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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년 된 필기구 브랜드가 미래를 내다보는 법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은 많은 작가와 화가들을 설레게 하는 이름이다. 파버카스텔의 연필에 매료된 1883년의 빈센트 반 고흐가 그랬고, 괴테, 어니스트 헤밍웨이, 칼 라거펠트도 마찬가지다. 포브스코리아는 명문 장수기업 육성을 최대 과제로 삼고 있는 반원익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 부회장과 257년 역사를 지난 독일의 대표급 히든챔피언 기업 CEO의 좌담을 통해 명품 장수기업의 탄생 비결을 짚어봤다.

▎다니엘 로거 파버카스텔 CEO와 반원익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 부회장이 대담에 앞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업체인 파버카스텔은 매년 20억 자루에 달하는 연필을 생산하기 위해 30여 년 전 브라질에 여의도 30배에 맞먹는 숲을 조성했다. 회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단단한 철학이 뒷받침되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1761년 창업 이후 9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이 회사에 2017년 CEO로 영입된 다니엘 로거는 “성장 이전에 직원의 행복과 공동체의 번영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가 지금의 파버카스텔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반원익: CEO께서는 파버카스텔이 처음으로 영입한 외부 인사로 주목을 받으셨는데요. 파버카스텔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9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온 기업의 CEO 자리가 부담스럽진 않으셨나요?

다니엘 로거: 저보다는 파버 가문에 더 어려운 결정이었을 겁니다.(웃음) 저는 그 전에도 여러 가족경영 기업에서 일을 해왔기 크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로거 CEO는 스와치그룹 부사장을 지낸 뒤 2017년 6월 파버카스텔 CEO로 취임했다.) 파버카스텔 가문이 8대에서 9대 회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승계작업이 안정적으로 완료될 때까지 제게 경영을 맡긴 것이죠.

반원익: 파버카스텔과 다른 가족경영 기업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다니엘 로거: 파버카스텔의 경우, 생산 제품이 다양하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야 했어요. 파버카스텔은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 구현부터 최종 생산된 제품의 퀄리티까지 제가 직접 눈으로 보고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라고 판단했습니다. CEO로서 기업을 이끌 때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죠.

반원익: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필기구 업체로서 걸어온 길을 간단히 설명해주시죠.

다니엘 로거: 파버카스텔은 1761년 독일 뉘른베르크에 설립된 이후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중요한 성장 과정을 거쳐왔어요. 특별한 점은 오너 가족이 대를 이어 가업을 승계해왔다는 것이죠. 지금은 9대 오너인 찰스 알렉산더 폰 파버카스텔이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3대 회장까지는 내수 사업으로 커오다가 4대 회장인 로타 폰 파버가 뉴욕, 파리 등 세계로 보폭을 넓히면서 브랜드의 국제화에 초석을 놓았죠. 그는 회사 경영뿐 아니라 독일 최초의 보험회사를 설립한 공로로 백작(폰)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파버카스텔 가문이 귀족으로 승격된 것이죠. 그가 1840년대부터 직원들을 위한 건강보험과 연금제, 사내 유치원을 도입하는 등 직원 복지에 힘쓴 결과, 파버카스텔은 현재까지 숙련공들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9개국에서 15개 공장을 운영하며 120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굴러가지 않는 육각형 연필을 고안하고, 연필심의 경도(Hard)와 농도(Black) 규격을 처음으로 제정한 것도 파버카스텔이죠.

반원익: 200년 이상 이어온 역사 속에서 수많은 위기를 맞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반원익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 부회장.
다니엘 로거: 1970년대에 HP가 전자계산기를 개발하면서 당시 파버카스텔 매출에서 30%를 차지하던 제도용 자의 판매가 곤두박질쳤어요.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아야 했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40여 년 전에 말레이시아에 지우개 생산 공장을 설립했고, 지금은 세계 최대 규모의 지우개 생산 공장이 됐습니다. 또 다른 돌파구는 화장품 사업이었습니다. 주요 화장품 업체에 아이라이너, 아이브로펜슬 등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공급하기 시작했죠. 현재 매출의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파버카스텔이 화장품 사업을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웃음)

반원익: 연필 하나를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다니엘 로거: 나무의 씨앗을 심는 것부터 시작하면 최소 10년에서 8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됩니다. 많은 이가 공장에서 연필이 생산되는 과정만 보고 20~30초 정도라고 대답하는데 사실은 굉장히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일이죠. 제품에 따라 사용하는 나무가 다른데, 최상급 제품에 사용되는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다 자라는 데 무려 80년이 걸리죠. 파버카스텔은 연간 20억 자루가량의 연필을 생산하는데 여기에 목재 약 15만 톤이 들어갑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지속가능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브라질 황무지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기 시작했어요. 30년이 지난 지금은 멸종위기 동식물들의 보금자리이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반원익: 기업 철학이 ‘평범한 일을 남들보다 더 잘해서 비범해지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가들의 동종업체들이 싼 인건비를 무기로 빠르게 기술력을 갖추는 데 대한 우려는 없는지요?

다니엘 로거: 우리의 철칙은 가격으로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품질로만 경쟁해왔고,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죠. 끊임없이 생산 과정을 효율화하면서도 지속가능한 생산 공정을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자동차 경주로 치면 포뮬러1에 해당하는 품질을 자랑합니다. 물론 경쟁은 치열하죠. 그래서 혁신기술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반원익: 파버카스텔의 장기 전략은 무엇인지,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내다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니엘 로거: 약 15년 뒤에 트렌드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 항상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요. 제품 생산보다 이 제품으로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에 항상 초점을 맞춥니다. 연필과 색연필은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접하는 제품이에요. 어렸을 때의 감성을 브랜딩으로 이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마치 ‘평생의 동반자(Companion for life)’처럼요. 아이가 학교에 가고 직장인이 되고 은퇴할 때까지 성장 과정마다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면 계속 시장의 리더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300년 역사를 향하여


▎다니엘 로거 파버카스텔 CEO.
반원익: 생활이 디지털화될수록 아날로그 제품의 희소성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IT 기기들은 점점 더 편리해지는 반면, 직접 손으로 만지고, 쓰고, 창조하려는 인간의 욕구도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다니엘 로거: 손으로 무엇인가를 쓰는 행위는 뇌의 성장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죠. 컬러링북이나 다이어리 작성과 같은 취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취미로 그림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여가가 더 많아지면서 더 성장할 분야이기 때문에 우리는 파버카스텔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미술 선생님 교육을 위한 수업 튜토리얼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반원익: 소비자들이 제품을 다양한 경로로 경험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니엘 로거: 지난 20여 년 동안 디지털 기기가 보편화되면서 기업과 소비자들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기업들의 마케팅 방식도 제품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죠. 파버카스텔도 시장에 관계없이 동일한 마케팅 전략(one global marketing strategy)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강점을 살려 더 친밀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제품 튜토리얼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처럼 말이죠.

반원익: 파버카스텔은 ‘직원이 행복해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가치를 선구적으로 실행하고 발전시켜온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여전히 기업의 수익 창출을 우선시하면서 직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직원 복지 향상이 곧 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신념이 현장에서도 실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니엘 로거: 미래에는 연봉 이외의 요소들이 더 중요해질 겁니다. 직원들의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지, 훌륭한 직원을 보유하고 있는지가 회사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직원들의 교육, 교통, 유연한 근무시간 등 각종 작업환경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곧 장수기업을 만드는 길입니다.

반원익: 독일은 기업승계를 국가경쟁력 관점에서 접근하고 창업에 준하는 수준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다니엘 로거: 파버카스텔과 같은 가족경영 기업은 오랜 세대를 거쳐 노하우를 전수받았기 때문에 품질 면에서는 경쟁사들과 비교 불가능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톱이 되기까지 정부의 뒷받침도 있었죠. 중소·중견 기업에 대한 연구개발(R&D)인센티브 제도나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무역지원 등이 필요합니다.

반원익: 가족경영체제가 회사의 성공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다고 보시는지요?

다니엘 로거: 통상적으로 현 경영자가 60세가 되기 전에 승계 작업을 마치고 안정적인 경영구조를 만들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파버카스텔은 다음 후계자에게 CEO 역할을 맡기려 했지만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는 판단하에 가족이 아닌 제게 코칭 역할을 맡긴 것이죠. 승계 작업에 일찍 착수해 충분히 경험을 쌓도록 하는 게 핵심입니다.

반원익: 가족승계를 통해 안정적인 경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다니엘 로거: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가족 간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임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핵심이죠. 파버카스텔의 경우 글로벌 임직원 8000여 명이 회사의 승계 계획과 과정을 모두 인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승계 과정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사내에 루머가 돌기 시작하고 여러 비효율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죠. 누가 봐도 오해의 소지가 없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취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파버카스텔 8대 회장이었던 인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은 유아용 제품에 사용된 친환경 수성잉크의 무해성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잉크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반원익: 기존 사업 이외에 다른 미래성장동력도 있습니까?

다니엘 로거: 40년 전에 시작한 화장품 사업이죠.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립 제품 등 잉크 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제품들을 로레알 등 주요 화장품 업체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독일, 브라질에 화장품 공장을 두고 있고 지난해 미국에도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아직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앞으로 더욱 빠르게 성장할 분야이기 때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K-뷰티’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처럼, 향후 주요 성장 무대가 될 아시아 지역에도 진출할 계획입니다.

반원익: 마지막으로 파버카스텔의 성공 키워드를 3가지로 정리해주신다면.

다니엘 로거: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장기적인 사회적 책임(Long-term responsibility), 제품 품질 향상을 통한 고객 가치 제고(Benefit to consumers)로 요약하겠습니다.

반원익: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김민수 기자 kim.minsu2@joins.com·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201909호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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