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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 대우증권 인수로 ‘금융의 삼성’ 등극 

 

박성우 기자
오랜 기간 국내 1위 증권사의 위치를 지켜온 대우증권을 미래에셋이 인수했다. 한국 증권업계의 최강자가 된 미래에셋과 박현주 회장의 동향은 올해 한국 금융계의 이슈가 되고 있다.

▎7년만에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낸 박현주 회장. 그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직후 “젊은 시절 대우증권은 제 우상이었다”며 “이건 축복입니다”고 말했다. / 중앙포토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해외출장 중이다. 1월 중순에 떠났는데 3월 쯤 돌아올 예정이다. 두 달이나 해외에 있는 건 미국·영국·중국·브라질·호주 등 12개국의 해외 법인과 글로벌 시장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미래에셋 측은 “매년 12월에 장기 출장을 떠나는데 이번엔 대우증권 인수 문제로 출발이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이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의 합병 법인을 글로벌 투자은행(IB)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만큼 선진 사례 벤치마킹과 IB 역량 강화를 위한 인력운용 구상을 할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의 새해 시작과 목표는 모두 해외에 있다.

오랜 기간 국내 1위 증권사의 위치를 지켜온 대우증권을 미래에셋이 인수하게 된 건 돌이켜봐도 엄청난 사건이다. 박 회장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직후 <한국 경제> 인터뷰에서 이런 소회를 밝혔다. “젊은 시절 대우증권은 제 우상이었습니다. 당시 증권사 하면 대우증권과 대우증권이 아닌 곳으로 구분됐을 정도니까요. 제가 첫 직장을 선택할 때도 대우증권을 갈까, 작은 증권사를 갈까를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대우증권에 갔다간 내 능력을 발휘하기보다 ‘부속품’만 될 가능성이 클 것 같아서 대우증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우증권은 그만큼 업계에서 월등한 존재였습니다.” 지난해 12월 28일 기자간담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에셋을 창업하고 좋은 회사로 만들겠다는 꿈은 있었지만, 대우증권을 인수하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이건 축복입니다.”

대우증권 인수로 증권사 자기자본을 8조원 가까이까지 키운 박 회장의 포부는 엄청나다. ‘금융의 삼성’ ‘(일본) 노무라에 필적하는 아시아 최고의 투자은행’ 등 수사가 현란하다. “한국 금융에선 왜 삼성 같은 세계적 기업이 안 나오느냐고들 합니다. 그런데 삼성 같은 금융회사를 만들려면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는 만들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상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삼성, 현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불가능한 상상이 만들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도전해야 합니다. 선대들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노무라에 필적할 아시아 최고의 투자은행

“JP모건이 오늘날의 수준으로 성장하기까지 200번의 M&A(인수합병)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래에셋은 이제 겨우 20번 정도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아직 사인을 하지 않아서 밝힐 순 없지만 (미래에셋이 인수하려는) 큰 건이 한두 군데 있습니다.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회사들입니다. 국내 증권사는 아닙니다. 그런데 보세요. 앞으로 증권사 매물이 많이 나올 겁니다.”

박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다. 글로벌 투자그룹으로서 조직·운영·프로세스를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고, 글로벌 IB센터를 만들어 벤처 모험자본 투자를 확대하며, 미래에셋 본사가 있는 서울 을지로 센터원 건물 35층에 1000평 규모 글로벌 트레이딩룸을 만들어 우수한 젊은이들이 글로벌시장에 도전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헤지펀드 우위를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고 중위험·중수익 상품 경쟁력 확보에 나서겠다고 했다. 여기에는 대우증권과 함께 인수하는 산은자산운용이 활용될 계획이다.

한국경제가 살 길은 투자 밖에 없다는 박 회장은 국내 금융투자회사로는 이례적으로 부동산·관광업과 해외 기업 사냥에도 적극적이다. 골프용품 세계 1위인 타이틀리스트의 모회사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최고급 호텔 페어몬트, 호주 시드니의 포시즌스 호텔 등을 사들였다. 서울 광화문의 포시즌스 호텔도 미래에셋 소유다. 최근엔 미래에셋 계열 사모펀드(PEF)를 통해 깨지지 않는 접시로 유명한 코렐, 100년 전통의 내열유리 계량컵 브랜드 파이렉스 등을 보유한 주방용품 기업 월드키친 인수를 추진 중이다. 미국 식기브랜드 1위라는 인지도를 앞세워 향후 중국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구상이다.

박 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페어몬트 호텔 인수에 대해 “호텔업계의 피카소 같은 작품을 샀다”며 “지속적으로 해외 M&A를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자본을 준비해 놓고 있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관광시장은 커질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중국인 여권 소지자가 전체 인구의 4%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중 여러 번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을 포함하면 외국에 들락거리는 인구만 1억명입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이나 한국의 여권소지자 비율이 40%정도라고 합니다. 중국이 영원히 4%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기업뿐 아니라 개인들도 투자 외에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이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옛날 방식처럼 제조업 기반으로 산업발전을 급속도로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바이오, 전기자동차, 사물인터넷, 여행레저 같은 미래형 산업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투자는 필수적입니다. 투자 안 되는 기업, 투자가 없는 사회는 답이 없습니다. 개인은 글로벌 분산투자를, 기업은 혁신적 아이디어와 인프라에 투자를 해야만 합니다.”

7년 만에 언론에 등장한 박현주 회장


▎미래에셋은 대우증권 인수로 증권사 자기자본을 8조원 가까이까지 키우게 됐다. 사진은 12월 25일 대우증권 인수전 승자가 된 미래에셋그룹의 서울 중구 본사 모습. / 뉴시스
대우증권 인수로 박 회장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인사이트 펀드의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2007년 10월 출시된 인사이트 펀드는 일종의 헤지펀드였다. 해외 증시에 혜안을 가진 박 회장이 투자 대상을 찍어주는 펀드로 알려지면서 돈이 몰렸다. 출시 두 달 만에 4조7000억원이 쌓였다. 하지만 이듬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로 번지면서 열풍은 원성으로 바뀌었다. 1년 후 수익률이 반 토막(-51.33%) 났기 때문이다. 회복이 지연되면서 투자자들은 미래에셋에 등을 돌렸다. 2008년 70조원에 달했던 운용자산도 3년 만에 40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박 회장은 2011년 말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했다. 채권 투자는 물론 해외기업·부동산 같은 대체 투자에 적극 뛰어들었다. 과거 전체 운용자산의 70%에 달했던 주식형 비중은 현재 20%대로 줄었고, 채권·대체 투자 등에 골고루 분산돼 있다. 인사이트 펀드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인지 박 회장은 지난해 12월 28일 기자간담회를 하기까지 7년여간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인사이트 펀드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투자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고집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실패라기보다는 ‘아, 내가 고객을 불편하게 했구나’하고 느낍니다. 당시엔 그저 ‘비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빨리 회복할 줄 알았던 겁니다. 저는 자본시장의 회복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구나’라는 생각보다는 ‘빨리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보다 회복이 늦었습니다. 시장에서 투자를 하다보면 그런 일이 항상 생깁니다. 결국 올라오긴 했지만 오래 걸렸습니다. 우리가 그때 몰랐던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터질 지 몰랐습니다. 전혀 예상을 못 했습니다. 둘째는 펀드 운용을 잘못 했습니다. 그때 중국 온라인 여행사 씨트립을 시가총액 2조~3조원에 샀는데 지금 30조~40조가 됐습니다. 제가 중국 검색업체 바이두를 강력하게 사라고 했는데 6조~8조원에 샀습니다. 그게 지금 160조짜리가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미래에셋 포트폴리오에 없는 겁니다. 시장이 떨어질 때 다 팔아버려서. 바이두를 다시 사려고 봤을 땐 이미 20조~30조원이 됐으니 못 산거죠. 운용을 잘 못한 것이지 펀드의 개념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대우증권 노조와의 기싸움이 1차 고비

박 회장의 투자 원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수의 입장에서 투자하라’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대세가 결코 승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모두가 더 오른다고 할 때 주식을 팔고, 모두 내다 팔 때 사들였다. 그는 이미 한신증권에서 상품을 운용할 때부터 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전체 증권사에서 수익률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증권맨이 하루에도 몇 번씩 주식을 샀다 팔았다 하는 초단기 매매에 몰두했다. 그는 철저한 종목 분석으로 가치주에 투자했다. 박 회장은 2007년에 낸 자서전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에서 “좋은 사업 파트너를 구하는 심정으로 장기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우증권 합병 작업도 박 회장이 당장 넘어야 할 산이다. 고용 보장을 내세운 KB금융지주의 인수를 조건부 지지했던 대우증권 노조는 미래에셋 측과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1월 4~6일 실시된 총파업 찬반투표에서 98%가 찬성표를 던졌다. 투자성과를 보고 고객이탈이 바로 가능한 증권업계에서 대거 파업에 동참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대우증권 직원들은 ‘구조조정은 없다’는 박 회장의 발언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는 고용 보장을 단체협약에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우증권 경영진은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에셋증권이 은행권 대출 등 사실상 LBO(차입매수) 방식으로 인수자금을 마련할 경우 대출금 상환부담이 결국 대우증권 소액주주와 채권단, 직원에게 돌아올 거란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박 회장은 “직원들이 불안해 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점포 수를 250개는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일본 노무라증권의 직원수가 2만6000명, 자기자본 28조원이예요. 다이와증권은 자기자본 13조원에 직원수가 1만4000명이고요. 한국의 증권사업이 너무 뒤처져있는 겁니다. 미래에셋과 대우증권이 합쳐지면 인원수가 4800명에 불과해요. 우리는 안정된 자기자본으로 과거 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구조조정에 대한 염려가 많았으면 M&A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한국 증권사들이 합병하면 구조조정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그 부분은 벤치마킹 안하려고 해요. 붙어있는 점포 재배치는 하겠지만 점포는 조금 더 확장해도 통합 법인에 자기자본을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박 회장의 고향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이다. 자수성가한 농부 집안의 2남2녀 중 셋째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가 광주일고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부친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그 충격으로 고등학교 시절 방황했다. 그때 모친이 “대학 가기 힘들면 고향에서 농사짓자”며 눈물짓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재수 끝에 1978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박 회장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1년 학비와 생활비를 한 번에 부쳐줬는데 그걸로 투자에 나섰다. 그때 명동 증권가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대학원생이던 1984년엔 사설 투자자문사인 내외 증권연구소를 설립했다. 26세 때의 일이다. 관련법 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박 회장의 결혼 스토리도 유명하다. 연세대 출신인 부인 김미경 씨와 연애결혼했는데, 김씨가 부모에게 박 회장을 소개하러 갔을 때 장인·장모가 증권회사에 다닌다는 말에 실망했다고 한다. 당시 최고의 직장은 은행이었고 증권사는 사채 장사나 하는 아류로 여겨졌다. 박 회장의 달변으로 겨우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한편 박 회장의 12살 위 큰형 태성씨는 뇌성마비 분야의 권위자로 미국 워싱턴대 의대 교수다. 누나 현민씨는 공무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자 박 회장이 현민씨와 조카 두 명에게 미래에셋캐피탈 지분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동생 정선씨는 명지전문대 유아교육과 교수, 매부인 오규택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박 회장의 광주일고 동기동창이다. 박 회장의 1남2녀는 각각 미국 코넬대·듀크대·워싱턴대(세인트루인스)에서 유학했다.

“변화에 대한 대응? 파괴적 혁신이 답”

박 회장은 동양증권을 거쳐 1988년 한신증권(이후 동원증권)에 입사했다. 광주일고 선배이자 박 회장의 형 태성 씨의 고교 동기동창인 김정태 전무(전 국민은행장)가 일하던 곳이었다. 뛰어난 영업실적으로 1991년 박 회장은 33세의 나이에 동원증권 중앙지점장이 됐다. 국내 증권사 최연소 지점장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라는 지점훈(支店訓)을 내걸었다. 이곳은 박 회장이 지점장이 된 후 주식약정 1000억원을 넘어서며 전국 1위에 올랐다.

이 같은 원칙은 1997년 최현만 동원증권 서초지점장(현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창업할 때 빛을 발했다. 그해 7월 자본금 100억원 규모의 미래에셋캐피탈을, 8월에는 10억 규모의 미래에셋 투자자문을 설립했다. 동원증권에서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박 회장의 연봉은 1억5000만원을 웃돌았다. 매년 받는 인센티브도 3~5억원 수준이었다. 그렇게 번 돈에 자기 몫의 고향 땅 일부를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대주주 자본금을 마련했다. 평소 인연을 맺어 온 투자자들과 임직원이 나머지 금액을 채웠다.

외환위기때 미래에셋은 펄펄 날았다. 최현만 부회장은 “박 회장은 국내 경제가 반드시 살아날 것으로 보고 한국 제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관(현 삼성 SDI)을 사라고 주문했다”며 “그때 투자했던 주식은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도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에선 이 펀드(폐쇄형)가 일정 기간 돈을 찾을 수 없는 데다 외환위기 여파로 고객 반응이 신통치 않을 것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박 회장은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고객에게 믿음을 팔 수 있는 기회로 봤다. 1998년 12월 삼성증권 창구를 통해 판매된 펀드는 2시간30분 만에 500억원 한도가 모두 팔려 나갔다. 운도 따랐다. 3개월 후 현대증권의 ‘바이코리아 펀드’가 공격적으로 돈을 끌어모으면서 박 회장이 사들인 종목도 주가가 크게 올랐다. 이 펀드는 1년 만에 108%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정치권 영입 제안을 거절한 것도 ‘아는 길만 가는’ 그의 스타일에 따른 것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DJ) 대통령이 박 회장에게 여러 차례 출마를 권유했다. 박 회장의 한 측근은 “동교동계 실세들로부터 전국구든 수도권이든 원하는 자리를 준다는 언질도 받았다”고 전했다. 끈질긴 구애에도 박 회장은 단호했다. 그는 “나는 금융인이고 기업인이라 정치는 모른다”며 이를 거부했다.

박현주 회장은 올해를 한국 자본시장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해로 규정했다. 대우증권 인수로 미래에셋그룹 전체의 고객자산은 320조원, 자기자본은 10조원을 넘어서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말했다. “우리사회는 타성에 젖어 야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안락함에 안주하며 미래를 위해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변화 속도는 광속인데 우리사회의 변화는 멈추어 있습니다. 인식은 있지만 행동이 없습니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리드해야 됩니다. 변화에 대한 대응은 파괴적 혁신입니다.”

- 박성우 기자

201602호 (201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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