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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스리랑카 

무념무상의 세월을 낚는다 

스리랑카=글·사진 서영진 여행칼럼니스트
암벽 왕궁 시기리아에 걸터앉은 청춘들은 미동이 없다. 아항가마 해변의 어부는 장대에 올라 무념무상의 세월을 낚는다. ‘멈춰 있다’는 것은 감동의 순간과 닿아 있다. 베일에 싸인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는 수줍음 속에서 빛을 발한다.

▎스리랑카에서는 낯선 풍경과의 우연한 조우가 일상처럼 다가선다. 남부 해안의 전통 어로 방식인 스틸트 피싱.
스리랑카(Srilanka)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신성한 섬나라’다. 고요할 듯한 섬나라의 해변에는 사계절 서퍼들이 찾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만 여덟 곳이나 된다. 갈레(Galle), 시기리아(Sigirya), 폴론나루아(Polonnaruwa), 캔디(Kandy) 등 스리랑카의 남부 해안에서 중부 유적으로 이어지는 마을들은 가는 곳마다 세계문화유산 마크가 숨겨져 있다. 탐험가 마르코폴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스리랑카를 꼽았다. 몰디브로 향하는 경유지 쯤으로 치부하기에는 스리랑카의 속살이 너무 곱다.

섬나라의 아침을 달린다는 것은 제법 흥미롭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유독 흰옷을 사랑한다. ‘사리’로 불리는 여인들의 복장도, 학교에 가기 위해 분주히 걷는 학생들도 죄다 흰옷이다. 스리랑카 남서부 해안의 덜컹거리는 2차선 도로는 인도양의 흰 포말과 나란히 달린다. 이곳 바다는 파도가 성을 낼 때 오히려 매력적이다.

바닷가 성채도시 갈레로 향하는 해변은 낮은 담장의 집들이 이어진다. 14세기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항이었던 갈레는 서구 열강의 지배 기간 동안 요새 역할까지 겸했던 곳이다. 콜롬보에 교역항의 타이틀을 내준 뒤로는 오롯한 관광지로 변신했다.

검푸른 파도와 검은 근육의 장정들


▎1. 암벽요새인 시기리아 정상에 오른 여행자들은 왕궁터에 앉아 침묵으로 평원을 조망한다. / 2. 시기리아의 ‘사자의 목구멍’으로 오르는 계단. 커다란 앞발이 위압적이다.
성채 내부에는 네덜란드 식민시절 지었던 유럽풍 가옥들이 옹기종기 남았다. 신구도시를 잇는 갈레 게이트의 좁은 골목 사이로는 세바퀴 달린 모터사이클인 오토 릭샤가 오간다. 해질 무렵에 현지 주민들과 뒤섞여 등대, 깃발바위, 시계탑 등으로 이어지는 성채 위를 걷는 것은 가슴 트이는 동질감을 일으킨다. 스리랑카에서 맨 처음 지어졌다는 등대 아래는 꼬마들이 크리켓을 즐기는 정겨운 풍경이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갈레의 구시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벤토타 등 제법 큰 휴양지를 지나쳐 남쪽으로 향할수록 어촌 향취는 더욱 강렬하다. 파도가 가로막은 듯 버스는 한 고즈넉한 마을에서 불현듯 멈춘다. 아항가마(Ahangama) 해변에서 맞이한 장면은 아득하다. 포구 옆에는 고깃배 대신 기다란 장대 10여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덤벼드는 검푸른 파도보다 검은 근육의 장정들은 장대 위에 룽기(스리랑카 남자들의 치마 같은 하의)를 입고 허수아비처럼 매달려 있다.

스틸트 피싱(Stilt Fishing)으로 알려진 스리랑카 남부의 독특한 낚시는 거친 이곳 바다가 길러낸 삶의 방식이다. 파도가 험한 날에 배를 띄울 수 없었던 어부들은 장대에 올라 낚시를 했다. 대부분 장딴지 근육들이 예사롭지 않다. 어망에는 두서너 마리의 생선이 쓸쓸하게 담겨 있다. 외다리 낚시는 최근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보여주기 이벤트로 변했지만 노을에 비낀 이색 낚시질은 스리랑카의 풍광을 대변하는 단골 장면으로 등장한다.

해변을 벗어나 스리랑카 중부로 발길을 옮기면 불교문화의 면면이 화려하다.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폴론나루아, 캔디 등 옛 수도들의 교차로에는 바위산인 시기리아가 우뚝 솟아 있다. 시기리아는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여겨지는 스리랑카의 상징과 같은 유적이다. 승려들의 수행지였던 바위산 정상에는 수영장, 연회장까지 갖춘 왕궁이 모양새를 갖췄다. 5세기 때 일이었고, 짧은 흥망의 과정을 겪었던 암벽왕궁은 19세기 후반 영국군 장교에게 발견되면서 14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산 위의 왕궁 ‘시기리아’


▎1. 성채도시 갈레의 구시가는 네덜란드풍 골목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진다. / 2.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캔디 지역의 전통 군무.
시리기아로 오르는 길은 녹록지만은 않다. 방어와 삶터 확보를 위해 조성했던 공간들은 물의 정원, 바위 정원, 테라스 정원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돼 있다. 삭막할 것만 같던 육중한 바위산 동굴에는 가슴을 드러낸 여인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새겨졌다. 정상 왕궁터에 걸터앉으면 시기리아, 담불라의 평원과 산자락이 아득하게 내달린다.

버스로 한 시간 남짓, 옛 수도 폴론나루아는 도시 전역이 세계문화유산이다. 왕궁터 옆 사원들은 싱할라 왕조 시절 불교가 꽃 피웠던 11~13세기의 단아한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싱할라 양식을 대표하는 바타다게 사원은 원형 불탑이 도드라진다. 갈비하라 삼존불은 천연 화강암에 조각된 와불, 좌불 등의 섬세한 기교가 따사롭고 숙연하다.

폴론나루아를 벗어나 캔디로 가는 길은 왕조의 마지막 수도와 알현하는 길이다. 해발 500m에 들어선 캔디는 스리랑카의 정신적 수도로 추앙받는 땅이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식민시대를 거치면서도 고유의 문화를 간직했던 캔디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자긍심은 높다. 호수와 어우러진 도시는 유럽풍 분위기가 완연하고,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신 불치사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캔디는 실론티와 향신료의 최대 산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고원지대의 선선한 날씨는 돈 있는 자와 차밭을 끌어들였고 또 다른 부를 잉태했다. 현지에서 맛보는 실론티는 깊고 은은한 향에 쓴맛이 없다. 꼭 편견을 덜어낸 스리랑카의 단면을 닮았다.

- 스리랑카=글·사진 서영진 여행칼럼니스트

[박스기사] 여행메모


▎호퍼
가는 길 - 대한한공이 인천~콜롬보 직항노선을 운항 중이다. 콜롬보를 경유한 항공기는 몰디브까지 운항된다. 스리랑카 입국에는 비자가 필요하다.

음식 - 스리랑카의 거리에서 흔하게 접하는 전통음식은 ‘호퍼’다. 밀가루에 코코넛 밀크를 섞어 반죽해 얇게 구워낸 뒤 달걀 한 개를 가운데 떨어뜨려 먹는다. 밀가루빵 로띠를 면처럼 잘라내 카레 등과 섞어 먹는 ‘꼬뚜’ 역시 부담 없이 맛볼 수 있는 스리랑카 음식이다.

유념할 정보 -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귀속됐다가 1948년 독립했다. 싱할리어, 타밀어, 영어 등 3개 언어가 공용어다. 종교는 불교 외에도 힌두교, 이슬람교를 두루 믿는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 30분 느리다. 연평균 기온은 27℃이며, 5월부터 9월까지 우기다.

201601호 (20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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