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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림동 포장마차 그 자리로… 

창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지만 벤처 창업은 여전히 쉽지 않은 선택이다. 25년 전, 그것도 교수의 길을 가던 명문대 대학원생에게는 더욱 힘든 결정이었을 거다. 변대규 휴맥스 대표의 20대를 벤처 창업 바이블의 첫 장이라 여기는 이유다.

▎변대규 대표는 이르면 내년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춰 지속가능한 벤처기업으로 재도약하겠다고 밝혔다.



“나는 엉터리 엔지니어였다. 박사과정(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첫 해에 전공 분야에서 좋은 교수가 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교수를 포기했다. (2013년 세계경영연구원 강연에서)”

휴맥스의 성공 신화는 ‘포기’에서 시작됐다. 학위 수여를 앞둔 1989년 변대규(54) 휴맥스 대표는 공대 동기들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포장마차에 둘러앉았다. 장래를 고민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끝에 누군가 장난처럼 ‘우리도 사업을 하자’고 내뱉었다. 이 한마디에 모두 뜻을 모았다. “젊은 기분에 일을 벌인 거지요.” 유명한 휴맥스의 설립 배경이다. 기술보증기금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서울대 근처에 건인시스템이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가 매출 1조원대의 국내 셋톱박스 1위 업체 휴맥스의 전신이다.

‘벤처 신화’ ‘벤처 1세대의 자존심’ 같은 수식어를 오랜 시간 지켜오기까지 변 대표는 몇 번의 변곡점을 넘겼다. 창업 초기 기술 개발에 매진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넘쳤는데 이상하게 몇 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시장을 너무 몰랐던 거죠.” 뜻하지 않게 기회가 왔다. 컴퓨터용 영상처리보드의 영상에 자막을 입히는 기술에 고객들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휴맥스는 이 기술을 이용해 가요반주기를 개발했다. “4년 만의 작은 성공이었습니다.”

갈등도 있었다. ‘우리가 이런 거 만들려고 창업했느냐’고 싸움이 벌어진 지 6개월 만에 창업 멤버 한 명이 회사를 그만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매출이 200억원을 넘었을 때 변 대표는 셋톱박스(디지털 위성방송용 수신기)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반주기 사업은 접었다. “상당히 무모했지만 지나고 보니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아요. 모든 자원을 쏟아 붓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1996년 유럽 규격에 맞는 셋톱박스를 개발, 이탈리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수출해 280억원 매출을 달성했지만 이듬해 매출이 반토막 났다. 다름 아닌 품질이 문제였다. 기술력 밖에 믿을 게 없었지만 세계 무대에 나가자 기술력이 달렸던 것. 1997년, 제품은 더 이상 판매되지 않았고 재고는 쌓이는데 현금은 줄었다. 더군다나 코스닥에 상장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직원들은 반품된 제품을 수리하는데 지쳐있었다. 거래업체인 대기업은 부도를 맞았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닥쳤다.


▎휴맥스의 전신인 건인시스템의 변대규 사장(오른쪽 두 번째)이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건인시스템은 1998년 휴맥스로 사명을 바꿨다.
“망할 것 같다, 사업을 접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변 대표는 품질을 보완해가며 1998년 신제품을 내놨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시장 몰라 고전, 같은 실수 반복해

제품이 다시 팔리기 시작하면서 매출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매출이 1998년 200억원대에서 5년 만에 3000억원대로 늘었다. “그때 창업 단계는 끝났구나 생각했습니다.”

이후 휴맥스는 유럽, 중동, 미국, 일본 등지에 셋톱박스를 공급하며 안정적으로 외형을 키워오고 있다. 해외 매출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한다. 전문가들은 올해 역시 성장이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이정기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휴맥스는 진화하는 셋톱박스 시장에 맞게 업그레이드 된 모델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며 “올해 북미와 신흥국 시장에서 판매가 늘어 매출 1조5000억원 이상을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휴맥스가 수많은 벤처기업의 몰락 사이에서 신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시장 감각을 키웠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 이미 세상이 꽉 차서 틈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간혹 틈이 열려요. 누가 먹으면 또 금세 닫힙니다. 그 틈을 찾아내는 것이 기업가가 할 일입니다.”

가요반주기로 처음 성공을 맛봤을 때 그는 ‘사업이 이런거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병원의 목적이 환자를 치료해 밖으로 내보내고 학교의 목적이 학생을 교육해 내보내는 데 있는 것처럼 기업은 기업 밖의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가에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기업가는 세상의 변화를 읽고 거기에서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의 틈을 찾아내는 그만의 방법이 있다. “신문을 보다 ‘어’ 하게 되면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틀이 틀렸거나, 아니면 그 틀이 변하고 있단 것이지요.”

휴맥스가 셋톱박스에 이어 자동차 전장(전자장치)사업에 뛰어든 데도 변 대표만의 계산이 있었다. “현대·기아차가 커지면서 자동차부품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더군요. 휴맥스가 보유한 기술과 관련된 사업이 뭔지 찾아봤습니다.” 휴맥스는 2012년 차량용 오디오·비디오·내비게이션(AVN) 전문업체인 대우아이에스(현 휴맥스오토모티브)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자동차 전장사업을 시작했다. 휴맥스오토모티브는 지난해 2600억여 원 매출을 기록했다.

사업은 작게 시작해야 성공

기술 혁신으로도 산업은 변화한다. “인터넷으로 방송을 보게 되면서 방송산업이 바뀌는 것이 그렇습니다. 2020~2025년이면 방송이 모두 인터넷 프로토콜(IP) 방식으로 전환될 것으로 봅니다. 이런 변화는 휴맥스에 위기일 수 있습니다. 처음 셋톱박스 시장에 들어갈 때는 휴맥스가 ‘혁신’을 일으켰고 기존 기업이 위기였지만 이제 휴맥스가 기존 기업이니까요.”

하지만 변 대표는 기술 혁신으로 사업 기회를 얻는 건 전체의 20% 정도라고 했다. 대부분 소비자의 생각 변화에서 사업의 기회가 생긴다는 것. “예전에는 머리손질이 필요할 때 미용실에 갔지만 잘 살게 되면서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헤어스타일을 바꾸잖아요. 외식 프랜차이즈나 포장이사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가는 밖, 즉 시장을 읽는 사람이다. 변 대표조차도 이 간단한 진리를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번 실패하고선 잘 몰라요. 두세 번 실패해봐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사실 2012년에도 일본에서 디지털카 TV를 출시했다가 80억원을 손해 봤어요. 수요를 너무 높게 잡은 탓이지요.” 그때 신규사업은 반드시 작은 실패를 목표로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사업은 작게 해야 성공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작게 시작해 조금씩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큰 바퀴는 방향을 틀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기업가와 경영자는 다르다. 경영자는 안에 있는 사람이다. “많은 벤처기업이 기업가와 경영자의 차이를 알기 전에 망합니다.” 외형이 커지면서 변 대표는 ‘기업가’가 아닌 ‘경영자’로서 내부 조직 정비에 나섰다. “매출이 3000억원을 넘어서면 더 이상 창업 때 마음으로는 경영이 안 됩니다. 품질, 구매, 제조, 개발, 마케팅 모두 더 체계적으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외환위기 당시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직원들은 오히려 더 열심히 일했다. 변 대표는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 “작은 조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조직이 커지면서 직원들과 마음을 나누기가 점점 어려워졌어요.”

그는 최근에는 직원들이 복도에서 자신을 만나면 연예인 대하듯 한다며 웃었다. “예전에는 ‘품질 좀 잡자’고 하면 직원들이 ‘됐어요. 술이나 드세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품질 좀 잡자’고 하면 다 집어치우고 품질에만 몰두하거든요. ‘오버 커뮤니케이션(over communication)’이 되는 거지요.”

“ 노키아도 무너졌는데 휴맥스라고…”

2000년대 초반 조직이 커지면서 창업 초기 직원들과 새롭게 합류한 직원들 간 마찰이 생겼다. 업무 효율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창업 초기 직원들을 계속 배려하면 기업문화가 망가질 상황이었다. 변 대표는 고심 끝에 창업 공신들을 불렀다. “앞으로 조직을 위해 계속 일할 수 있으면 남고 아니면 떠나시오.” 이들 중 절반이 회사를 나갔다.

“굉장히 서운해했지만 1~2년이 지나자 이해하더군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아니라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을요.” 그때 그만둔 직원들과는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직원 수가 1000명을 넘으면서 5~6년 동안 조직을 정비하며 운영 혁신에 매달렸다. “이 힘으로 다시 성장가도에 섰지만 운영 혁신에 치중하면 사업 혁신을 못합니다. 요즘 고민은 예전의 사업 혁신 능력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변 대표는 지난 2월 기업설명회에서 “올해나 내년 전문 경영인에게 CEO 자리를 승계하고 다시 ‘기업가’로 돌아가 회사의 장기 비전을 고민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미래를 고민했던 신림동 포장마차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셈이다.

1980년대 말에는 공학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지 않으면 연구소나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변 대표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벤처 창업에 발을 들인 데는 당시 지도교수였던 권욱현 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교수의 영향이 컸다. 권 교수는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로 있으면서 실리콘밸리를 경험했다.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창업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다른 교수님들은 무슨 돈을 벌려고 그러냐며 야단쳤지만 권 교수님은 ‘한국의 공과대학이 사회를 위해 뭘 해야 하느냐’며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하셨습니다.”

변 대표는 기업가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일부는 맞고 일부는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해도가 높은 편임에도 기업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창업 초기에 관련 책을 1000권 넘게 읽었다고. 창업한 지 25년, 변 대표는 이제 기업이 조금 손에 잡히는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공부할 게 많고 그게 재미있어서 지금까지 왔는지 몰라요.” 그 이면에는 불안함이 있다. “늘 두렵습니다. 노키아처럼 거대한 기업도 2, 3년 만에 무너졌는데 휴맥스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을까요.”

휴맥스의 다음 세대를 고민하며 변 대표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업가로서 뭘 책임져야 할까요?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0대에 했던 질문을 지금도 늘 합니다. 원점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누군가 그에게 원론적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기업가로서 기질이 있느냐고.’ 그는 답한다. “내가 기업가 자질이 있는 사람인지는 생각도 안 해봤습니다. 그저 좋은 기업가가 될 수 없을 거란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요.”

201406호 (201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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