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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家族)에서 가문(家門)으로 

 

한국의 많은 기업이 세대교체를 준비 중이다. 자녀가 여럿이라면 가업승계 준비도 단순히 ‘가족’이 아니라 ‘가문’으로 관점을 바꿔야 한다. 단순 혈연관계가 아니라 공통된 신념과 비전을 밀고 나가려는 의지를 체계화하란 소리다.

승계를 앞둔 경영자가 한 자녀만 두고 있다면 소유권 이전에 따른 의사결정은 간단하다. 하지만 자녀가 한 명 이상인 경영자라면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경영권 이전과 소유권 분배에 관한 것이다. 과연 자녀들에게 소유권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반적으로 소유권을 분배하는 방식은 2가지다. 첫째, 한 자녀가 책임지고 회사를 맡아 운영하는 단독경영이다. 어떤 경영자는 형제자매가 함께 일하는 경우 회사를 분리하거나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서라도 자녀들이 각자 단독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둘째, 형제자매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승계방식을 형제경영이라 한다. 이 경우, 다음 세대에서는 사촌들이 함께 오너십과 경영권을 공유하는 사촌경영 또는 사촌 컨소시엄 단계로, 그 이후는 가족 컨소시엄 단계가 된다.

가족이 함께 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에 참여하는 가족의 수가 많아질수록 가족의 역학관계가 아주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회사를 분리해서라도 한 자녀에게 경영권과 소유권을 이전하는 단독경영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어느 세대에서나 형제자매에게 주식이 분산되면 형제경영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단독경영보다는 자녀들이 공동으로 소유권을 보유하고 함께 경영에 참여하는 형제경영 방식이 더 많이 채택된다. 이반 랜스버그(Ivan Lansberg)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단독경영을 하는 경영자 중 다음 세대에는 단독경영보다는 형제 경영 방식을 택하겠다는 응답자가 두 배 가까이 됐다.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가족 간 경쟁이나 분쟁 사례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자녀들이 함께 성공적으로 일하기는 어렵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형제나 사촌이 함께 일하면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룬 사례는 수없이 많다. 예컨대 로스차일드나 록펠러, 듀폰, 발렌베리, 에르메스, 스와로브스키, 머크 등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형제경영, 사촌 컨소시엄, 가족 컨소시엄 방식으로 창업자 가문(家門)에서 기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기업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가족 수만 해도 수십 명이고 심지어 가족주주가 100명이 넘는 가문도 있다. 그럼에도 가족 간 별문제 없이 기업을 발전시켜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가문 차원에서 세심하게 미래 계획을 수립하고 운영체계를 구축하고 실행해온 데 있다. 이들은 기업이 가문이라는 생각으로 구성원 각자보다는 가문 전체에 무엇이 좋은지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여기에서는 형제 경영을 선택한 경우 가문 내에서 기업을 존속하기 위해 어떤 운영체계가 필요한지 살펴보자.

가문의 가치와 가풍을 구축하라

둘 이상의 가족으로 구성된 형태를 가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형제경영을 선택하면 가족에서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므로 이제 가문의 관점에서 운영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운영체계 중 하나는 가족들의 생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문의 공유가치와 가풍을 구축하는 것이다. 성공한 해외 가문들은 강력한 가족자산(Family Asset)을 보유하고 있다. 가족자산은 가문의 이름이나 평판, 역사, 문화, 전통, 가족의 가치 등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무형 자산을 의미한다. 특히 가족의 고유한 가치(Values)와 이념이 기업경영의 토대가 되어 대를 이어 계승되기 때문에 이들은 왜 가문에서 기업을 이어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크리스털 액세서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리더인 스와로브스키는 형제경영으로 기업을 경영해 현재 5세대에 이르렀다. 이들의 성공 비결은 핵심기술의 철저한 보안, 가족 화합에 있다. 이 가문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창업자의 경영철학과 가치를 듣고 자란다. 그리고 가족들이 합의하여 지분율과 상관없이 회장은 가족위원회에서 선정한 이사회 멤버 8명이 정하는 인물이 맡도록 했다. 이들이 창업자 가문에서 1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분쟁이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가족 규정을 명문화하고 대를 이어 가문의 가치와 가풍을 지켜가는 데 있다.

소유권 보존계획을 수립하라

가족갈등 대부분은 소유권과 관련돼 있다. 세대를 넘어가면서 기업의 영속성이 불투명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 유럽의 가족기업들은 소유권이 분산되는 경우 공동의 비전에 합의하고 ‘주주협약서’에 소유권 규정을 명확히 한다. 이것은 가문 내에서 기업을 이어가겠다는 공동의 꿈에 합의하고, 가족 간 분쟁을 예방하려는 의지가 발휘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형제경영에 접어들면 가족들이 함께 미래의 꿈을 공유하고 가문 내에서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세계적인 명품기업 에르메스는 1870년 설립 후 형제 경영으로 계승되어 현재 5대에 이르고 있다. 현재 후손 56명에게 주식이 분산되어 있음에도 가문에서 기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가문 내에서 소유권을 지속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한 덕분이다. 이들은 모두 ‘가족주주협약서’에 서명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주식을 매도하려는 가족이 생긴다면 반드시 가족 내에서만 매매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의결권이 있는 주식은 가족들만 소유할 수 있으며, 외부인이나 이혼으로 인해 가족관계가 끝난 사람은 의결권 있는 주식을 보유할 수 없게 했다. 또 회사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CEO를 교체하려면 가족주주 75%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가문의 일체감을 느끼게 하라

가족들이 함께 소유권을 나누어 갖고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 서로 ‘한 가족’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가족 수가 늘어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면서 결속력이 약해지는 사촌경영 단계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공식적인 가족회의나 가족모임 등 가족들이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낼 기회를 제공하여 가족의 화합과 결속력을 높이는 것이다. 가족회의는 관심이나 입장이 서로 다른 가족들 또는 다른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하고 차이를 좁히는 역할을 한다.

굴소스로 유명한 이금기社는 현재 자녀 4명이 회사에 참여하여 형제경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가족간 화목과 가족의 주요 의사결정, 가족의 화합 및 투자를 통합 관리하기 위해 가족총회와 가족위원회를 운영한다. 가족총회에는 3세대부터 5세대 자녀들까지 26명 가족이 참여하며 매년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가족모임은 많은 가족이 참여하도록 가능한 한 최대한 재미있게 구성한다. 그래서 참석한 가족들은 모임이 끝나면 다음 모임을 기다릴 정도다. 가족회의는 가족 간 갈등이나 분쟁을 해결하고 가족관계를 강화할 뿐 아니라 가족, 특히 젊은 세대의 정서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가족위원회는 주식을 소유한 가족이 중심이 되어 회사에 관한 내용을 상의한다. 가족회의는 분기별로 열리는데 핵심인원 7명이 돌아가며 회의를 주최하고 기업과 관련된 가족의 모든 문제를 함께 협의함으로써 합의점에 도달하게 된다.

스튜어드십(Stewardship)을 계승하라

창업자가 자신의 자녀에게 기업을 승계한다는 것에는 기업이 가문 내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그러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주식이 여러 가족에게 분산되면 어느 가족도 소유권 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분쟁은 기업을 사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일어나는데, 이것은 기업의 영속성을 저해하는 가장 큰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운영체계도 필요하다.

에르메스, 포드, 머크, 토요타, 발렌베리 등 해외 기업들은 창업자의 성(姓)으로 회사 이름을 지은 경우가 많다. 이들의 중요한 과업은 가문 내에서 기업을 지켜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손들에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건강하고 가치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켜 다음 세대에 성공적으로 물려주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가르친다. 이러한 책임의식을 스튜어드십(Stewardship)이라고 한다.

스웨덴의 대표기업 발렌베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가족기업이다. 이들의 자녀양육 프로그램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발렌베리가 후계자들은 일찍부터 자신이 ‘왕국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의식하며 자란다.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다. 부모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숲을 거닐면서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을 들려준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사업적 감각을 체득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특히 ‘검소함’을 중시한다.

자선활동에 후세대를 참여시켜라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어가려면 후손들을 건전하고 올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외 가업승계 전문가들은 가업승계 시 크든 작든 가족재단을 만들라고 권한다. 경영자들은 은퇴 후 재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동시에 후손들을 재단 이사 또는 자원봉사자로 일하도록 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자선재단이 가장 많고 규모가 큰 나라는 미국으로, 약 4만 개가 넘는 독립자선재단이 있다. 이중 가족기업 가문에서 운영하는 재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 이유는 성공한 가족기업들은 가족이 함께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가족운영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업을 경영해 부를 축적하고 자선활동으로 나눔을 실천하다. 그리고 자녀들을 어린 시절부터 자선활동에 참여시켜 ‘자기 것’을 나누는 습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돈의 가치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협조하도록 가르친다. 세계적인 명문 가문들이 수대에 걸쳐 명성을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가 자선활동에 있으며, 실제로 이것은 ‘부자가 3대를 가기 어렵다’는 3세대 함정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 김선화 ㈜에프비솔루션즈 대표

201908호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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