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모는 욕심을 비운 신선과 같았다. 평양에서 만난
필자에게 ‘건달이, 거저먹는 그림을 그린다’며 한껏 낮췄다.
정창모(1931~2010)는 전주 출신으로 오원 장승업을 계승한 몰골화(沒骨畵)의 거장이다. 평양 출신으로 진채진경산수화의 거장인 선우영(1946~2009)과 쌍벽을 이루며 일세를 풍미했다. 북한은 오직 정창모와 선우영에게만 대형 개인작업실을 제공했는데, 그만큼 아무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정창모는 1957년 26살의 늦은 나이에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담임교수였던 김장한은 나이 든 학생이면 필력이 있어야 한다며 권투를 권했는데, 정창모는 열심히 배워 한때 대학의 대표선수까지 했다. 권투의 순간 속도와 강타하는 힘이 그의 그림 그리기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1965년부터 조선화의 거장 리석호를 사사했는데, 리석호는 일찍부터 눈 여기던 정창모를 총애했다. 유독 정창모에게만 본인의 그림들을 넘겼는데, 그의 모든 것을 계승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창모는 욕심을 비운 신선과 같았다. 평양에서 만난 필자에게 ‘건달이, 거저먹는 그림을 그린다’며 한껏 낮췄다. 위의 작품은 금강산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를 그린 것이다. 온화한 채색에다 붓의 기운과 발색이 활달하고 부드럽다.
정창모는 2005년 ‘제8회 베이징 국제미술제’에서 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치열한 예술혼과 걸작들을 남긴 정창모는 처참한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붓을 들고 절규했던 박수근이나 이중섭 같은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분단시대 한반도 미술사의 핵심으로서 북녘에서 국보 대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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