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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3)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시계의 성지 

제네바(스위스)=오승일 기자
183년 전통의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에는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의 역사를 선도하고 있는 시계 명가의 열정이 오롯이 살아 숨쉬고 있다.

▎르 상티에에 위치한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 전경. 스위스 시계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에서는 최고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시계를 생산한다.
제네바를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눈부신 설원을 따라 주라(Jura) 산맥의 험난한 산길을 달리다 보면 발레드 주(Vallee de Joux) 계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즈넉한 마을에 들어서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시계 제조사들의 간판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우수한 시계 장인들이 명성을 떨치던 지역이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시계 장인들에게 평화로운 주라 산맥이 천혜의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중 발레드 주를 대표하는 시계 공방이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다. 1833년, 당시 서른 살의 스위스 청년 앙트완 르쿨트르(Antoine LeCoultre)는 자신의 고향인 발레드 주, 르 상티에(Le Sentier)에서 작은 시계 공방을 열었다. 이렇게 시작된 예거 르쿨트르는 세계적인 명품시계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고급시계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183년 전 공방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점차 규모를 확장해 정밀 부품뿐만 아니라 고급시계를 만드는 매뉴팩처 형태로 발전했다.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는 경영을 담당하는 부서들과 시계를 제조하는 워크숍들이 여러 개의 건물에 나뉘어져 있다. 이곳에는 140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그중 250여 명이 전문 워치메이커이고, 130명이 디자이너·예술가·공학자들이다.

무브먼트 제조 및 판매로 시작한 워치메이커답게 예거 르쿨트르는 무브먼트 제작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브먼트와 관련된 각종 기록이 이를 증명해 준다.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의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마그다(magda) 가이드는 “1833년부터 지금까지 413개의 시계 제조 관련 특허권을 등록했고, 1249종의 무브먼트를 개발했다”면서 “전 세계 어떤 브랜드도 보유하지 못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무브먼트로는 온도의 차로 동력이 발생되는 ‘애트모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브먼트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101 무브먼트’, 세계 최초로 선보인 ‘3차원 투르비옹’ 등이 있다. 약 2세기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예거 르쿨트르를 ‘그랑 메종(La Grande Maison, 위대한 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그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처음 방문한 곳은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크숍. 고도의 테크닉을 보유한 마스터 장인들이 모여 있는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크숍은 일반 워크숍과 달리 한 명의 장인이 시계의 모든 제조 과정을 담당한다. 애프터서비스도 그 시계를 만든 장인만이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각자가 특화된 기술을 지니고 있다.

최근 리뉴얼을 마친 이곳에서는 예거 르쿨트르의 탁월한 기술력을 증명하는 기념비적인 시계들이 탄생했는데 듀오미터 라인을 비롯해 퀀템 퍼페추얼 미닛 리피터 투르비옹, 그랑 소네리, 리베르소 자이로투르비옹 등이 그 주인공이다.

예거 르쿨트르에서만 44년을 몸담아온 이곳의 총괄책임자 크리스찬 로랑(Christian Laurent)은 “보통 일반 시계 조립에 2시간 정도가 걸리는 데 비해 컴플리케이션 워치는 이틀이 소요된다”며 “가장 복잡한 그랑 컴플리케이션 워치는 무려 2달 반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고 말했다. 또 “무브먼트의 아름다운 디테일을 위해 100명 이상의 장인들이 공을 들인다”고 덧붙였다.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크숍을 나와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몇 군데 지나자 아틀리에 메티에 라르(Metiers Rares)가 모습을 드러냈다. 젬셋팅, 에나멜링, 기요셰, 인그레이빙 등 시계에 예술적인 영감을 불어넣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별도의 건물에 분리돼 있던 것을 몇 달 전 매뉴팩처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한 지붕 아래로 불러들였다. 시계 장인들과 공예 장인들이 아이디어를 함께 공유하면 더욱 더 크리에이티브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 만들어


▎예거 르쿨트르 헤리티지 갤러리의 칼리버 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제작된 주요 무브먼트를 만나볼 수 있다.
방문객들을 위해 이곳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는 공예 장인들의 실제 작업 모습을 특수 제작된 화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1~2㎜ 크기에 불과한 보석들을 세팅하는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또 100년이 넘은 기계를 이용해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이얼에 무늬를 새겨 넣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마그다 가이드는 “도제 방식으로 기술을 연마하는 공예 장인들의 평균 경력은 10년 이상”이라며 “아버지와 딸, 시아버지와 며느리 등 가족들이 대를 이어 근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아틀리에 메티에 라르와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애트모스 워크숍이다. 1921년 설립된 이곳에서는 스위스 시계 제조 기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애트모스 탁상시계가 매년 3000개 정도 만들어진다. 애트모스 워크숍에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생산된 수백 개의 제품들이 진열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애트모스가 작동하도록 동력을 제공하는 가스통부터 1000년에 한 번만 교체하면 되는 애트모스 와이어의 제작 과정도 방문자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예거 르쿨트르는 여타 브랜드들처럼 스위스 정부에서 인정해주는 제네바실, COSC(스위스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기관) 인증을 사용하는 대신 자체적인 테스트를 통해 품질을 보증하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에서 만들어진 모든 시계들은 1000시간 테스트룸으로 옮겨진다. 1000시간 테스트는 매우 엄격한 실험 프로그램으로 다른 어떤 시계 브랜드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테스트는 단순히 무브먼트만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얼과 시계바늘이 모두 갖춰진 상태로 진행된다. 제품의 정확성을 위해 방수기능을 5기압까지 테스트하고, 압력과 온도 변화 등 다양한 조건에서 실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실험들은 아주 미세한 결점조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열정과 노력의 산물이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 제네바(스위스)=오승일 기자

201603호 (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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