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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참사 10년] 피해는 있어도 가해는 없는 ‘비극’ 

 

인과관계 입증할 종합 보고서 ‘관건’

▎가습기살균제기업배보상추진회 회원들이 3월 2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1년 8월 가습기살균제 유해성이 세상에 알려진지 약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책임자 처벌과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무려 95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가습기살균제로 건강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명확한 가해자는 없는 아이러니한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과 시민단체들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두고 “피해 초기 대응, 피해 원인 규명, 책임 규명과 재발방지 모두 실패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참사”라고 평가하면서 “이 비극의 연속을 끊어내기 위해 가습기살균제로 발생한 피해를 입증할 종합적인 보고서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최소 998만개의 가습기살균제가 판매됐다. 이 기간 제품 사용자는 894만명이며, 이 가운데 건강 피해 경험자는 95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특정 질병으로 사망한 인원은 무려 2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해온 최예용 환경보건 시민센터 소장은 “약 2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참사 수준의 참사”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무죄 뒤집을 인과관계 입증 ‘관건’


사참위가 추산한 가습기살균제 피해 규모와 정부의 피해 지원의 간극은 넓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지난 3월 26일 기준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신청한 인원은 7380명이다. 이 가운데 정부가 피해를 공식 인정한 지원 대상자는 4168명이며, 이들 중 1001명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조사됐다. 사참위가 조사한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건강 피해 경험자의 0.4%만이 정부의 피해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는 것이다.

가습기살균제의 책임 규명, 피해보상 등이 여전히 미흡한 가운데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SK케미칼·애경산업 등이 지난 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추가 연구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사법의 근본적 원칙 범위 내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들 회사들이 제조·유통한 가습기살균제의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의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지만, 가습기살균제 원료의 유해성을 입증할 증거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는 얘기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CMIT·MIT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났는데, 2~3심에서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가 이 사건 흐름의 향배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해온 황정화 변호사는 “형사 판결에서 CMIT와 피해자들의 질환이 인과관계가 없는 것으로 정리되면 민사 소송에서도 승소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CMIT 등의 유해성과 관련해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추가 연구 등에 집중해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올해 가습기살균제 원료의 유해성 입증에 주력한다는 입장이다. 환경부는 상반기까지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질환과의 연관성에 대한 보고서를 질환별로 발간할 계획이다. 환경부 소속 국립환경과학원도 가습기살균제 독성에 의한 질환 영향 연구를 전담하는 독성평가 가습기살균제보건센터 2곳(고려대학교 안산병원, 안전성평가연구소)을 지정했다.

갈 길 먼데 네 탓 공방 이어가는 환경부·사참위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이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지만, 이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환경부와 사참위는 네 탓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사참위 측은 “가습기살균제 조사와 관련해 환경부가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고, 환경부 측은 “사참위의 법적 업무 수행을 위한 요청에 모두 협조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해 12월 22일 개정된 사회적참사 진상규명법에 따라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관해 사참위의 진상 규명 조사 업무가 제외됐다”며 “그럼에도 환경부는 사참위가 법적 업무 수행을 위해 협조 요청하는 경우 모두 협조했다”고 주장했다. 자료 제출의 법적 근거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협조 요청으로 해달라고 회신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18일 진행된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과제 점검 온라인 국회토론회에서도 환경부와 사참위의 갈등은 이어졌다. 박항주 사참위 가습기살균제진상규명국장은 “환경부가 사참위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 및 제도 개선 업무와 관련해 조사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대로면 부처의 자율성에 의해 가습기살균제 조사를 위한 자료를 제출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박용규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관은 사참위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다. 박 정책관은 사참위의 자료 요청 등과 관련해 “법제처에서 조정안을 마련했고, 그 조정안에 대해 환경부는 수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국장은 “협조 공문을 보낸 기간에 협조가 안 됐다는 것”이라며 “법제처 조정안에 대해 수용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반박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환경부와 사참위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지난해 11월 당시 사참위 위원장인 장완익 변호사 등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들은 지난 25일 “사참위 활동을 방해하는 환경부를 규탄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1579호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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