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속에서 떠난 베르디 

이탈리아 통일의 역사에서 베르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842년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한 그의 오페라 [나부코]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통일의 염원을 횃불처럼 타오르게 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이 오페라 공연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면 모든 관객이 기립하고 곡이 끝나면 으레 비스(앙코르)를 요청한다. 그런데 이 오페라는 베르디가 처절한 인생의 고통을 겪은 후에 탄생했다.

▎밀라노의 심장부 두오모 광장과 고딕양식의 대성당. / 사진:정태남
롬바르디아 평원에 자리 잡은 밀라노. 밀라노 시가지 중심에 있는 거대한 고딕양식의 대성당이 대지를 뚫고 나와 원대한 힘으로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오른 듯하다. 이 대성당을 보통 ‘두오모’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도시의 주교좌성당을 보통 두오모(Duomo)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스(Domus)가 변형된 이탈리아어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라틴어로 도무스 데이(Domus Dei), 즉 ‘신의(Dei) 집(Domus)’이란 뜻이다.

밀라노의 두오모는 황금빛 성모 마리아상이 올려진 높은 첨탑을 중심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무수한 첨탑과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수많은 성인의 조각상은 마치 하늘의 은총을 기원하며 합창하는 듯하다. 이 무언의 합창은 1901년 초 두오모 광장에서 울려 퍼진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떠올리게 한다.


▎두오모를 장식하는 수많은 첨탑과 조각상들. / 사진:정태남
이탈리아의 통일


▎두오모의 정면을 마주 보는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 / 사진:정태남
자로 잰 듯 반듯한 장방형의 널따란 두오모 광장 한가운데에는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초대 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의 기마상이 두오모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통일’이라는 말 대신에 ‘다시 솟아남’, ‘다시 소생함’이란 뜻으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라는 말을 쓴다. ‘통일’이라는 다소 평면적인 표현보다는 부활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리소르지멘토’라는 표현 속에는 ‘영광스러운 과거의 역사’를 다시 이어받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이탈리아는 갈기갈기 찢긴 채 끊임없이 여러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고 교황권과 각 나라 사이에 얽히고설킨 갈등에 시달려왔다. 19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상황을 보면, 이탈리아반도 내에서는 피에몬테와 사르데냐를 통합한 사르데냐 왕국만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인 입헌군주제 왕국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르데냐 왕국의 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이다가 마침내 1861년에 ‘이탈리아왕국’이란 이름으로 교황령과 베네토 지방을 제외하고 제1단계 통일을 이룩했고, 1870년에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교황령의 수도 로마까지 점령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완수했다.


▎세계적인 오페라 전당 스칼라 극장. 그 앞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 사진:정태남
한편 현재의 이탈리아 국가(國歌)는 이탈리아가 통일전쟁을 벌이던 1847년에 통일군에 참전한 제노바의 20세 대학생 고프레도 마멜리가 쓴 애국시에 제노바의 미켈레 노바로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 노래는 통일전쟁 기간 중에 널리 애창되다가 100년이 지난 1946년부터 이탈리아의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는 ‘숨겨진 제2의 국가’가 따로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사의 첫 구절만 따서 이 곡을 ‘바, 펜시에로(Va, pensiero)’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일명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나부코'


▎스칼라 극장 근처의 그랜드 호텔. 베르디가 거주했던 방에 이탈리아 국기가 걸려 있다. / 사진:정태남
두오모 광장은 밀라노의 세계적인 음악의 전당인 스칼라 오페라극장과 연결된다. 이탈리아 통일운동 역사를 말할 때 이 극장과 19세기 최고의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칼라 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기념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자리에 베르디 기념상이 서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베르디가 29세 때이던 1842년, 이 극장에서 그의 오페라 [나부코](‘나부코’는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사르’를 줄인 이름이다)가 초연되었을 때의 일이다.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이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중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그러나 잃어버린 나의 조국이여!’라는 가사가 나오자 관객들은 동요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통일의 염원이 순식간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것이다. 그 후 이 곡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모든 사람 사이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구심점으로 전개되면서 ‘베르디’라는 이름은 통일운동의 상징이자 민중의 구호가 되어 거리에는 ‘Viva VERDI!’(비바 베르디!)라는 글씨가 곳곳에 나붙었다. 이것은 ‘베르디 만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오스트리아의 검열의 피하기 위한 정치 구호였다. 즉, VERDI는 다름 아닌 Vittorio Emanuele Re d’Italia(빗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의 약자였던 것이다.


▎베르디의 초상화(1886년). / 사진:정태남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나부코] 공연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면 모든 관객이 기립하고 곡이 끝나면 으레 비스(앙코르)를 요청한다. 그런데 이 성공작은 베르디가 인생의 고통을 처절하게 겪은 후에 탄생했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


▎베르디가 세운 양로원 안묘당에 안치된 베르디의 묘소. / 사진:정태남
위대한 음악가 베르디는 우리 기준으로 따진다면 음대 출신이 아니라 거의 스스로의 힘으로 음악가가 된 인물이다. 사실 그의 삶 자체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1813년 북부 이탈리아 시골 도시 붓세토 근교의 작은 마을 레론콜레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때 밀라노 음악원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나이가 입학 제한 연령보다 많고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방이 아닌 다른 지방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으며, 음악적으로는 피아노 연주 테크닉이 잘못되어 있고 작곡 실력도 허술하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고배를 마신 베르디는 스칼라 극장에서 한때 활동한 적이 있는 동향 출신의 작곡가에게 3년 동안 배우면서 작곡뿐만 아니라 드라마에 대한 감각을 홀로 터득해나갔다. 그런데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인간적인 고통이 닥쳐왔다.

붓세토에 돌아가서 신혼살림을 하던 중 1838년에는 딸이 죽었고, 밀라노로 이주한 1839년에는 아들마저 죽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1840년에는 부인 마르게리타까지도 뇌막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게다가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흥행사 메렐리가 의뢰하여 무대에 올린 작품들도 모조리 흥행에 실패했다. 베르디는 삶의 의욕을 잃고 음악계를 완전히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를 붙잡은 사람이 있었다. 실패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끝까지 꿰뚫어 보고 있던 흥행사 메렐리였다. 만약 그가 베르디에게 오페라 [나부코] 작곡을 의뢰하지 않았더라면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역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 수많은 불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베르디는 사재를 털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년 음악가들을 위해 양로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었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을 지켜준 신에게 바치는 종교곡을 썼다. 그러고는 1901년 1월 27일, 기거하던 그랜드 호텔 방에서 자기 장례식은 음악 없이 조촐하게 치르라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유언대로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으며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한 달 후 그의 관이 그가 세웠던 양로원의 묘당으로 옮겨질 때 국가 차원의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자그마치 시민 30만 명이 운집하여 애도하는 가운데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820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두오모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적인 역경을 이겨낸 후 이탈리아 통일의 혼을 불태우게 하고 또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였다.

베르디의 마지막 가는 길


▎베르디의 입학을 거부했던 베르디 음악원. 입구에 이탈리아 국기가 휘날린다. / 사진:정태남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가끔 위대한 선물을 내려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단 한 사람에게만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내릴 때도 있지만, 인간적인 고통도 함께 내려서 하늘의 선물을 더욱 더 값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베르디의 경우가 그러했다.

한편 그의 입학을 거부했던 밀라노 음악원은 나중에 ‘베르디 음악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가 막히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002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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