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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지 부도 1년 천호균 대표 >> 미련 훌훌 털고 농사나 지어야지 

파주 헤이리서 ‘쌈지농부’로 새 출발…사회에 도움 되는 일 하고 싶어 


▎파주 헤이리 친환경 상품숍 ‘지렁이다 ’. ‘슬로우바이쌈지 ’라는 새 브랜드처럼 천호균 대표는 천천히 가려 한다.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3월의 어느 수요일 저녁, 서울 합정동의 한 주점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얼굴 깊이 파인 주름과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반백(半白)의 머리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2009년 8월 회사 지분을 넘기고 패션계를 떠난 천호균(62) 전 ㈜쌈지 대표였다. 그가 건넨 명함 앞면에는 ‘천호균’이라는 손글씨가, 뒷면에는 ‘농사가 예술입니다, 쌈지농부’라는 ‘새 직장’이 적혀 있었다. 직원들과 함께 하는 조촐한 회식자리였다.

1992년 등장한 쌈지는 딸기·쌤·아이삭·진리·마틴싯봉 같은 순 우리말 브랜드로 패션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2000년대 초에는 매출 1600억원을 기록하며 ‘토종’의 자존심을 지켰다. 인사동 ‘쌈지길’, 홍대앞 ‘쌈지 스페이스’, 파주 헤이리의 ‘딸기가 좋아’는 이른바 ‘아트 마케팅’의 상징으로 불렸다. 시장은 쌈지의 성공 스토리에 주목했고 천 대표 역시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천 대표는 기업인은 물론 대학생·예술인에게 ‘가장 모시고 싶은 강사’로 통했다. 그의 삐딱함은 그렇게 영원히 사람들 마음속에 재미와 따뜻함으로 자리 잡는 듯했다.

“솔직히 기고만장했지요. 물건도 잘 팔리고 소문이 좋게 나서 쌈지 하면 다들 잘 봐줬거든요.”

4월 10일 헤이리 예술마을의 친환경 상품숍 ‘지렁이다’에서 다시 만난 천 대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2009년 8월, 자신이 갖고 있던 회사 주식을 ‘젊은 사업가’ Y씨에게 넘겼다. 하지만 회사는 지난해 4월 7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직원 200여 명 가운데 절반 정도만 현재 천 대표와 함께 일하고 있다.

부도가 났을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국내 토종 브랜드라는 자존심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마음 아팠죠. 직원들이 회사를 참 아꼈는데…. 쌈지와 희로애락을 같이한 사람들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지금도 막막합니다.”

많은 이가 쌈지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기업 경영에 문화·예술, 사회적 가치를 버무린 성공신화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경영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다. ‘시 쓰듯 경영한다’는 천 대표의 철학은 ‘도덕적 해이’로 비쳤다. 개인의 부를 위해 회사를 팔았다는 험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왜 매각을 결심했을까.

2000년대 들어 쌈지의 존재감은 많이 옅어졌다. 음악·미술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하며 브랜드 인지도는 높아졌지만 상품 구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즈음 ‘글로벌 감각이 떨어진다’ ‘순 우리말이 진부하다’ ‘명품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시작한 문화 마케팅 수준을 제품이 따라가지 못했어요. 패션업은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회사에서 주로 적자를 내던 문화사업 부문을 갖고 나와 본격적으로 콘텐트 사업을 하려 했습니다.”

처음 손을 댄 것이 영화사업. 쌈지가 인수한 영화사(쌈지아이비전)는 ‘무방비 도시’ ‘인사동 스캔들’을 제작했다. 관객이 제법 들었지만 100억원 가까이 되는 투자금을 메우기도 빠듯했다.

영화에 투자한 것이 회사를 매각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군요.

“현실적으로는 자금 문제가 이유였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부동산이나 브랜드를 매각하는 방법으로도 자금 사정을 좋게 할 수 있었지만 시간을 갖고 콘텐트 사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휴우….”

쌈지가 부도 처리된 결정적 이유를 되새기는 것이 괴로워서였을까. 얘기를 이어가던 천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한참을 허공만 바라봤다. “잘못된 판단이었어요. 믿을 수 있는 지인에게 소개받은 사람이었는데….”

회사를 M & A 시장에 내놓지 않고 개인적으로 새 주인을 알아본 것이 잘못이었다는 얘기다. “자금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사정이 좀 좋아지면 정식으로 매각하려 했는데….” 천 대표는 자꾸 말끝을 흐렸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두세 번 다른 인수 희망자와 논의가 있었지만 내키지 않아 반대했습니다. 그때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한다는 ‘젊은 사업가’를 소개받았어요. 환경사업을 한다고 해 쌈지와 맞겠다고 생각했지.”

회사 안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까?

“비공식적으로 진행한 일이라 다른 사람과 상의하기도 어려웠어요. 고독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뭐에 씐 것 같아. 그래도 한 달을 고민했는데….”

그러나 회사를 인수한 Y씨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지급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빼돌렸다. 당시 천 대표는 그에게 계약금을 받고 일정 기간 회사에 지분을 맡겨뒀다 매각 대금이 모두 지급되면 지분을 완전히 넘기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천 대표의 지분 가치는 50억~60억원 정도였다. 하지만 Y씨는 일부 계약금만 지급하고 회사에 맡긴 지분을 담보로 사채를 썼다. 회사에 사채업자가 드나들었고 직원들은 동요했다.

계약할 때 전혀 이상한 낌새를 못 느꼈나요?

“알았으면 안 팔았죠. 차일피일 미룰 때 잘못된 걸 알아차리고 되돌렸어야 했는데.”

직원들이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왜 회사를 끝까지 경영하지 않고 지분을 팔았는지 그 과정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겠지요. 일자리를 잃은 직원들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지금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오해를 부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요, 지금.”

일부에서는 본업을 돌보지 않고 문화사업에 치중해 회사가 더 어려워졌다고도 합니다.

“제조업보다 농부(문화사업) 쪽 일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화적 가치를 담아 제조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는 게 리더가 할 일이니까요.”

새 주인이 회사를 잘 경영할 거라 믿었던 천 대표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Y씨를 고소하고 대표이사 직무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현재 주주 권리를 훼손하고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Y씨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1984년 레더데코를 설립했을 때부터 25년 넘게 분신처럼 여겼던 회사였지만 무너지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쌈지가 무너진 데 대한 책임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100%죠. 사기를 당했다고 해도 그 원인을 제가 제공했으니까요.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중매쟁이를 탓할 순 없잖아요. 하지만 다른 중소기업인이 비슷한 일을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피해 사례를 담은 책이나 매각 매뉴얼이라도 있었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을 텐데 경영 상식이 부족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날 운이 참 좋았어요.”

천 대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겪었지만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어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그는 구구절절 하소연하지 않았다. 이제 과거보다 미래를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였지만 도덕적 책임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지분을 매각할 때 직원들과 대리점주, 협력업체들에 “앞으로 더 잘해 보자”고 말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을 괴롭힌다.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2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하시겠습니까?

“(망설이다) 매각이라는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을 겁니다. 콘텐트 사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반드시 꼭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매각했을 거예요.”

일자리 잃은 직원들에게 미안

쌈지는 현재 파산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쌈지길은 천 대표가 물러나면서 운영권이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쌈넷을 비롯한 음악 관련 문화사업은 쌈지농부에서 유지해 나가고 있다.

쌈지 브랜드는 어떻게 됐나요?

“구속 전에 Y씨가 넘긴 일부 브랜드를 다른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정식 쌈지 브랜드 사용권은 부도 후 경매에 나와 ㈜고마운사람에 인수됐어요. 고마운사람은 열매나눔재단이 후원해 만든 사회적 기업인데 서울 신월동 공장에서 ‘슬로우바이쌈지’라는 브랜드로 가방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낙찰가가 얼마였습니까?

“글쎄, 3억5000만원에서 4억원 사이였던 것 같아요. 평생을 바쳐 키운 브랜드인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싼값이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습니까. 또 사회적 기업에서 가치 있게 이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쌈지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다른 이름으로 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잖아요.”

쌈지 구두는 ‘리틀파머스’로 재탄생했다. 리틀파머스는 고마운사람과 계약해 일정 비율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강남점, 홍대점에서 제품을 판매한다. 천 대표는 고마운사람의 디자인 감수를 맡아 일주일에 두 번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가방 제작과 관련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2004년 문을 연 테마파크 ‘딸기가좋아’를 바탕으로 천 대표는 파주 헤이리에 새 터전을 일궜다. 문화 사업부였던 ‘어린농부’에서 이름을 바꾼 ‘쌈지농부’가 주축이 됐다. 쌈지농부는 유기농 상품을 판매하고 생태문화 사업을 한다. 사업 자금은 부인 정금자씨가 쌈지 지분을 매각해 마련했다. 대출도 받았다. 쌈지농부는 지난해 말부터 친환경 상품숍 ‘지렁이다’와 갤러리·교육장 겸 게스트하우스인 ‘논밭예술학교’, 공예작가 8명의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공방일하자’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은 충북 괴산에 있는 유기농 기업 ‘흙살림’과 제휴해 ‘농부로부터’라는 유통매장을 낼 준비가 한창이다. 1호 매장은 6월 초 헤이리에 열 계획이다. 천 대표는 새 사업이 올해 본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부도 후 작은 것의 소중함 깨달아

앞으로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나오실 건가요?

“부도를 맞은 뒤 소박한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사회적 기업으로서 공동체 사업을 하는 것,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게 목표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 손을 잡고 하신 말씀이 있어요. ‘늘 착한 마음을 기억하라’는 거였지요. 그 유언을 지난 2년 동안 가슴 깊이 되새겼습니다.”

남과 똑같은 것이 싫어 반 발 앞서간 ‘불운의 크리에이터’는 ‘농부 CEO’로 다시 출발점에 섰다. 그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면 두 개의 잣대가 필요하다. 경영인 천호균과 예술가 천호균이다. 쌈지에서 두 존재는 공존했지만 예술가적 기질이 더 앞섰다. 그 꿈과 재기 발랄함으로 천 대표는 다시 논밭 경영에 나섰다.

201105호 (20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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