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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감독 손정 - 제품을 팔지 못하는 광고는 인정받지 못한다 

 

오승일 포브스 차장 사진 전민규 기자
아시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손정 감독은 광고업계에서 성공신화를 만들고 있는 글로벌 리더다. 그는 최근 화장품 사업에 진출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홍콩을 비롯해 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손정 감독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여성 CF 감독이다.
흔히 TV 광고를 ‘찰나의 미학’이라고 표현한다. 15초에서 30초라는 짧은 시간의 광고 안에는 다양한 삶의 정보와 희로애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영상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 삶의 일부분이 된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서 불가분의 존재가 된 광고 영상을 만드는 사람을 CF 감독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전쟁터 같은 광고촬영 현장에서 수많은 스태프들을 총지휘하고 소비자의 마음속에 커다란 반향을 남기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한다.

홍콩을 중심으로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타 CF 감독이자 광고제작업체 슈팅 갤러리의 공동대표인 손 감독을 지난 2월 청담동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CF 감독이 드문 현실을 감안했을 때 인종과 성별의 편견을 넘어 아시아를 무대로 맹활약하고 있는 그는 분명 자랑스러운 한국 여성임에 틀림없다.

이 스튜디오는 어떤 용도인가.

홍콩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한국은 친정 같은 곳이다. 이 스튜디오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사용하는 공간이다. 간단한 광고촬영도 하고, 노는 것을 좋아해 지인들과 가끔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웃음)

인터뷰를 준비하는 동안 당신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더라.

한국보다는 홍콩이나 중국에서 작업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한국에서도 작업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더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어떤 부분이 그런가.

한국에는 여성 감독에 대한 보이지 않는 텃세가 있다. 우리 일은 보통 적게는 30명, 많게는 50명 정도의 스태프가 움직인다. 대부분의 스태프는 남성들이다. 영화와는 다르게 주어진 시간 내에 빠르게 촬영을 마쳐야 한다. 그러려면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해야 하고 스태프들을 휘어잡아야 한다. 이 부분이 여성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홍콩이나 중국에 비해 한국은 여성 감독에 대한 선입견이 심한 편이다.

예전에 모 자동차 광고촬영 현장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스태프들의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더라.

촬영 현장에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스태프 한 명이 실수를 하면 그 여파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제대로 준비가 안 돼 촬영이 지체되면 손해도 엄청나다. 배우들에게 시간은 돈이다. 정확하게 시간을 지켜줘야 한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엄할 수밖에 없다. 가끔 예능프로그램 ‘진짜사나이’에 나오는 엎드려뻗쳐 같은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한다.(웃음)

실제 현장에서 기합을 주기도 하나.

기합까지는 아니지만 굉장히 무섭다. 일본말로 히아시 준다고 하지 않나.(웃음) 인원이 많다 보니 나른한 친구들이 한둘은 꼭 있다. 그런 부분들을 빨리 잡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세계적인 CF 감독 래리 슈와의 만남


▎아트 디렉터 출신답게 스타일리시한 비주얼 디자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손정 감독은 양조위(오른쪽), 이연걸, 서기 등 중화권 톱스타들과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손 감독은 1989년 세계 10대 광고회사 중 하나였던 삼희 린타스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CF 감독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지만 주어지는 일은 기획 관련 업무였다. 감독 일을 할 수 있다는 비전이 없었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버클리에 머물며 장차 할 일을 궁리하던 중국내 근무 시절 인연을 맺었던 ‘슈팅갤러리’에서 미국 현지촬영 작업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다. 현지 프로듀서로 1년 정도 일하며 싱가포르 타이거 맥주, 독일 전기전자기업 지멘스, 프랑스 통신업체 알카텔 등의 CF 촬영에 힘을 보탰다.

1993년 정식 직원으로 채용돼 홍콩에 간 그는 세계적인 CF 감독인 래리 슈 밑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하며 광고 일을 본격적으로 배워나갔다. 1995년 결혼해 남편이 된 래리 슈는 칸느, 클리오, 뉴욕페스티벌 등 국제 광고제 수상을 비롯해 ‘광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D&AD 금상을 받은 유일한 아시아인이다. 나이키가 중국시장을 겨냥해 만든 트레이닝복 광고를 통해 1996년 데뷔한 손 감독은 지금까지 코카콜라, 나이키, 산요전자, 유니레버, 피앤지, 노키아, 파나소닉 등 다국적 기업과 삼성전자, 애니콜, 현대모비스, 태평양 등 국내 기업의 광고물을 제작했다.

광고 제작에 있어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메시지 전달이 가장 중요하다. 짧은 시간 안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비주얼이 아무리 훌륭해도 메시지가 모호하면 소비자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와는 다르게 선택의 여지도 없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광고 속에서 시선을 끌어야 하는 극심한 경쟁 상태에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하지 않으면 묻힐 수밖에 없다.

광고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고 있는지.

광고는 감독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다.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CF 감독은 부지런해야 한다. 영화감독과 비교했을 때 깊이는 조금 떨어져도 순발력은 월등하다고 자부한다. 마라톤과 단거리 경주 같다고 할 수 있다.

CF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광고는 예술이 아니다. 제품을 팔지 못하는 광고는 인정 받지 못한다. 광고는 놀라움, 즉 서프라이즈(surprise)다. 소비자의 기호는 변화무쌍하다. 그들에게 매번 새로움을 전해야 한다. 식상해지는 순간 광고의 생명력은 끝난다. 소비자의 예상을 넘고 기대 밖의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감각적인 연출력으로 전 세계 소비자 유혹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력이 돋보이는 손 감독의 CF는 중국을 비롯해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화교권에 주로 방영된다. 그중 피앤지 샴푸 광고는 화교권을 넘어 유럽과 호주 시장에서도 통했다. 덕분에 피앤지가 자사 제품 광고를 제작하는 전 세계 광고업체를 대상으로 시상하는 ‘글로벌 엑셀런트’상을 받기도 했다. 또 말레이시아 광고제에서 베스트 시네마, 아트 디렉팅, 편집상을 수상한 타이거 맥주, 홍콩 젊은 층에게 컬트 광고의 대명사로 꼽히는 선데이 텔레콤의 론칭 광고에서는 손 감독의 대담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양조위, 이연걸, 서기, 관지림, 견자단, 판빙빙, 저우쉰, 황샤오밍, 야오천 등 특급 스타들과 작업을 하는 손 감독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해 광고를 만드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중국의 여신이라 불리는 안젤라 베이비의 남자친구이자 가장 핫한 배우인 황샤오밍과 함께 캘빈 클라인 속옷 광고를 찍고 있다.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파격적인 광고다. 이어서 중국 유명 여배우와 함께 화장품 광고도 작업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주로 패션이나 뷰티 같은 야들야들하고 예쁜 작업을 많이 했다.(웃음) 앞으로는 자동차나 스포츠 같은 하드하고 과격한 작업도 해보고 싶다. 다이내믹하고 에너지 넘치는 광고를 너무너무 해보고 싶다. 광고주 분들의 많은 연락 바란다.(웃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매순간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 애착이 가지 않은 작품은 없다. 대신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시몬스 침대다. 비슷한 시기에 남편이 먼저 에이스 침대 광고를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광고주가 같더라. 관계자에게 남편의 광고가 반응도 좋았고 마음에 들었는데 당신의 광고는 어떨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듣고 부담이 너무 컸다. 뉴질랜드에서 촬영한 시몬스 침대 광고에는 할머니 두 분과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한국에서와는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아이들이 짜증을 내더라도 무조건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강압적으로 할 수 없도록 법으로 보장돼 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남편도 유명한 CF 감독이다. 경쟁심도 생길 거 같은데.

우리 부부의 경쟁은 업계에서 유명하다. 완전히 적과의 동침이다.(웃음) 남편이 들어가는 경쟁 PT에는 무조건 들어 간다. 남편과 내가 추구하는 광고가 다르게 때문에 견적도 완벽히 다르다.(웃음) 남편과의 경쟁을 통해 광고를 따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반대로 지면 너무 속상하다. 남편과 같이 평가받고 경쟁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도 많았고 발전도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누구의 아내란 소리를 듣지 않게 됐다. 남편의 후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모델은 누군가.

피앤지 샴푸 광고를 함께 찍은 양조위다. 당시 그는 오우삼 감독의 ‘적벽’을 촬영하고 있었다. 영화 스케줄이 늦어져 가까스로 광고촬영 현장에 도착한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의 프로다운 모습과 매너 있는 태도는 최고였다. 세계적인 배우는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물론 ‘앉아만 있어도, 숨만 쉬어도 그림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주얼적으로도 훌륭했다.(웃음)

CF 감독을 꿈꾸는 여성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스스로 여자라는 것을 잊어야 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특혜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생활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 결혼해서 시댁 챙기고 아이 챙기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게 낫다. 한국에서 여성 CF 감독이 나오기 힘든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운아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아이의 학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다. 이제는 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최근 손 감독은 남편과 함께 메이크업 브랜드를 론칭했다. 톱 여배우들이 드나드는 촬영장에서 습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탄생한 ‘슈퍼페이스’에는 그의 실용주의 철학과 유쾌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전문가의 복잡하고 어려운 메이크업을 단순화시키고 조명과 렌즈의 시각 효과에서 착안한 입체적 얼굴 윤곽을 만드는 옵티컬 착시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

직접 화장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촬영 때마다 느끼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트렁크에서 수많은 화장품과 브러시를 꺼내느라 분주하다. 분장실 탁자에 일렬종대로 제품을 늘어놓은 후에 화장이 시작되는데 보통 서너 시간은 기본이다. 어느 날 문득 ‘복잡하고 까다로운 화장품보다 꼭 필요한 색깔과 기능에 포커스를 맞춘 제품을 만들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슈퍼페이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브랜드 이름이 독특하다. 무슨 의미인가.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유명 배우라도 그들에겐 올챙이 적 시절이 있다. 신데렐라처럼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게 아니다. 차디찬 스튜디오 공기와 카메라 앞에서 서툴고 주눅 든 아마추어에게 내재된 ‘슈퍼페이스’를 찾아내는 게 내 일이다. ‘슈퍼페이스’를 통해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되찾기 바란다.

유쾌하고 용감한 CF 감독으로 남고 싶다


▎톱 여배우들을 촬영하면서 습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탄생한 ‘슈퍼페이스’에는 손정 감독의 실용주의 철학과 유쾌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제품을 만들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메이크업 과정이 힘들고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면 결코 예뻐질 수 없다. 그래서 과정을 단순화시킨 올인원 기능은 물론 제품의 촉감, 뚜껑을 여닫을 때 나는 소리 등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여자들은 소소한 부분에 감동한다. 뚜껑에 살짝 감춘 ‘You are Super’ 메시지나 쓰는 순간 셀러브리티로 변신하는 종이 선글라스처럼 유쾌한 경험까지 전하고 싶다.

다른 브랜드와 차이점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패션 디자이너, 사진작가가 만든 메이크업 브랜드는 많지만 CF 감독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태생부터가 다른 제품이다.(웃음)

패키지 디자인이 참신하다.

필름, 카메라, 조명, 스튜디오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 얼마전 생산이 중단된 코닥 필름의 형태와 노란색을 디자인에 응용해 아쉬움을 달랬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유쾌하고 모험심 많고 용감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같이 있어서 즐겁고 함께 작업해서 좋았던 유쾌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 인터뷰는 너무 진지했던 거 같다. 무척 힘들었다.(웃음)

- 글 오승일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

201504호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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