던 행동을 반복하도록 유혹

▎사진:© gettyimagesbank
날마다 일에 치여 허덕거리고, 사람에 치여 멘털 붕괴 지점을 왔다 갔다 할 때가 많은 게 대리, 과장 시절이다. 이럴 때 자신도 모르게 뇌까리는 게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상사를 보며 ‘나중에 나는 절대 저러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시간이 흘러 그 자리에 가게 되면 굳은 결심은 세파에 다 닳아 없어지고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했던 바로 그런 행동을 본인이 한다. 못된 시어머니에게 질린 며느리가 욕 하면서 닮는 것 같은 일이 회사에서도 벌어진다. 그렇게 ‘미래의 못된 시어머니’를 또 만든다. 지난 회에 말했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을 벌이는 리더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한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일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반복될까? 얼마 전 SBS 방송에서 방영한 드라마 ‘배가본드’에 나오는 말로 대신하자면 “왜 권력만 잡으면 그게 안 보일까?”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대니얼 길버트에 의하면 “사람은 통제력을 행사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은 이렇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유능한 존재가 되는 것은, 인간의 뇌가 원하는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다.”

심지어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아기들도 이런 욕구에 충실하다. 애써 만든 블록 더미를 확 무너뜨리고 나서 좋다고 손뼉을 치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TV 리모컨을 여기 저기 꾹꾹 눌러보면서 소리를 지르는 게 그것이다. 이 녀석들은 뭐가 좋아서 그렇게 기뻐할까? 스스로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능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이렇듯 강한 욕구이다 보니 반대 상황,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없으면 말할 것도 없이 기가 꺾인다. 의기소침, 무기력을 거쳐 우울로 빠져든다.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현실이 내가 무의미한 존재인 것으로 느껴져 우울과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뿐인가? 높은 자리는 손발로 하는 일이 없어 직원들이 보기엔 하루하루 천하태평처럼 보이지만,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려들어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곳이다. 바구니에 내용물이 가득 차면 넘치듯 우리의 인지 용량도 마찬가지. 당연히 쉽고 편한 걸 자신도 모르게 선호하게 된다. 여기서 ‘쉽고 편한 것’이란 자신이 예전에 그렇게 싫어하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바쁘고 힘들다 보니 몸에 익은 것들이 하나 둘 나사가 풀어지듯 새어 나온다. 처음엔 어색하고 꺼림칙하지만 할수록 익숙해지고 그냥 그런 일이 된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불편도 없고 해도 없기 때문이다. 연구에 의하면 가진 힘(권력)을 확대하려는 성향에 남녀 차이는 없었다. 우리 모두는 생각하는 이상으로 권력에 민감하고 권력 수용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에서 ‘도덕 라이선스’ 현상 빈번

더 큰 문제는 이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선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연구팀이 2016년 다양한 산업군의 고위급 리더 172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행동에 대해 조사한 결과, 많은 리더들이 이른바 ‘도덕 라이선스’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도덕 라이선스란 모두가 인정하는 바람직한 행동을 하면 마음 속으로 ‘이번에 좋은(착한) 행동을 했으니 다음에는 좀 나쁜 행동을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인 행동이나 좋아 보이는 행동을 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바람에 정신적인 피로가 한계를 넘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농담을 빙자해 직원들에게 심하게 모욕을 주고 화를 내는가 하면, 반대로 눈밖에 두거나 말을 건네지 않기도 했다. “권력자의 자아는 언제든지 사나운 개로 변할 수 있다”는 이언 로버트슨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 교수의 말 그대로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한 두 사람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더 위험한 선을 쉽게 넘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이번엔 윤리의 선이다. 이언 로버트슨 교수에 의하면 ‘나는 특별하다’는 특권의식이 혼자만의 도덕 체계를 만들어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르다’(우월하다)가 ‘나는 특별하다’로 변하고, 이것이 ‘나는 이렇게 해도 된다’는 착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중앙선을 넘듯 사회적 규범을 쉽게 위반한다.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으니, 또는 합법적으로 이 자리에 올랐으니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 지도층에 내로남불(내가 하는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장본인이 많고, 성적 스캔들이 자주 일어나는 게 이 때문이다. 이른바 ‘독실한 신자’라는 이들은 또 어떤가. 2002년 당시 미국에서 역사상 최대의 사기 사건을 일으킨 버나드 에버스는 침례교 집사로 성경에 무척 해박했으며 임원 회의를 할 때면 항상 기도로 시작했던 독실한 신자였다. 모든 게 들통난 후 그가 했던 말도 ‘독실한 신자’ 다웠다. “이번 일로 제 믿음까지 의심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을 변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불안이다. 높은 자리는 앉아 있으라고 주어진 게 아니다. 성과를 내라고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시장은 언제나 치열한 경쟁으로 가득해 밤낮 없이 뛰어야 하고 그러려면 온 조직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매진해야 하는데, 조직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달래보기도 하고 강하게 밀어 부쳐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하지만 그때뿐 혼자 끙끙거리고, 혼자 애면글면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그들의 마음 밑바닥에서는 불안이라는 검은 구름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불안하니 더 일하게 되고, 더 재촉하게 되고,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가게 된다. 자리가 높아진다는 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다리에는 딱 두 개의 길만 있다.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 아니 하나가 더 있긴 하다. 떨어지는 것. 그러니 어떻게든 사다리에 매달려야 한다. 매달려야 한다는 건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상사에게 ‘아니오’라고 하기 어려워진다. 이제 바랄 건 승진 밖에 없는데 ‘옳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적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게 아닌가. 상황에 따라 줄도 서야 하고, 가능하면 손해나는 일은 피해야 한다. 다른 길이 없는 외길을 가는 대가다.

남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외길에는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 외로움이다. 외길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이라는 애환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 직원일 때는 서로 몰려다니며 상사를 안주 삼아 스트레스를 털어낼 수 있지만, 일단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면 누구와도 할 수 없다. 상사와 하겠는가, 아니면 부하들과 하겠는가? 친한 친구는 물론, 같이 살아가는 배우자도 함께 할 수 없다. 자신들이 겪는 일이 아니기에 한두 번 들어주다 이내 고개를 돌린다. 듣기 싫다는 뜻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으로 불안을 잠재우려 하고, 외로움에 젖어 들지 않으려 일에 매진하면 할수록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고 한 달이 휙 지나간다. 문제는 이런 일상이 앞에서 말한 인지능력 초과 상태를 만들어 당사자를 단순한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입바른 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고 입 발린 소리에는 웃음을 짓게 된다. 아첨과 아부가 안 좋다는 걸 알지만 ‘이 정도쯤이야’하는 자기 위안으로 넘긴다. 하루하루가 죽을 맛인데 누가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겠는가? 연구에 의하면 인지능력에 부하가 걸릴수록 초기 판단에 머무르는 현상이 강했다. 더 이상 머리 쓰기 싫으니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선호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보수적이 된다. 올라갈수록 지켜야 할 게 많아지기에 이런 보수화 현상은 가속된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단순·보수화


▎사진:© gettyimagesbank
이런 상황이 앞에서 말한 쉽고 편한 통제력 행사 욕구, 그리고 도덕 라이선스 현상과 겹치면 어떻게 될까? 말이 많아지고 짜증이 늘어난다. 적당히 지적하고 넘어가도 될 일을 사정 없이 몰아 부쳐야 직성이 풀린다(보통 ‘정신 차리게끔 혼을 냈다’고 한다). 부하들을 믿지 못하기에 눈 안에 두려고 하고 까탈스러워 진다. 화를 내면 다들 바짝 긴장해서 일을 잘 하는 것 같아 갈수록 화내는 날이 많아진다(사람들은 화난 표정에 가장 민감하다). 불안은 정반대 현상도 만들어낸다. 성과가 계속해서 나빠져 지위가 위태롭다 싶으면 자신감을 상실, 이랬다 저랬다 하게 된다. 앞의 행동이 독단적이어서 자기 파괴적이 되는 것이라면, 뒤의 행동은 리더십의 핵심인 일관성이 없어 자기 파괴적이 된다.

승진하는 리더들을 변하게 하는 요인은 이뿐만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에서 칭찬 받는 사람들이 있다. 눈치 빠르고 융통성이 좋아 시키는 일을 곧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성격도 무던해 속을 썩히지 않아 윗사람들이 좋아하기에 특출 나게 승승장구하진 못해도 승진 심사에서 두 번 이상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무던한 이들의 상당수가 승진한 후 ‘변신’한다. 예전의 일 잘하고 무던하던 김과장, 김부장은 어디로 간 곳 없고 부하들 속 끓이는 전문가가 나타난다. 이건 또 왜 그럴까?

이들이 승진하기 전 잘했던 일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들이 잘 하는 일은 주관식이라기 보다 객관식 같은 것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요령 있게 하는 것이었다.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찾아서 하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뇌과학으로 보자면 기억력은 좋지만 창의력엔 약한 스타일이다. 그래서 하던 일은 잘 하지만 이전에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에는 약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몸을 바쁘게 하는 건 잘 하지만, 핵심을 못 잡아 모두를 피곤하게 한다. 속이 타는데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눈만 껌벅거릴 때가 많다. 대체로 ‘열심히’가 최대의 모토라 자신이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머리가 좋으면 무슨 일이든 아는 척하고 참견해서 부하들이 괴롭고, 순응적인 이들은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예, 하며 가져오기에 부하들이 끙끙 앓는다. 상사가 요구하는 일은 잘하지만 아쉽게도 리더라는 자리, 시장이 요구하는 일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승진하기 전에는 꼭꼭 감춰두었던 ‘발톱’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일보다 관계에 능하고, 일과 승부하거나 일로 승부하기 보다 사람과 승부하기를 즐겨 하는 사람들이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일종의 사이코패스 유형인데, 이들은 대체로 입으로 일하고 관계(연줄)를 통해 승진한다.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이들이 작성하는 보고서는 정말이지 빛이 난다.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나다. 문제는 이런 능력이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내세우는 명분과 달리 알고 보면 교묘하게 자기 이익에 몰두하는 까닭이다.

이들의 빛나는 보고서는 대체로 누군가의 것을 빌려와 교묘하게 짜깁기하거나 능력 있는 누군가를 포섭해 만든 것일 때가 많다. 사람 대하는 능력 하나는 출중 하기 때문이다. 위에도 그렇게 접근해 승진 가도를 달리게 되는데 일단 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진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이기는 걸 전부로 생각하기에 자기 앞길을 막는다 싶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쓰러뜨린다. 사람을 저격할 때에는 일이 아니라 태도나 도덕성 같은 걸 물고 늘어져 파렴치범으로 만든다. 이들이 조직의 핵심이 되면 조직은 파멸을 피할 수 없다. 이들은 자신의 생존만 생각하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더는 조직이라는 큰 숲을 봐야

승진하는 이들이 변하는 마지막 이유는 그 자리가 변할 수밖에 없는, 아니 변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과 조직을 따르는 구성원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하더라도 일의 차원이 다르다. 과장까지는 대체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하면 된다. 하지만 한 조직을 이끄는 팀장부터는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잘해 팀장에 오르지만, 일단 자리에 오르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일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다른 사람(부하)을 통해, 조직 전체가 먹고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구성원들이 발등의 불을 끄고 눈앞의 일을 할 때 리더는 저 너머에 있는, 조직이 가야 할 길을 찾아내야 한다. 가야 할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지만 실행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기에 구성원들의 역량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이게 또 첩첩산중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르는 까닭이다. 과장 차장 때는 일을 잘 보아야 하지만, 팀장이 되고 리더가 되면 사람을 잘 보아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조직의 미래를 위해서 냉혹해져야 할 때는 누구보다 그러해야 한다. 그런 일을 하라고 일반 구성원들이 갖지 못한 혜택과 힘을 주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가 일찌감치 한 말이 있다. “리더는 사랑 받는 게 아니라 조직이 바라는 결과를 도출해 존경을 받아야 한다.” 사람 좋다는 평에 혹해 결국 무능한 조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실 때문에 리더와 구성원은 같은 편이 될 수 없다.

이렇듯 리더라는 자리는 소리 없는 내 안의 본능과 싸우고, 유혹과 싸워야 하지만 밖으로는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아니 드러낼 수 없는 곳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자리다.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싶지만 막상 경험해보면 너무나 어려워 숨이 막히는 자리다. 그래서 링컨은 “누군가의 성격을 시험해보고 싶으면 그에게 권력을 줘보라”고 했다. 역시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린든 존슨은 “권력은 그 사람의 실체를 더 많이 보여준다”고 했다. 힘이 많을수록 원천 능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가 한 말이 있다. “인간은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건 매우 잘하지만 그걸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그리 능하지 못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든 ‘높은 분’들이 이런 늪에 빠지지는 않는다. 미국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했던 죄수와 간수 실험에서 60%의 참가자들은 주어진 역할에 순응, 고문에 참여했지만, 40%의 참가자들은 불합리한 명령에 따르지 않았듯 말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권력의 포로가 될 수 있는 인간과 이걸 이겨내는 존재 사이 어딘가에 있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526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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