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6) 미하일 바쿠닌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 질서를 꿈꾼 무정부주의자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whanyung@joongang.co.kr]
미하일 바쿠닌(1814~1876)은 최고경영자(CEO)들에게도 한 수 가르쳐 줄 수 있는 역사적 사상가다. 오늘의 CEO는 바쿠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선진 경영법, 조직론, 기업문화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바쿠닌, 무정부주의 심볼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면 바쿠닌이 중시한 것은 ‘본능적’ 사회주의였다. 바쿠닌은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인간의 선함을 확신했으며, 민중의 순간적인 봉기는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예상했다.
무정부주의·무정부주의자는 우리 삶과 역사 속에서 가끔씩 희미하게 등장한다. 학교 다닐 때 줄 치며 읽던 교과서에 나왔다. 필자도 『재산이란 무엇인가』에서 ‘재산은 곧 도둑질’이라고 주장한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올해 개봉한 영화 ‘동주’에도 등장한다. 윤동주(1917~1945)의 절친 송몽규(1917~1945)는 무정부주의계열의 혁명가였다. ‘동주’ 속 송몽규는 “바쿠닌! 크로포트킨!”을 외치며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 터이니”라고 말한다. (송몽규에게 제국주의 타파는 조국 해방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무정부주의가 ‘동주’에 나오는 배경이 있다.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벌판을 누비던 우리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가 무정부주의자였다.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목록에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이 존경하는 이회영(1867~1932)·신채호(1880~1936)·김좌진(1889~1930)도 포함된다. 무정부주의는 민족주의·사회주의 못지 않게 독립 대한의 꿈을 뜨겁게 달구던 이념이었다.

하지만 무정부주의·무정부주의자는 흔히 혼란·폭탄테러·암살·피를 연상시킨다. 뭔가 부정적인 것 같다. 그래서 한자어 무정부주의·무정부주의자 대신에 영어를 우리말로 표기한 아나키즘·아나키스트(anarchism·anarchist)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19세기,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무정부주의는 폭력 혁명을 표방하는 아주 위험한 이념이었다. 만약 오늘날 대한민국에 ‘구식(舊式)’ 무정부주의 정당이 창당돼 국기(國基)를 흔든다면 당연히 그 정당은 해산돼야 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 지금은 21세기다. 무정부주의에 대한 차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어떤 강제도 인정하지 않는 자유나 양성평등 같은 많은 무정부주의 가치들이 지난 세기에 실현됐다. 사실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바는 일부 자유주의와 겹친다. 폭정뿐만 아니라 민주정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지만 바쿠닌은 자유민주주의자 못지 않게 자유를 사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광적으로 자유를 사랑한다. 자유는 지성, 존엄성과 인간의 행복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오로지 자유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민중 봉기와 자발적인 노동자들의 상향식 결사체를 통해서다.” 21세기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정부주의 프로젝트는 암암리에 계속되고 있다.

‘무정부주의의 아버지’ 바쿠닌


▎바쿠닌과 함께 프루동, 크로폿킨은 일체의 정치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려는 무정부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다.
무정부주의란 무엇인가. 우리 국어사전은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일체의 정치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려는 사상. 프루동, 바쿠닌, 크로폿킨 등이 대표적인 사상가이다”라고 나와 있다.

프루동·바쿠닌·크로폿킨 중에서도 바쿠닌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의 세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바쿠닌은 프루동과 더불어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다투는 사람이다. 사실 프루동은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라기 보다는 ‘무정부주의의 창시자’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다. 세계 이데올로기 지도에 무정부주의를 확고하게 올려 놓은 것은 바쿠닌이기 때문이다.

바쿠닌은 19세기에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더불어 유럽 혁명 운동의 양대 산맥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마르크스보다 바쿠닌이 더 대중적으로 유명했다. 마르크스의 두툼한 저작에 담긴 복잡한 사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동가인 바쿠닌은 팸플릿 집필자(pamphleteer)이자 강연자였다. 즉, 1~2시간 독서·강연을 통해 자신 주장의 핵심을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와 달리 바쿠닌에게는 변변한 완결된 주저(主著)가 없다. 그나마 완성본에 가까운 것은『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1873)와『신과 국가』(1882)이다. 그는 이론가라기보다는 실천가였다. 하지만 그의 짧은 글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바쿠닌의 전집은 2000년 출간됐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면 바쿠닌이 중시한 것은 ‘본능적’ 사회주의였다. 바쿠닌은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인간의 선함을 확신했으며, 민중의 순간적인 봉기는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예상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라이벌인 바쿠닌을 일면 ‘야비하게’ 견제했다. 500~1000여 명의 농노를 거느렸던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인 바쿠닌은 제정 러시아 당국이 혁명운동에 투입한 제5열이라고 주장했다. (바쿠닌에 대한 신뢰에 먹물을 칠하기 위해 그가 ‘러시아 밀정’이라는 설을 처음 유포한 것은 제정 러시아 당국이었다.) 마르크스는 결국 1864년 결성된 제1인터내셔널, 즉 국제 노동자협회에서 1872년 바쿠닌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둘 다 세상에서 퇴장할 때 모습은 의외로 쓸쓸했다. 1883년 마르크스의 장례식에는 11명, 1876년 바쿠닌 장례식에는 40명이 참석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성공함에 따라 바쿠닌과 무정부주의는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된다. 바쿠닌이 반유대 인종주의자라는 둥, 동성연애자라는 둥, 발기불능이라는 둥,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온갖 있는 말 없는 말로 바쿠닌을 공격했다. 바쿠닌의 후예들의 잘못도 있다. 바쿠닌은 폭력숭배자가 아니었다. 그는 폭력을 개인이 아니라 제도를 향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사후에 추종자들은 폭탄투척과 암살에 탐닉했다.

인간적인, 휴머니스트 바쿠닌


▎연설하는 바쿠닌. 그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며 세계는 소멸될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남을 것이다”고 말한 휴머니스트였다.
하지만 역사는 바쿠닌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첫째, 바쿠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집권하면 인류 역사상 최악의 혹독한 독재가 실시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수립된 국가·정부가 평등을 이룰 수 있더라도 그 대가는 자유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정치가·역사가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사회주의가 또 다른 노예제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묘한 의견의 일치다. 공산주의 정치 이론의 국가소멸론(國家消滅論)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투쟁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면 계급 지배의 도구인 국가는 자연히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모든 국가는 악이라고 본 바쿠닌은 혁명이 국가를 즉시 소멸 시켜야 한다고 봤다.

둘째, 바쿠닌의 예언대로 혁명의 중추세력은 마크르스가 무시한 농민·룸펜프롤레타리아트·무직자·범죄자였다. 러시아혁명·중국혁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승리이기 이전에 바쿠닌의 이론적 승리였다.

오늘날에도 바쿠닌 사상은 살아 있다. 중국 춘추시대 사상가 노자의 사상, 고대 이스라엘 사회, 고대 인도의 베다 시대에서도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무정부주의가 죽은 적은 없다.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 유명한 노엄 촘스크도 무정부주의자다. 간디(1869~1948)나 프랑스 철학자 자크 엘륄(1912~1994)에게서도 무정부주의 성향이 발견된다.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 바쿠닌과 무정부주의는 줄곧 기지개를 펴고 있다.

바쿠닌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한때 군인, 모스크바대 교수를 꿈꿨으나 바쿠닌은 결국 철학과 혁명의 길로 이끌렸다. 그는 19세기 ‘체 게바라’였다. 혁명의 기운이 감도는 곳에 그가 있었다. 5개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바쿠닌은 이곳 저곳 유럽을 떠돌아 다녔다. 투옥과 고문, 탈옥과 망명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인간 정신의 해방과 평등과 자유를 위해서였다.

바쿠닌은 과체중이었고 흡연과 음주도 심했다. 그는 고급 ‘빈대’였다. 뜻있는 사람들의 후원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먹는 것은 사람들이 차려 주는 대로 먹었다. 베토벤을 좋아했다. 왠지 불교적이기도한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며 세계는 소멸될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남을 것이다.” 또 바쿠닌은 인간적이었다. 휴머니스트였다. 인정할 것은 서슴지 않고 인정했다. 그는 기꺼이 그의 사상적 선배인 프루동과 그를 괴롭힌 마르크스의 업적을 인정했다.

오늘의 CEO는 바쿠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선진 경영법, 조직론, 기업문화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비판적 경영연구(critical management studies)’ 분야 연구자들이 바쿠닌, 무정부주의,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libertarian communism)’를 연구한다. 의외다. 세계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미국이 자본주의와 각을 세웠던 바쿠닌을 연구하는 이유는 뭘까. 바쿠닌의 사상에 경영의 대안에 도움이 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미국에서도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실용적 아이디어의 세계에서는,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자본주의를 따지지 않듯이, 자본주의 또한 자본주의·사회주의를 따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바쿠닌을 연구하는 미국 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병든’ 자본주의와는 별도로 ‘건강한’ ‘자신감 있는’ 자본주의도 있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바쿠닌은 무엇을 주장했는가. 그는 ‘파괴적인 창조’를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파괴 욕구는 창조의 욕구이기도 하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1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혁명을 요구한 것이다. 파괴하지 않고 바꿀 수 없다. 파괴·타파의 대상은 나쁜 권위, 권위주의다.

바쿠닌은 모든 강제(coercion)과 위계(hierarchy)에 반대했다. 특히 강제와 위계가 가장 극명하게 실천되는 공간이자 제도인 국가에 반대했다. 심지어는 “만약 신(神)이 진짜 존재한다면, 신을 폐기해야 한다”며 신(神)을 적대시했다.

‘창조적 파괴’, ‘섬김 리더십’과 연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사실 권위와 권위주의다. 조선시대·일제강점기와 독재시대 대한민국은 상명하복의 권위·권위주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모든 조직의 수장은 그 조직에서 사실상 ‘대통령’과 같은 존재였다. 군대에서 ‘고참은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때가 있었다. 심지어 상당수 사람들이 민주화 이전 시절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회사 안팎으로 권위주의적 ‘갑질’은 용인되지 않는다. 사내 권위주의에 집착한다면 이는 그 회사가 망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평등 리더십’, ‘섬김 리더십’이 대세다. ‘위아래가 없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뉴노멀(new normal)이다. 구식의 시각으로는 이상하게 보이는 ‘위아래 없는’ 기업·사회 환경에 하루빨리 적응해야 한다.

바쿠닌이 적대시한 자본주의는 독재나 제국주의와 밀착됐었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탈제국주의를 더 반긴다.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모든 이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유연성에서 나온다. 세계의 기조가 글로벌리즘에서 고립주의로 바뀌더라도 자본주의는 이내 적응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주의와도 친화적인 관계에 놓일 수 있다. 우리가 바쿠닌과 무정부주의를 검토할 필요성이 그래서 발생한다. 바쿠닌이 꿈꾼 것은 무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 질서였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자발적으로 공동체와 노동자들이 연방으로 조직화된 사회였다.

[박스기사] 바쿠닌의 말 중에서 음미할 만한 몇 가지

● 어떤 특정 형태의 정부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정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위해 분투함으로써 가능한 것을 성취해냈다.
● 그 어떤 이론이나 기성 체제나 책도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기득권이요 부정의다.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제요 야만이다.
●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려야 나 또한 자유롭다.
● 혁명은 광범위한 파괴를 요구한다. 오로지 비옥하고 혁신적인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탄생할 수 있다.
● 민중이 지팡이로 두들겨 맞을 때에는 그 지팡이를 ‘민중의 지팡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민중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박스기사]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주요 무정부주의 인물과 용어

미하일 바쿠닌(Bakunin, Mikhail Aleksandrovich)

제정 러시아의 혁명가·무정부주의자. 귀족 출신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잡혀서 시베리아에 유배 가던 중 탈출하여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무정부 운동을 지도하여 제1 인터내셔널에 참가하였으나 마르크스와 주도권을 두고 다투다가 제명되었다. 저서에 <신(神)과 국가> 따위가 있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roudhon, Pierre Joseph)

프랑스의 사회주의자(1809~1865). 사유 재산을 배격하고 정치적 권위를 부정한 무정부주의 사상의 창시자이다. 저서에 ≪재산이란 무엇인가≫, ≪빈곤의 철학≫ 따위가 있다.

크로폿킨(Kropotkin, Pyotr Alekseevich)

제정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1842~1921). 혁명 운동에 투신하여 무정부주의를 신봉하였으며, 평등한 이상 사회의 건설을 역설하였다. 저서에 ≪상호 부조론≫, ≪현대 과학과 무정부주의≫ 따위가 있다.

생디칼리슴(syndicalisme)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 지상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슴(anarchosyndicalisme)

노동조합을 통하여 무정부주의적 사회의 실현을 이룩하려는 사상이나 운동

사회주의(社會主義)

①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여 자본주의 제도의 사회적·경제적 모순을 극복한 사회 제도를 실현하려는 사상, 또는 그 운동.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 민주주의 따위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②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여 가는 과도기적 단계.

③ 마르크스주의에 대립되는 사회 민주주의적 사상, 또는 그 운동.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등이 있다.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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