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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참사 10년, 향후 과제는] 정부의 무관심, 기업의 책임 회피가 피해자를 두 번 울린다 

 

시스템·원칙 세우고 신뢰 담보하는 제3 기구 만들어야

▎ 사진:전민규 기자
2021년 1월 12일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한 1심 선고에서 홍지호 SK케미칼 전 대표와 안용찬 애경산업 전 대표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들은 인체에 유독한 원료 물질로 만들어진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판매해 인명 피해를 발생시킨 혐의를 받았지만, 법원은 “살균제 사용과 폐 질환 발생 혹은 악화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2011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산모와 영유아가 사망하거나 폐 질환에 걸려 공분을 일으킨 사회적 참사로 평가된다. 환경부와 한국환경산업기술원 통계에 따르면 2011년 11월부터 2021년 3월까지 피해자 신청을 받은 결과 총 7372명이 피해를 호소했다. 정부가 피해를 공식 인정한 지원 대상자만 4168명, 이 가운데 목숨을 잃은 사람은 1001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1심 선고를 들은 일부 피해자들은 “내 몸이 증거인데,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법부와 가해 기업, 정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국내 환경보건학자들의 모임인 한국환경보건학회는 1월 19일 성명을 내고 법원 판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양원호 학회장은 “독성실험, 건강피해 등에 대한 과학적 방법론을 잘 이해하지 못한 판결이 나왔고, 기업에 면죄부를 준 셈이 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도 “연구 결과가 추가로 나오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른다”며 한계를 인정했다.

그렇다면 최종 결정이 나오기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지난 3월 [이코노미스트]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진정한 ‘사회적 해결’을 위해 어떤 부분을 고민해야 하는지 HJ비즈니스센터에서 전문가들과 좌담회를 진행했다. ‘가습기살균제 사태 10년, 제대로 된 해결을 위해서는’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좌담회에서 전문가들은 사회적 상처와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신뢰의 실종… “정부·기업·사법부도 믿을 수 없다”


“10년 전으로 돌아가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다시 다룰 수 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지금보다 나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시스템의 미흡함을 가장 큰 문제로 꼽으면서도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해결 방식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배상 문제를 담당했던 김미성 변호사(법률사무소 이룸)는 사건 해결을 위한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책임 소재나 피해 보상, 구제 방안 등 피해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정보를 관리하는 핵심 기관이 없어 문제가 커졌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것인지, 피해자가 기업과 소송해 구제를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어도 정부는 기업과 논의하라고 했다”며 “적어도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수면 위로 떠 오른 이후에는 국가가 문제 해결에 앞장섰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2014년에 첫 피해자 인정 사례가 나올 때까지 피해자들이 질병관리본부·보건복지부·환경부를 전전했고, 전문가도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결국 가장 힘없는 환경부에 문제를 떠넘겼다고 비판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피해자를 어떻게 구제하고 이들이 어디로 목소리를 낼 것인지 통로를 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성구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 이사장은 “위험을 감지했을 때 알릴 수 있는 ‘단계별 신호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시스템이 있어야 문제 해결을 맡은 실무자나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고 대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이사장은 “유공(SK케미칼 전신)이 가습기 살균제의 진실을 은폐할 때 생기는 리스크 규모가 너무 큰데도 이를 감춘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질병관리본부 역시 위험을 감지하고도 오랜 시간을 끌었다는 부분이 아쉽다”고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기업이나 정부 기관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할 게 아니라 단계별 시스템을 통해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고 사고를 수습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비자의 안전을 고려하는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 전문가도 있었다. 소비자 단체인 소비자와함께 박명희 대표는 “과거에는 안전을 2차적인 요소로 여겼다. 안전을 위해 정보 시스템을 만드는 예산 지원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소비자원 전체 예산이 30억원 수준일 때 처음 생긴 ‘안전국’에 배정된 예산은 약 1500만원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인명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경시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컨설팅 전문업체 아르스프락시아의 김도훈 대표는 “안타깝지만, 과거로 돌아가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김 대표가 지적한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험의 부족’과 ‘신뢰의 상실’이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은 누가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지, 피해자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가 있다. 반면 한국사회는 역사적으로 이런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일으킨 기업이 충분한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서 사회적 불신도 쌓였다”고 지적했다.

재난을 보는 시각 달라 영국은 ‘도움’, 한국은 ‘배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재난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에서 드러난다. 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재난(Disaster)’에 대한 연관어로 영국에서는 ‘aid(도움)’이, 한국에서는 ‘배상’이 가장 많이 검색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구글 트렌드에서 aid는 재난과 관련한 연관어 키워드로 1059건, 한국은 네이버 트렌드에서는 ‘배상’이라는 키워드가 654건 검색됐다. 한국에서는 재난이 터지면 어떻게 또는 얼마나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 사회 지원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 상상력에서 ‘aid’가 제외됐다는 방증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른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목소리를 높여 문제를 이슈화하고 특별법을 이끌어내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시스템의 부재와 신뢰의 실종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 피해 사실 자체가 묻혀버리는 상황때문이다. 현재의 법률과 시스템이 피해자를 도울 것이란 신뢰가 없기에 피해자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스스로 길을 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운 한국 소비자들의 처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는 설명도 있다. 그만큼 한국 소비자들이 약자라는 뜻이다. 기업의 제대로 된 보상이나 정부 보호를 받지 못한 소비자들이 재난 극복보다 책임자 처벌과 응징, 보상을 이야기하는 게 당연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명희 대표는 “소비자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이나 시스템을 만들어야 기업이 사활을 걸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박 대표는 “지금까지는 피해가 발생한 뒤에야 관련법을 만들었는데, 이는 소비자피해 대응에 대한 기본 원칙이 없다는 반증”이라며 “소비자 증명 책임을 완화하고, 징벌적 책임을 강조하는 기본원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버티면 이긴다’는 기업의 잘 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도 강조됐다. 김미성 변호사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배상하지 않아도 버티면 상황이 무마되는 걸 봐 왔다”며 “이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배상하겠다는 공표를 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피해자들은 목소리를 키워야 배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 때문에 피해자 단체가 난립하는 문제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시스템과 원칙, 신뢰의 붕괴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김도훈 대표는 사회적인 예측 가능성이 없어 생기는 문제라며 개별 사안 해결책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일반법체계 안에서 확고한 원칙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잘못하면 처벌하고 책임지게 해야 사회적 신뢰 회복

특별법의 문제를 지적하며 국가 차원에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성구 이사장은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은 이 사건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화학물질과 관련한 다른 문제나 피해자에겐 적용할 수 없다”며 임시방편 방식의 해결책을 비판했다. 그는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 조항을 만든 뒤, 가습기 살균제 등 특정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보완하는 형태로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사회적 참사나 갈등 해결을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이 있을까. 김 대표는 영국의 사례를 들었다. 영국에서는 재난을 겪은 피해자와 가족들을 단순한 피해자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재난 멘토’ 역할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는 “잘 짜인 시스템 안에서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공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좌담회 좌장을 맡은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결국 피해자가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아쉬움은 남지만 잘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병희 기자 yi.byeong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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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9호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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