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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당신에 존재하는 ‘내로남불’의 근본적 귀인오류 

 

이중 잣대질의 일종... 집단 갈등 커질수록 ‘나무만 보는’ 함정도 늘어

사회심리학에서 당연한 전제로 여기는 개념 중에는 ‘근본적 귀인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귀인(attribution)’이란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원인의 귀착’을 줄인 말이다. 어떤 사람이 한 행동의 이유나 어떤 사건의 원인을 알아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얻은 자기만의 결론이 귀인이다.

귀인을 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을 알아야 앞으로 그와 같은 사건에 미리 대응할 수 있으니까. 인간이 이 빈약한 몸뚱아리로 지구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한 비결 중 하나가 귀인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이 귀인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귀인오류’가 그 경우다. 귀인오류 중에서 모든 인간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귀인 오류를 ‘근본적 귀인오류’라고 한다. 에드워드 존스와 빅터 해리스가 1967년 주장한 근본적 귀인오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남이가’는 근본적 귀인오류 그 자체

우리는 남의 부정적인 행동의 원인을 판단 할 때는 그 사람 탓을 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사람을 둘러싼 외적·상황적인 여건의 힘은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의 내적 속성인 성품이나 성격의 힘을 과대평가한다. 남이 죄를 저지르면 그가 나쁜 놈이라고 여기지 그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을 귀인 할 때는 정반대다. 그때는 잘못은 내 탓이 아니라 상황 탓인 거다.

잘한 일에 대해서는 다시 반대의 귀인이 일어난다. 남이 뭔가를 잘 했으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품 덕분이 아니라 그냥 상황 탓이다. 누구든 그 상황이라면 당연히 했을 일이고, 그걸 못 했으면 한심한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내가 잘한 일은 전반적으로 내 덕이다.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 거다. 그러니까 근본적 귀인오류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 잣대질의 일종이다.

근본적 귀인오류는 나와 남에 대해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대 그들(us vs them)이라는 범주도 그렇다.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내 행동과 마찬가지의 귀인원칙을 적용한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을 그 사람의 성향이 아니라 상황의 탓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당신의 편 혹은 자기사람의 범주에 넣은 존재일 것이다. 자기의 친척, 친구, 오랫동안 잘 알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이 기본적 귀인오류에서 자기에게 적용되는 조항을 사용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을 그 사람 자체의 특질, 성향 탓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당신과는 친한 친구도 아니고 지인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은 근본적 귀인오류 그 자체다.

근본적 귀인오류는 인간의 판단과정이 합리적이지 않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들 중 하나다. 이것이 ‘근본적인’ 귀인오류인 이유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오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근본적인 귀인오류에 빠질까? 심리학자들은 몇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의 행동을 볼 때는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먼저 보인다.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모호한 배경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행동할 때는 나를 둘러싼 상황이 훨씬 더 잘 보인다. 내가 잘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상황적 조건을 더 많이 고려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 사람을 잘 알수록 그 사람의 과거사나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더 잘 알 테니 낯선 사람을 판단할 때보다는 이런 외적 요소에 귀인할 여지도 크다.

하지만 이 설명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귀인의 잣대가 뒤바뀌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려는 자아의 본성’에서 두 번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앞뒤가 딱딱 맞는 정합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진실이고, 내가 내린 판단이 옳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런 자신감이 있어야 이 모호한 세상 속에서 과감하게 모험도 시도하고 자기 생각을 남들에게 주장할 수도 있고 자기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누구나 약간의 자아도취 성향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 중에서는 그나마 내가 제일 낫다는 믿음 말이다. 이런 믿음을 유지하려면 내 성공은 내 능력 덕분이고, 내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라고 여기며 자신을 과대평가해야 한다. 반면에 남들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기준을 적용하면서 과소평가를 한다. 아이러니다. 옳고 바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오히려 잘못된 판단과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다니.

그렇다면 근본적 귀인오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뭘까? 일단 여유를 가져야 한다.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 탓을 하는 건 그게 머리를 제일 적게 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여건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라 이것들을 따지자면 머리도 복잡해진다. 빨리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클수록 우리는 간단한 답에 현혹된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생각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그래서 이런 귀인오류의 함정에 덜 빠진다.

경제 넘어 사상·신념·가치관도 양극화 극심

두 번째, 극단적 대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로스는 미국과 쿠바 사이의 갈등이 한참이던 1977년, 대학생들에게 카스트로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연설 녹음을 들려줬다. 그리고는 그걸 녹음한 사람들은 어떤 연설문을 읽을 지를 동전 던지기로 배정받았다고 알려줬다. 그런데도 녹음을 들은 대학생들은 친(親)카스트로 연설문을 읽은 사람은 카스트로를 추종하는 빨갱이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냥 실험을 돕기 위해 랜덤으로 배정받은 연설문을 읽었을 뿐이라는 상황요인은 거의 무시당했다.

양극화가 21세기의 화두라는데, 이 양극화는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가 가장 큰 원인이긴 하겠지만 정치적 사상이나 신념, 혹은 삶의 가치관에서도 양극화가 커지는 양상이다. 세대 간의 간극이나 계층 간의 갈등, 여당과 야당의 간격, 검찰을 비롯한 정부기관에 대한 태도, 양성평등에 대한 입장에 이르기까지 격차와 대립이 크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현직 대통령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는 집단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트럼프에 이르러서는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집단 간 갈등이 커질수록 근본적 귀인오류의 함정도 늘어난다.

그러니 평소보다 한 번 더 생각하며 나무보다는 숲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귀인오류의 함정에 빠지면 당신만 ‘멍청이’가 된다.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 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46호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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