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5) 알프레드 크루프 

기술혁신으로 부를 일군 ‘독일의 철강왕’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독일의 기업인 크루프는 철강 생산과 무기 제조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모은 돈의 상당수를 직원 복지를 위해 재투자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편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직원 복지의 기반이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독일 기업인 알프레드 크루프(1812~1887)는 기술 개발을 통한 혁신,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기업 활동, 기대를 뛰어넘는 복지제도라는 세 가지 업적으로 세계 부자들의 역사에서 커다란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크루프는 철강 생산과 무기 제조로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가 제조한 대포는 프로이센군의 유럽 대륙 최강의 군대로 군림하는 데 한몫했다. 크루프가 키운 크루프사(Krupp A.G.)는 그의 사후인 20세기 초 독일 철강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며 유럽 최대의 기업으로 군림했다.

크루프는 1861년부터 당시 전세계 어떤 기업도 생각하지 못한 사내 복지 제도를 만들었다. 크루프는 근로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고 근처를 공원과 학교, 그리고 놀이터와 휴양시설로 채웠다. 깔끔하고 효율적인 시설 때문에 크루프사 직원 거주지는 주변과 확연히 구별됐으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크루프사 본사가 위치한 에센에는 2만200명에 이르는 직원이 근무했다. 에센은 거대한 크루프 타운으로 변모했다. 국가 속의 국가와도 같았다. 크루프의 복지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직원이 병에 걸리면 치료비를 지원했다. 직원이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거나 사망해도 그 가족들이 이전과 똑같은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직원들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와 무료 목욕탕을 제공했다. 사고·생명·질병 보험도 회사에서 들어줬다. 기술과 업무 훈련 교육도 무료로 제공됐다. 이런 혜택을 받은 직원들은 크루프사와 크루프 가족을 국가와 호헨촐레른 왕가를 대하듯이 대했다. 복지 혜택을 주고 직원들의 충성심을 얻은 것이다.

크루프사의 근로자에 대한 이 같은 온정주의에서 영감을 얻는 비스마르크 총리는 국가 차원의 사회복지제도를 유럽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확장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혁명이 아닌 기업과 국가의 제도로서 근로자의 세상을 만들어 준 셈이다.

알프레드 크루프는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창업한 자그마한 주물소를 물려받았다. 산업혁명의 불을 당긴 영국에 이어 후발 산업국가로 등장한 독일에서 19세기 철강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철로 부를 일궜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독일 최대의 철강 업체로 키웠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산한 품질 좋은 철을 활용해 대포를 비롯한 무기를 개발해 제조하기 시작했다. 철에 만족하지 않고 품질 좋은 철을 활용해 고부가 상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크루프사는 당시 독일 최대의 철강업체이자 무기회사를 겸하게 됐다. 프로이센 주도로 1871년 통일을 이룬 독일은 융성하는 산업국가이자 막강한 군사국가로 변모했다. 산업국가 독일에 ‘산업의 밀’이라고 할 수 있는 강철을 공급하고, 군가국가 독일에 총포를 비롯한 철제 무기를 공급한 대표적인 기업이 크루프사다. 크루프의 사업 성공은 독일 제국의 부흥과 궤를 함께한 셈이다.

비스마르크에 영향을 준 사내 복지제도

알프레드 크루프는 1812년 독일의 산업도시 에센에서 태어났다. 독일 산업화의 현장인 루르 공업지대의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다. 그는 발명가인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았다. 프리드리히는 라인강변에 수차를 동력으로 쓰는 작업장을 설치할 정도로 뛰어난 발명 기술을 선보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혁신의 엔지니어, 열정의 기업인이었다. 당시는 철강이 지금의 정보기술(IT)인 인공지능(AI) 같은 혁신적인 첨단 벤처산업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철강업의 핵심기술인 주강 제조법을 시험했다. 당시 이 기술은 산업혁명 선발국가인 영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오랫동안 이 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182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실의 속에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14세였던 크루프가 학교를 그만두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염원이던 주철 제조법 연구도 함께 이어받았다. 그는 주물소를 운영하며 낮에는 직공들과 쇠를 만들고 밤에는 아버지가 하다만 기술개발을 위한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영국에까지 찾아가 제조비법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영국의 과학기술과 산업에 반해 자신의 독일식 이름인 알프리트(Alfried)를 영국식인 알프레드(Alfred)로 바꾸기까지 했다. 처음 몇 년간은 직공들 임금을 주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버텼다.

기회는 15년 뒤에야 찾아왔다. 1841년 알프레드는 동생 헤르만의 도움으로 드디어 주강 생산 기술을 확보했다. 주강으로 숟가락을 제조하는 기계까지 만들어 특허를 얻었다. 1847년 이를 바탕으로 주강을 활용한 대포를 처음으로 제조했다. 그는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박람회에 쇠를 녹여 한 번에 만든 무게 2000kg짜리 선강 주괴를 제조해 선보였다.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는 4만5000kg짜리 선강 주괴를 내놨다. 쇳물을 녹여 만든 이 거대한 선강 주괴는 유럽과 북미 전역의 엔지니어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불렀다. 이 두 차례의 전시회를 계기로 에센 출신의 크루프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국제적인 브랜드가 됐다.

발명가의 피를 이어받은 혁신의 엔지니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구식 황동 대포.
1851년 이 회사는 또 다른 혁신적인 발명에 성공한다. 바로 용접하지 않고 통째로 주물로 만든 기차 바퀴를 개발해 미국 시장에 판매한 것이다. 이 성공에 힘입어 회사는 경영 면에서 엄청난 성공을 얻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재정적인 안정을 확보한 알프레드는 공장을 확장하는 한편 발사 속도와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개선된 대포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하지만, 구습에 젖은 당시 상당수 프로이센 장교들은 이 대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주강 대포를 납품하지 못하게 된 알프레드는 이를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빌 헬름 4세에게 선물로 바쳤다.

왕은 이를 장식용으로 사용했지만 국왕의 동생인 빌헬름은 이 발명품의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뇌졸중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대신 섭정을 맡은 빌헬름은 크루프의 후장식 주강 대포를 312문 사들였다. 이를 계기로 크루프는 프로이센 왕국과 뒤를 이은 독일 제국의 핵심 방위산업 업체로 올라섰다.

그 다음 단계는 국제 시장 장악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크루프 대포의 품질에 반해 사들이고 싶어 했지만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어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크루프의 신형 주철 후장식 대포와 구식 황동 전장식 대포의 대결장이 됐다. 그 결과는 프랑스에 충격을 안겨줬다. 이 전쟁에서 보여준 크루프 대포의 성공은 국제적인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크루프사는 영국의 암스트롱사와 프랑스의 슈나이더-크뢰소사를 누르고 전세계에 우수한 독일제 대포를 팔았다. 러시아, 칠레, 멀리 사이암까지 크루프사의 고객이 됐다. 크루프사는 최초의 다국적 무기업체가 됐다. 크루프는 여기서 벌어들인 돈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광산, 네덜란드의 조선소 등을 사들이며 유럽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크루프는 독일 북서부 네덜란드 국경 근처의 메펜이라는 소읍 인근에 세계 최대 규모의 포 사격장을 갖춰놓고 이곳에서 전 세계에서 몰려 든 무기 구매자들 앞에서 1878년과 1879년에 걸쳐 시범 포격을 했다. 그는 46개 국가를 고객으로 유치했다. 크루프는 1887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7만50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유럽 최대의 철강·군수업체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평생에 걸쳐 2만4576문의 대포를 생산했다. 이 중 1만666문는 프로이센 또는 독일 제국에 납품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1만3910문은 외국에 수출했다. 크루프사는 글로벌화가 시작된 19세기 말 아무리 무기 업체라도 다국적 기업이리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글로벌 시대 부자의 재산은 글로벌 활동에서 온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박스기사] 혁신 소총만 믿고 방심한 프랑스군 크루프의 혁신적인 대포에 대패하다


▎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이 사용했던 크루프 C-64 주철 대포. / 2. 크루프사가 제작한 독일제국 해군의 함포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전 프로이센군의 전력은 프랑스군에 뒤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군이 보유했던 첨단 샤스포(Chassepot) 소총의 위력 때문이었다. 1868년 프랑스 총포 발명가인 앙투안 샤스포가 공병대와 함께 개발한 이 소총은 훈련에 따라 1분에 8~15발을 쏠 수 있는 첨단 소총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자국의 기술자 요한 니콜라우스 폰 드라이제가 1836년 발명한 드라이제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드라이제 소총은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후장식 소총이었다. 후장식은 탄환을 총신 뒤쪽에서 장전하는 방식이다. 드라이제 소총은 화약과 뇌관, 탄알이 하나로 결합된 현대식 탄환을 사용한 최초의 소총이기도 했다. 이전의 전장식 소총은 이른바 화승총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어왔던 조총이 바로 화승총이다. 화승총은 통산 1분에 1~2발 발사가 고작이었으며 고도로 숙련된 병사라도 3발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실탄 재장전은 꿇어앉은 상태에서만 가능했으며 엎드려서 몸을 숨긴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소총수들은 전쟁 때 꼼짝없이 적의 사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을 한꺼번에 건너뛰는 후장식 소총인 드라이제의 도입으로 프로이센군은 막강한 전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1868년 개발한 신형 샤스포 소총으로 이러한 프로이센군을 압도했다. 샤스포는 보다 가볍고 기계적으로 정밀해 1분에 8~15 발을 쏠 수 있었다. 유효 사거리도 915m에 이르렀다. 드라이제 소총이 365~550m인 것과 비교하면 거의 배에 이르렀다. 게다가 탄환이 가벼워서 병사 한 명이 100발 이상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드라이제 소총탄은 70발 정도 지참하는 게 고작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전술적인 우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살인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군은 안심하고 독일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방심한 프랑스군의 머리 위로 프로이센군의 무지막지만 크루프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떨어졌다. 혁신에 취하면 새로운 혁신을 하기 힘들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다. 이는 군은 물론 기업에도 적용된다.

[박스기사] 혁신기술의 기업이 독일 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포로가 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왼쪽)와 그를 맞이한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오른쪽).
크루프의 전성시대는 1870~71년 벌어졌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였다. 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프로이센군은 1870년 9월 1일 프랑스 동부에서 벌어진 스당 전투에서 12만 병력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결정적인 전투였다. 프랑스군은 3000명이 전사하고 10만3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까지 항복해 포로로 잡히는 수치를 당했다.

당당한 군복 정장에 군용 장화와 철모 차림의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의자에 앉아있는 프랑스 황제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림이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빌헬름 캄프하우젠이라는 독일 화가가 1878년 그린 이 작품은 비스마르크의 느긋한 표정과 나폴레옹 3세의 초조한 표정이 대조적이다. 계속 진군한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한 뒤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통일과 ‘독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가 제국 총리에 각각 올랐다. 프랑스는 이 전투의 패배로 9월 4일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나폴레옹 2세의 제2제정이 무너졌다. 전쟁은 프랑스엔 치욕으로, 프로이센에는 영광으로 기록됐다.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크루프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프로이센군의 승리는 곧 자신이 개발해 생산한 철로 제조해 공급한 주강 대포의 승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프랑스군은 황동으로 만든 전장식(화약과 포탄을 포신 앞 부분에서 장전하는 방식) 대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시대와 별 차이가 없는 구식 대포였다.

첨단 기술이 탄생시킨 ‘크루프 대포’

크루프가 만든 대포는 신형이었다. 재료부터 강력한 주강이었다. 포탄을 포신의 뒷부분에서 장전하는 후장식이었다. 발사용 화약이 포탄 내부에 들어있는 일체형 포탄을 사용했다. 고품질의 단단한 주철 포신이 어마어마한 압력을 이겨낼 수 있었기에 강력한 화력의 포탄의 사용이 가능했다. 게다가 포열 안쪽에 정밀한 강선(발사된 포탄이 회전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포신 안에 파는 나선형 홈)도 장착할 수 있었다. 대포 포열 안쪽의 강선은 포탄에 회전 관성을 준다. 이는 포탄에 안정된 탄도를 갖게 한다. 따라서 정밀한 강선은 포 사격의 정확도를 높여준다. 크루프 대포는 프랑스군의 대포에 비해 포격 속도는 2배, 정확성은 3배에 이르렀다. 강선 설치에는 과학기술, 그리고 산업 능력이 필요하다. 우선 튼튼하고 품질 좋은 철을 충분히 생산해야 하고 길고 가느다란 구명에 균일한 크기로 얇고 가는 홈을 파는 숙련공도 필요하다. 이를 크루프가 제공한 것이다.

프로이센 군은 크루프 대포를 활용해 적을 압도적으로 누를 수 있는 선진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그전까지 포병은 대형 고정 포대에 대포를 설치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포병은 대개 최고 지휘관들과 함께 맨 후방에 집중 배치됐다. ‘혁신의 군대’ 프로이센군은 이 고정관념을 깼다. 말이 끄는 이동식 포대에 대포를 설치해 기동성을 높였다. 포병을 작은 규모의 여러 부대로 나눠 분산 포격을 가했다. 포병 위치도 최전방으로 바꿨다. 이렇게 기동성, 유연성, 즉시성을 갖춘 프로이센 포병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독일 통일이라는 대사건은 크루프 신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크루프가 막대한 재산을 모으는 계기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사건이 역사에 남을 만한 부자를 만든다. 기회는 이를 포착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교훈을 크루프는 남겼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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