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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삼성’ 만든 지역전문가 제도] 다들 말렸지만, 국제화 인재 양성에 조 단위 투자 

 

이건희 회장 “현지에 녹아들어라”… 해외서 1~2년 자율 연수

▎이건희 회장이 2004년 삼성 반도체 30주년을 맞아 기념 서명을 하고 있다.
“글로벌 삼성으로 가기 위한 지역전문가를 만들어라 해도 안 만들어. 몇 년 걸렸어요. 1973년부터 만들라고 그랬어. 그런데 안 만들어. 86년에 한 번 더 소리쳤어. 안 돼 그래도. 88년에 회장되고 나서 또 떠들었어. 그래도 안 돼. 89년인가 90년에 고함을 질러버렸어. 그랬더니 그날로 당장 만들더란 말야.”(이건희 삼성 회장, 1993년 일본 후쿠오카 회의)

지난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언제나 인재를 목말라했다. 삼고초려는 기본이고 인재영입에 회사 전용기를 띄우기도 했다. 본인보다 더 많은 연봉을 주는 영입 전략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글로벌 삼성으로 가는 인재 확보 방법론에 지역전문가 제도를 내걸었다. 세계 최고 권위의 경영저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는 2011년 7·8월호에서 삼성의 지역전문가 파견이 글로벌화에 성공,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주효 전략이었다고 평했다.

80여개국 5000여명 지역전문가 파견


1990년 “그 나라 기준으로 인재를 양성하자”는 이 회장의 호통으로 시작한 지역전문가 제도는 글로벌 삼성을 만든 주춧돌이 됐다. 지역전문가 제도가 삼성의 현지 마케팅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지역전문가로 뽑힌 직원은 아무 조건 없이 원하는 국가에 1~2년간 머물며 현지 언어와 문화를 익힐 수 있고, 연봉 외에 1인당 1억원 안팎의 체재비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현지서 축적한 정보는 삼성이 선진시장은 물론 신흥시장으로 진출하는 밑거름이 됐다.

1990년대 지역전문가로 태국에 나갔던 한 직원은 현지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쌓은 친분으로 2000년대 삼성이 태국 시장점유율을 크게 높이는 데 힘을 보탰다. 지난 2월 삼성전자 중남미총괄에 오른 홍현칠 부사장 역시 중남미 지역전문가 출신으로 전공 지역에서의 성과 확대를 위해 투입됐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삼성은 지역전문가 제도로 육성한 인재를 적극 활용한다”면서 “지역전문가가 삼성 현지 마케팅의 근간이며 급성장 원천”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1973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취임한 이 회장이 지역전문가 육성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만 해도 주위에선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용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연수자에게 월급과 각종 체재비가 지원되고 일을 안 하는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1인당 3억원 가량이 든다. 한 해 300명 가량 보낸다면 연간 800억~900억원의 거액을 투자하는 셈이다. 이 회장의 거듭된 지시에 1989년 사장단 회의에서 마지못해 ‘5년간 500명을 양성하겠다’는 보고를 올린 정도였다.

그러나 이 회장은 “21세기 환경을 감안한 숫자입니까? 2000명을 양성하세요”라고 호통 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국제화, 국제화하지만 국제화된 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밀어붙였다. “이 일은 사장들이 직접 챙겨도 시원찮을 텐데 실무자들이 하고 있다. 한마디로 대소완급(大小緩急)을 가리지 못한다”고 다그치기도 했다. 도입 첫해 실무진이 20여명을 선발해 결재를 올리자 그는 “아직도 내 말뜻을 못 알아듣느냐”며 200여명을 내보냈다.

이렇게 해외로 나가게 된 지역전문가들은 1990년 이후 현재까지 80여개국 5000명을 훌쩍 넘는다.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고 선발을 거르지 않았다. 이들은 삼성의 글로벌 기업 도약 첨병이 됐다. 지역전문가들은 현지에서 ▲파라과이에서 술 마시기 좋은 곳 ▲미국에서 주택 싸게 얻는 법 ▲현지에서 사귄 인맥 ▲외국 정부 승진 시스템 등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자료를 올렸다. 삼성은 해당 보고서를 사내 인트라넷에 올려 누구든 관심 있는 지역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수천 건, 수만 건이 모이면 해당 지역에 대한 훌륭한 데이터베이스가 된다”며 “보고서를 읽어보면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해당국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 내에선 지역전문가와 관련한 ‘전설’ 같은 일화도 많다. 삼성 관계자는 “10여년 전 인도네시아 지역전문가가 현지 고위 관료의 딸과 결혼해 인도네시아 전자협회장을 맡았다”며 “삼성의 인도네시아 시장 공략에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삼성 안팎에선 삼성 직원들이 ‘강병(强兵)’이 된 근원으로 학력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조직 문화와 함께 주저 없이 지역전문가 제도를 꼽는다. 실제 지역전문가 출신 상당수가 삼성그룹 임원으로 올라섰다. 원기찬 삼성카드 전 사장(삼성라이온즈 구단주)이 대표적이다.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성공의 패러독스(The Paradox of Samsung’s Rise)’라는 논문에서 “삼성은 잠재성이 높은 직원들을 해외로 보냈고, 변화의 주역이 됐다”고 평가했다.

삼성의 지역전문가 파견지역에서도 이건희 회장의 혜안을 엿볼 수 있다. 삼성은 지역전문가 초기에는 미국·서유럽·일본·호주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파견했다. 일본에서는 엔지니어링, 미국에서는 마케팅과 매니지먼트, 싱가포르·홍콩에서는 금융을 경험하게 했다. 2000년대 중반 이건희 회장은 지역전문가 파견지역에 변화를 준다. 선진국에서 신흥국으로 축을 바꿨다. 선진국은 이미 지역을 잘 아는 전문가가 많고 삼성 브랜드가 자리 잡았다는 판단에서다.

글로벌 삼성, 삼성전자 매출 85% 해외서

그동안 이 회장의 지역전문가는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며 삼성을‘한국의 삼성’에서 ‘세계의 삼성’으로 변모시켰다. 실제 이 회장 취임 당시 10조원이었던 삼성그룹 매출액은 2018년 387조원으로 약 39배 늘었으며, 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무려 396배나 증가했다. 삼성전자는 전체 매출의 85%를 해외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삼성의 위상은 한국에서 삼성을 능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그룹은 최근 글로벌 삼성의 배양토였던 지역전문가 제도의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1998년 이후 22년 만에 지역전문가 선발이 멈췄고, 당초 현지에 완전히 녹아든 삼성인을 키워내겠다는 이 회장의 목표가 달성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만 해도 경기도 수원의 본사 외에 미주·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에 216개 해외 종속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 체제로 인해 지역전문가 제도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새로운 인재양성 전략이 검토 중인 상태”라고 했다.

- 배동주 기자 bae.dongju@joongang.co.kr

1558호 (20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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