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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E - 기인이 만드는 기막힌 컬트 와인 

미국 나파밸리의 할란 이스테이트, 12년 숙성해 출하하고 1년에 2만 병만 생산하는 최고급 와인이다. 로버트 파커로부터 다섯 차례나 100점을 받았다. 

김태진 포브스코리아 기자

▎발랜틴 부리에 이사가 할란 이스테이트의 ‘본드’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국 고가 와인의 대명사 ‘컬트 와인’은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뿐 아니라 소장 가치가 높아 희귀한 선물 대접을 받는다. 시판 가격보다 경매에서 몇 배 더 나가기도 한다. 이런 컬트 와인의 명성을 끌어 올린 대표적인 와인이 ‘할란 이스테이트’다. 한국에서는 부자 가운데서도 와인 애호가들이 찾는 ‘그들만의 와인’으로 불린다. 지난해 추석 최고가 선물로 유명해졌다. 한 백화점에서 미국 컬트 와인의 양대 산맥인스크리밍 이글(2010년 빈티지)과 할란 이스테이트(2009년 빈티지)를 세트로 묶어 560만 원에 내놔 눈길을 모았다.

컬트 와인은 구체적인 실체보다는 마케팅 목적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법적으로 일정 조건을 맞춰야 하는 유기농 와인과 달리 컬트 와인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와인 메이커들은 판촉을 위해 자사 상품에 컬트와인 수식어를 붙인다. 구체적으로 컬트 와인은 어떤 것일까. 통상 20여 년 이상 컬트 와인으로 명성이 높은 와인은 공통점이 있다. 와인 제조에 대한 명확한 비전, 소량생산의 희소성, 지속적인 품질 유지, 저명한 와인 평론가와 전문매체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 등이다.

할란 이스테이트(Harlan Estate)는 1990년 첫 빈티지 출시 이후 지금까지 미국 최고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다섯 번(1994·1997·2001·2002·2007년 빈티지)이나 받았다. 철저한 품질 관리로 매년 2만 병 이하 소량 생산으로 희소성을 유지한다.

할란 이스테이트는 연간 1만 8000∼2만 병 소량 생산을 고집한다. 미국 이외에 러시아·두바이·중국·일본 등 35개국에 수출한다. 최대 소비국은 미국·일본이다. 한국에는 최대 120병을 공급한다. 부리에 이사는 “생산량이 적어 소매가 아닌 우편 예약이나 경매, 레스토랑을 통해 팔린다”며 “가격은 500달러 정도지만 경매에서 3000달러로 훌쩍 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설명한다. 정해진 고객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하면 대기 자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려야 한다.

생산 방식은 고집쟁이 그 자체다. 품질 최우선주의다. 1985년 와이너리가 설립됐지만 첫 번째 와인은 1996년에 나왔다. 포도나무를 심은 뒤 좋은 포도가 열리기까지 6년이 걸렸다. 1990년 이렇게 수확한 포도를 와인 저장고에서 6년을 숙성시켜 시장에 내놨기 때문이다. 무려 12년의 세월을 견뎌낸 할란 이스테이트는 1996년 와인 업계 스타가 됐다. 로버트 파커는 당시 이 와인을 시음하고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깊은 맛을 내는 레드 와인 가운데 하나”라고 극찬하며 100점 만점을 부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밀려드는 주문에 팩스 용지를 갈아끼우느라 직원들이 화장실을 못 갈 정도였다고 한다.

창업자의 고집이 만든 명성

프랑스를 대표하는 보르도·부르고뉴와인이 토양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만들었다면 나파밸리 와인은 사람이 화제를 만들어낸다. 로버트 몬다비가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을 널리 알린 선구자라면 할란 이스테이트의 창업자 빌 할란(74) 회장은 나파밸리 와인을 컬트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한 단계 성숙시킨 인물이다,


▎할란 이스테이트의 창업자 빌 할란.
할란 회장은 기인(奇人)으로 유명하다. 그는 미국 UC버클리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젊은 시절 매우 다양하고 극단적인 인생을 경험했다. 경비행기 파일럿 생활을 하면서 1년간 보트에서 살았다. 6개월 동안 무일푼으로 아프리카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런 그가 대변신을 한 것은 20대 중반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면서다. 명석한 그는 캘리포니아에 부동산 개발 회사인 퍼시픽 유니언을 창업, 대박을 냈다. 부자가 된 후 평소와인에 관심이 많아 샌프란시스코 회사에서 나파밸리까지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곤 했다. 당시 기자증(프레스 카드)이 있으면 여러 와이너리에서 주최하는 시음 행사에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가짜 기자증을 만들었을 만큼 엉뚱했다.

그는 부동산업을 하다가 나파밸리 최대의 와이너리 소유자인 로버트 몬다비와 만나 친구가 됐다. 그와의 친분으로 1975년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의 와인 명가를 방문하면서 와인 세계에 폭 빠졌다. 프랑스에 다녀온 후 “수 백 년간 세대를 이어갈 명문 와이너리를 캘리포니아에 만들겠다”는 꿈을 키운다.

할란은 부르고뉴의 최고 포도밭이 경사면에 있다는 것에 착안, 나파밸리의 경사면 땅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나파밸리의 포도밭은 모두 평지였다. 1978년 세인트 헬레나 지역에 땅을 구입했지만 토양이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엔 너무 서늘하고 비옥했다. 저명한 와인 컨설턴트였던 미셸 롤랑을 초빙해 자문한 결과 “와인을 빼고는 뭐든 해도 좋다”는 처참한 답을 들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포도밭을 갈아 엎고 1979년 리조트를 건설했다. 오늘날 나파밸리 최고의 휴양 시설인 메도우리조트의 설립 일화다. 매년 6월이면 이곳에 미국 전역의 부자·미식가가 고급 와인을 수집하기 위해 몰려 든다. ‘나파밸리 와인 경매’ 행사로 이 역시 그가 1981년 처음 유치했다.

12년간 한 푼 못벌어도 최고만 고집

심기일전, 1984년 경사면에 위치한 배수가 잘 되고 화강암 토양을 가진 러더포드와 오크빌 지역의 땅을 다시 샀다. 자연적으로 조성된 야생 숲으로 전기나 수도 같은 인프라가 전혀 없는 황무지였다. 할란 이스테이트의 태동이다. 다시금 미셸 롤랑에게 자문한 결과 ‘OK’였다. 그는 여기에 까베르네 소비뇽 70%, 메를로 20%, 까베르네 프랑 8%, 그리고 쁘띠 베르도 2%의 비율로 포도나무를 심었다. 특급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설립 이후 1996년 첫 와인을 판매하기 전까지 무려 12년을 어떤 수익도 없이 최고를 위한 준비와 투자만 고집했다. 단위 면적당 포도 수확량을 제한하고, 잘 익은 포도알만 선별하는 식이다. 대개 신생 와이너리는 현금을 돌리기 위해 먼저 화이트 품종을 심어 생산하고 이후 토양이 완성되면 레드 와인을 제조하는 등 통상 5~7년이면 와인을 시판했다.

부리에 이사는 “빌 할란은 일체의 타협을 모르는 고집쟁이였다”며 “12년간 매출이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 균일 품질의 포도를 수확하기 위한 포도밭을 조성하고 최고의 양조진을 구성하는 등 처음부터 최고만을 지향했다”고 말한다.

201411호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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