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경일의 경영리더십 - 빨간 신호등 무시하면 허무하게 무너진다 

과거의 잘못한 바를 뼈저리게 각성해 ‘뉘우치고(懲) 삼갈 때(毖), 미래를 향한 뚜렷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 중앙포토
기업에는 ‘폐기학’이라는 것이 있다. 실패의 원인을 찾아 개선함으로써 실패 자체를 매몰비용화 하지 않고 성공을 위한 초석이 되게끔 적극적으로 살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초우량 혁신기업들은 실패에서 배운다. 오류와 실수를 새롭게 해석해 미래 도약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역사가 주는 통절한 가르침을 우리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7년 간의 조일 국제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그 기나긴 전쟁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졌는가? 이런 뼈저린 역사의 경험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경영의 산 교훈이다. 돌이켜보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피하거나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국가 경영상의 빨간 신호등은 누차에 걸쳐 오랫동안 제기되었지만 끝내 무시되고 말았다.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임란이 일기 10년 전, 율곡이 임금께 올린 상소의 핵심 내용이다. 율곡은 이듬해 임금께 올린 <진시폐소>에서도 ‘200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을 먹을 식량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피 토하듯 토로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듬해인 1584년에 죽는다. 그때는 선조가 국왕 노릇을 한지 어언 17년이 되었고 나이도 서른둘이었다. 나이로 보나 재위기간의 국정 운영 경험으로 보나 결코 미숙해서는 안될 시기였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의 관료들이 아는 세계는 명과 조선과 관계, 그리고 조정 내부의 당파 간 권력 쟁투 말고는 없었다.

이 시기, 세계적으로는 크나큰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 임란이 일기 50년 전인 1543년 서양은 대항해 시대를 맞아 동방으로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포르투갈 범선 한 척이 풍랑을 만나 일본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하면서 서구식 조총 두 자루를 건네주는 일이 벌어진다. 이는 일본 내 무기의 대변화와 함께 전쟁 방식에서 변혁이 일어나는 일대 사건이 된다. 결국 이 조총을 이용해 오다노부나는 전국시대를 종결했다. 중세에서 근대의 여명으로 넘어오는 이 시기의 급격한 무기 발달은 동아시아에서 ‘비대칭 군비’를 불러온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일본이 이렇게 움직일 때 조선은 안타깝게도 눈 감고 있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무관하게 조선은 200년 전의 시공간에 살고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그 뚜렷한 증거가 된다. 1402년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이 지도가 임란 직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는 게 불행이었다. 이 지도를 들여다보면 멀리 중국, 인도까지 잘 나타나 있고, 조선도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주변국인 일본은 보잘것없이 저 아래 실물보다 조그맣게 구겨져있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까지 적을 이렇게 과소평가 했으니 조선 조정이 얼마나 까막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기업이 쓰는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경쟁사(자)가 누군지 전혀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중에 경쟁우위를 갖는 건 고사하고 대비책마저 제대로 세워질 리 만무했다.

징비, 나를 향한 불망(不忘)의 채찍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조선은 큼지막하게 일본은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터진다. 당시 국가적 긴급사태에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들이 당리당략으로 보고가 달라 위기를 더 키운 점은 쇠락하는 기업의 특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외부의 적대적 환경과 내부의 무능, 알력, 무방비가 결합해 결국 7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조선 땅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전후의 온갖 내부 모순과 전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바로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은 내부를 향한 고발이자 자신을 향한 피 묻은 채찍이며, 동시에 불망(不忘)의 방책이다. 임란의 경험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크고 깊다.

당시 조선을 두고 명과 왜 간에 벌어진 추잡한 거래의 흑막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왜가 정발이 지키는 부산 성(城)을 친 것은 1592년 4월 13일이었다. 부산이 함락되고 4일 뒤인 4월 17일에야 임금은 왜군이 쳐들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급히 한양에서 군대를 끌어 모았는데, 그 수가 채 300명이 넘지 않았다. 왜군은 5월 2일 한양에 무혈입성했다. 부산서 한양까지 460㎞를 주파하는데 고작 18일이 걸렸으니 하루 27㎞를 행군한 셈이다. 임란 당시 왜군에 얼마나 무저항 상태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임란 발발 후 66일이 지난 1592년 6월 18일, 선조는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들의 진퇴에 달려 있으니 삼가 지휘를 받겠소이다”며 전시작전지휘권 일체를 명 측에 넘겨준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전시작전권이 외국군에 넘어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길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이 때의 일은 명확한 교훈을 일깨워 준다. 이 시기 명과 왜 간에 벌어진 추잡한 거래는 조선을 철저히 배제한 것이었다. 명은 심유경이 왜와 화의를 추진하게 되는데, 고니시가 평양을 점거한지 2개월 후인 그 해 9월 1일, 심유경과 고니시가 평양성 북쪽 10리 밖 강복산 밑에서 회담을 갖고 10리 경계선에 목책(木柵)을 세운다. 우리나라 최초의 휴전선이다. 조선을 나눠 왜는 남쪽 4도를 갖고, 명은 북쪽 4도를 가짐으로써 조선을 요동의 울타리로 만들겠다는 흥정이었다. 왜로서는 조선의 4도를 갖게 되니 명분과 실익이 서는 것이고, 명으로서는 조선의 북 4도를 지킴으로써 조선이 계속 요동의 울타리로 남으니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이렇듯 조선은 조선 영토 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전쟁의 당사자가 되지 못했다. 일찌감치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가운데 명과 왜간 거래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400년 전 임진왜란의 진실이다. 어떤가? 이와 꼭 같은 판박이가 이후에도 또 벌어지는데, 예컨대 1894~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 1904∼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도 성격이 같다. 주변 강국으로 말미암아 한반도가 그들의 전쟁터로 쓰이며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실기한 역사는 무참한 피의 대가를 요구했다. 이 점이야말로 서애 류성룡이 내려치는 징비의 핵심 요소일 것이다. 여기서 기업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기업은 창업, 성장, 성숙, 재구축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재혁신, 재구축 계획이라도 시기를 놓치면 백약이 무효다. 기업이 겪는 위기는 대부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항시 있다. 이를 가리켜 ‘알려진 무지(known unknowns)’라고 부른다. 위기 진단으로 상당 부분은 미리 예견하고 방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가상 위기를 설정해 놓고 위기 상황을 훈련해 봄으로써 위기의 현재화를 막는 것이다. 글로벌 50대 기업의 95%가 위기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적 초우량 기업인 IBM, 인텔, P&G도 위기로부터 재도약 했다. 위기를 성공적으로 관리한, 이를테면 징비의 자세로 임한 것이다. 류성룡으로부터 배우는 징비의 교훈은 글로벌 도전이 몰아치는 시기에 경영자들에게 끝없는 반성과 반추의 거울이 된다.

전경일 -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으로 인문과 다른 분야의 경계를 허무는 통섭적 관점을 연구한다. 저서로『조선남자』와 『창조의 CEO 세종』 등이 있다.

201504호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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