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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 

한국 반도체 위기론의 본질 

김영문 기자
최근 삼성, SK 수장은 대통령의 ‘반도체 우려’에 자신감을 내비치며 “투자 계획엔 변함없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반도체가 수출 경제를 주도하고 있기에 ‘중국발 추격’, ‘글로벌 수요 급감’ 등의 이슈는 언제나 불씨로 남아 있다. 이종호 교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별로 없지만, 기회는 있다”고 했다.

연초부터 한국 반도체업계엔 ‘초호황’ 국면이 막을 내렸다는 기사가 줄을 지었다. 실제 한국 반도체 수출액은 연초 30% 가까이 빠졌고,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도 7조원 가까이 줄었다. 위기론은 한층 거세졌고, ‘잔치’가 끝났다는 회의론이 힘을 얻었다. 물론 지난해 실적만 보면 메모리 반도체 업계 세계 1, 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에서만 영업이익 60조원이 예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업계 분위기가 나쁜 건 아니지만, 경쟁자 중국의 추격이나 세계 경기 부진 등이 겹치면서 위기론에도 힘이 실린다.

1월 8일 오후 서울대에서 이종호(53)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을 만났다. 위기론의 본질을 묻고 싶었다. 이 소장은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회원 중 0.1% 최고 등급인 석학회원(펠로, Fellow)으로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다. 세계 최초로 3차원 반도체 소자인 ‘벌크 핀펫(FinFET) 기술’을 개발한 주역으로 미국 인텔에 넘겨 기술료까지 받는다. 지금은 세계 반도체 주요 회사들이 이를 핵심 표준 기술로 채택할 정도로 자리 잡았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한국 반도체 산업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이제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됐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체 수출액의 20%인 1000억 달러 규모를 차지할 정도다. 따라서 반도체가 무너지면 한국 경제는 물론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단순히 돈을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선 위기론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 교수는 ‘본질’에 방점을 찍고 위기론을 풀어갔다.

외국에서 부러워하는 한국 메모리 기술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소장은 “4~5년 전부터 반도체 관련 연구비가 줄다 보니 교수 인력을 채용하거나 연구시설을 개·보수하는 일이 어려워졌다”며 “가장 잘하는 메모리 분야를 기반으로 한 뉴로모픽 컴퓨팅 같은 인공지능 기술 등에서 표준을 쥐려면 인재 육성에 전방위적으로 지원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위기론이 자꾸 불거지는 이유가 뭔가?

한국이 퍼스트무버(선도자)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제 근성이나 깡만으론 안 된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부족하다. 지금 전 세계 메모리 분야 1, 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이끄는 임원은 과거 1980년대 한국 공과대학 최고의 인재들이다. 당시 최고 수재는 의과대학보다 전기공학과, 물리학과를 택했다. 그리고 이들은 최고 수준의 연구 인력으로 거듭났고, 과감한 의사결정을 한 대기업 경영진을 만나 한국을 반도체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놨다.

위기론 중 하나가 ‘메모리 쏠림현상’이다.

한국이 메모리 분야에서 강하긴 하다. 일각에서 세계적으로 메모리 수요가 줄면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일리 있다. 하지만 IT 프로세스에선 메모리가 필수고, 앞으로 저장매체 수요는 더 늘 수밖에 없기에 그런 위기는 당장 맞닥뜨리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한국만 유독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구분 짓는다. 반도체 로직(디지털 회로) 기술이 다를 뿐이다. 흔히들 비메모리 반도체의 대표 주자로 알고 있는 중앙처리장치(CPU)도 특수용 로직 반도체다.

비메모리 분야도 강해지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잘 만든다는 의미는 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관련 재료, 소자, 회로 설계, 아키텍처(시스템 구조·설계), 영업까지 잘한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인재도 매우 많다. 외국인 입장에선 오히려 한국을 부러워한다. 뭐든 상대적인 셈이다.

비메모리 분야도 강해지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방향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비메모리가 약하다고 해서 당장 연구에 착수하면 우리가 인텔이나 AMD 같은 CPU를 생산하는 회사를 만들 수 있겠는가.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한다면 모를까. 이 역시 비효율적이다. 인지 센서도 1등, 비메모리도 1등, 인공지능도 1등을 하겠다는 것은 욕심이다. 우리가 잘하는 메모리를 활용하면 된다. 응용하면 또 다른 시장을 열 수 있다. 진짜 메모리가 쓸모없고, 곧 없어질 기술이라면 중국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쫓아올 리 없다.

중국이 무섭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사실이다. 15년 전만 해도 기우였다. 대학이나 기업에도 제대로 된 팹(Fab, 반도체 생산설비)이 없었다. 그런데 해마다 중국을 오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너무 빨리 변했다. 칭화대에 팹이 새로 생겨 가봤더니 시설이 엄청 좋았다. 귀국 후 첨단 장비가 부럽다고 한 찰라 아예 새로운 팹 건물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연구개발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놀라울 정도다. 지난해 1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반도체소자학회(IEDM, International Electronic Devices Meeting)가 열렸다. 반도체 기술 분야에선 최고 수준의 학회라 논문이 채택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자리다. 한국 대학에선 두 편이 제출됐다. 하지만 중국은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베이징대와 칭화대만 해도 각각 8편이 넘어 보였다. 더 놀란 건 주최자가 2000여 명 관중 앞에서 중국 얘기만 따로 발표했다. 내용인즉슨 제출 논문 가운데 35%가 중국 본토에서 나왔고, 나머지 65% 연구논문 중 35% 내용도 중국 본토에서 나왔다는 얘기였다. 따지고 보니 절반 가까이가 중국 인력이 연구한 내용이었다. 이게 미·중 무역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미국 최고 권위 학회에서 나온 공식 소개였다.

美 최고 권위 학회 “반도체 논문 절반 中서 나와”

중국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실제 정부가 엄청난 지원을 해주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다. 칭화대 한 학생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학과별 커트라인을 보면 전기전자가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더라. 1980년대 한국에서 뜨거웠던 공대 입시 열기를 연상케 했다. 한국 반도체 업체 리더들도 1980년대 공대 수재들이다. 지금 중국이 딱 그렇다. 지식 게임으로 승부가 갈리는 반도체업계에선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중국 반도체 기술 수준을 두고 갑론을박이 많다.

지금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한국을 쫓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간 길을 쫓고 있어서다. 한국 제품이 새로 나오면 세밀하게 뜯어보고 테스트한다. 목표가 보이기에 쫓는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시작부터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자본과 인력을 함께 투입한다. 과거 한국이 10년 걸린 일을 3년 만에 해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니 한국은 자원(자본+사람)이 적으니 시간을 축적해 기술을 쌓았고, 중국은 자원을 쌓아 시간을 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국은 결국 중국에 밀릴까?

두 나라 모두 변수가 있다. 일단 한국은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수율을 자랑한다. 수십 년간 미세한 오류를 잡아가며 완벽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막대한 자본과 인력만으론 어렵다. 메모리 분야만 보면 한국 두 회사가 중국보다 기술 면에서 10년 정도 앞서 있다. 하지만 한국도 지금 당장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장담할 수 없다.

중국의 경우 두 자릿수 시장점유율 확보에 집중한다. 10%대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정부 지원에 매달리지 않고 사업을 펼칠 수 있다. 중국 업계가 더 독하게 마음먹는다면 상황은 복잡해질 수 있다. 하지만 중국도 10%대 점유율에 안주하면 성장 동력을 잃고 정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성장세를 유지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나?

정부가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신(新)격차’ 전략을 주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삼성과 SK는 남들이 아예 꿈도 못 꿀 ‘초(超)격차’ 전략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약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기보단 응용하며 서서히 격차를 벌리는 신 격차 전략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야 한다. 당장 한국의 반도체 산업 구조를 잘 이해하고 세계정세를 간파하는 전문가가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반도체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간산업이다. 미국이 세계 패권국가로 올라선 이유 중 하나도 IT 기술 표준을 마련해 컴퓨팅 시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단단한 하드웨어를 쥐고 있지만 새로운 생각이 필요한 대기업, 기반은 없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은 학계·중소기업이 이미 존재한다. 이들을 적절히 엮어주면 한국은 또다시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 한 가지 더 있다. 지금은 중국과의 경쟁만 부각되지만, 협력을 고민해야 한다. 산업적으론 다소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대학을 중심으로 공동 연구개발이라도 나설 필요는 있다. 중국의 반도체 육성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고, 완전히 따돌릴 수 없다면 손을 잡는 것도 전략이다.

한국에 가장 유망한 분야가 있다면?

‘뉴로모픽 컴퓨팅(neuromorphic computing)’ 연구 분야다. 이 기술은 인간의 뇌를 모방해 방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다. 세계 최고의 메모리 기술을 기반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펼칠 기회다. 이건 미국이 가진 IT 기술 표준과도 상관없다. 열린 시장이다.

물론 현실은 아쉽다. 당장 한국 내에선 ‘세계 최고’보다는 구글을 따라잡자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어렵다는 소리다. 하지만 왕위(汪玉) 칭화대 교수는 미국 반도체 기업 자일링스(Xilinx)에 행렬가속기 기술을 이전했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이 굴러가는 딥러닝 소프트웨어의 핵심 기술을 콧대 높은 미국이 중국에서 사 왔다는 얘기다.

반도체공동연구소가 생긴 이유도 이 때문인가?

맞다. 누가 나서주길 기다릴 상황이 아니다. 반도체는 인재가 필요한 산업이다. 그래서 반도체 관련 대학생과 대학원생, 기업체 직원을 대상으로 140여 명 정원으로 2주간 반도체 기본 공정교육을 진행한다. 지금은 기업이 자동화해보지 못했던 반도체 웨이퍼도 직접 다 만져본다. 반응은 뜨거웠다. 한 번에 1000명씩 몰리는 높은 경쟁률 탓에 학교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배출한 교육생만 1만3000여 명에 이른다. 비영리여서 현행 교육비로는 사실 시설 유지도 쉽지 않다. 연구소 클린 룸도 좁고, 각종 공정 장비에도 30년 세월이 묻어난다. 배정된 예산도 많지 않아 시간 나면 기업에 세일즈 아닌 세일즈를 나간다. ‘직원을 교육시켜주겠다. 대신 연구소에 후원해달라’고 수없이 설득했다.

이 교수는 인터뷰 내내 근심을 털어놨다. 특정 누군가의 역할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한뜻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 반도체 기술을 한 단계 진화시켜야 할 때를 맞이했는데 맨투맨으로 중국이나 거래 시장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하다”며 “한국은 정부·학계·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치밀한 전략으로 시스템을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은 ‘융합, 지식, 창의’ 3가지 키워드를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장 수당이 월 55만원입니다. 돈을 벌자고 이 자리에서 기업에 세일즈를 다니는 게 아닙니다. 다 한국 반도체업계를 짊어질 후학을 위해서입니다. 저도 그랬고 이 분야 종사자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반도체를 세계 최고로 만들겠다며 뜬 눈으로 지새며 청춘을 바쳤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시대적 사고를 강요하자는 게 아닙니다. 세계 최고란 자리는 얻기도, 지키기도 어려운 자리입니다. 정부·학계·기업 모두가 힘을 합칠 때입니다.”

-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김현동 기자

201902호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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