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 

헤네랄리페 정원의 물소리, 음악이 되다 

그라나다의 상징 알함브라는 군사용 요새 알카사르, 이슬람 왕의 집무 공간과 사적(私的) 공간으로 이루어진 궁전, 후세에 세워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또 이 전체의 성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역에 세워진 왕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헤네랄리페는 정감 흐르는 아담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페인 국민주의 음악가 마누엘 데 파야는 헤네랄리페 정원의 밤 분위기를 피아노 협주곡에 담았다.

▎헤네랄리페에서 내려다본 알함브라 성채와 그 너머 보이는 그라나다 시가지. / 사진:정태남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유서 깊은 도시 그라나다에 남국의 강렬한 봄 햇살이 쏟아진다.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를 800년 동안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슬람 세력의 본산이었던 알함브라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볼 수 있는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그라나다 시가지를 수호신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알함브라는 군사용 요새 알카사르, 이슬람 왕의 집무 공간과 사적(私的) 공간으로 이루어진 궁전, 후세에 세워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또 이 전체의 성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역에 세워진 왕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로 이루어져 있다.

알함브라 성채를 바라보며 이 땅을 스쳐간 역사를 뒤돌아본다


▎이슬람 양식의 아치를 통해 본 헤네랄리페의 분수 정원. / 사진:정태남
로마제국 시대 말기에 서고트족은 로마제국의 속주이던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고, 711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침입하여 불과 몇 년 만에 이베리아반도를 거의 모두 석권했다. 한편 북쪽으로 내몰렸던 이베리아반도의 주민들은 작은 왕국 여러 개를 건설하고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기독교 군기를 앞세우고 기나긴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국토 회복’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다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은 결혼을 통해 힘을 합쳐 마침내 1492년 1월, 끝까지 버티던 그라나다를 함락함으로써 국토회복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알함브라는 바로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지배할 때인 13~1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마치 기독교 승리자에게 ‘이슬람 건축과 예술의 결정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러한 역사가 중첩되어 있는 그라나다는 크게 3개 지역, 즉 기독교 지역, 이슬람 지역, 유대인·집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의 작은 천국


▎알바이신에서 본 신비한 그라나다의 황혼. 왼쪽 산 중턱에 헤네랄리페가 보인다. / 사진:정태남
알함브라 성채를 지나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고 있는데, 한 미국인 노부부가 다가와 ‘제너럴리페이가 어디에 있나요?’라고 묻는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페이’라는 장군의 동상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스페인에는 그런 이름이 없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부부는 ‘헤네랄리페(Generalife)’를 영어식으로 읽었던 것이다. 표준 스페인어에서는 모음 e나 i 앞의 g는 목구멍 뒤쪽에서 나오는 ‘ㅎ’소리다.

헤네랄리페는 알함브라 궁전 건너편 산 중턱에 세워진 이슬람 왕조의 여름 별장으로, 알함브라 궁전과 더불어 또 하나의 ‘작은 천국’이라고나 할까. 이곳에서는 ‘속세’가 눈 아래에 보이면서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헤네랄리페라는 이름은 원래 스페인어가 아닌 아랍어로 ‘건축가의 정원’이란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 별장과 정원을 설계한 건축가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헤네랄리페는 정감이 흐르는 아담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묘한 공간들의 배치, 품위 있는 선, 빛과 그늘이 교차하면서 확 트인 조망은 이곳의 매력이다.

큰 사이프러스 나무와 이름 모를 관목들과 향기로운 꽃들이 우거진 이 정원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항상 물이 있다는 것은 삶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정원을 지상의 천국으로 승화하려는 기원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마치 운하를 축소해놓은 듯 좁고 기다란 연못 양쪽에서 일렬로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조용히 물을 뿜는다.

하지만 헤네랄리페를 처음 설계했던 이슬람 건축가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즉, 그라나다가 함락된 다음 나중에 물을 뿜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 모습대로라면 길쭉한 연못의 수면은 마치 하늘을 투영하는 거울처럼 잔잔했을 것이다. 또 정원의 조경도 원래는 지금처럼 울긋불긋한 꽃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로 상록수로 담백하게 처리되었다. 그러고 보면 헤네랄리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명상에 적합한 공간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사실 헤네랄리페의 모습은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나서부터는 다소 변형되었는데, 군데군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의 영향이 보인다.

나뭇잎 사이를 뚫고 떨어지는 아른거리는 햇빛을 밟고 계단을 따라 별장 위층으로 올라가면 테라스식 정원과 알함브라 성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알함브라 성채 너머 멀리 보이는 기독교 지역의 대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대성당에는 그라나다를 함락하여 스페인 국토회복전쟁을 종결했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이 함께 묻혀 있다.

파야의 명곡 '스페인 정원의 밤'


▎헤네랄리페에서 본 알함브라 성채와 기독교 지역. / 사진:정태남
남국의 태양이 지고 나면 그라나다의 하늘은 노을로 물든다. 어둠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하면 멀리 알바이신 지역에서는 불빛이 켜진다. 알바이신 지역은 그 옛날 이슬람의 무어인들, 유대인들, 집시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집시들의 노랫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오는 듯하다. 헤네랄리페 정원에도 밤이 깃든다. 이곳의 밤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시간은 아니다. 어둠에 묻힌 헤네랄리페에서는 햇빛이 강렬한 낮에는 보이지 않던 야릇하고 신비스런 색깔들이 마음속으로 느껴진다. 또 헤네랄리페 정원의 물소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더 명료하게 들린다. 이 소리는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의 [스페인 정원의 밤(Noches en los Jardines de España)]에서 울리는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소리처럼 영롱하게 들려온다.

이 곡의 첫 부분은 헤네랄리페의 밤에서 느끼는 인상을 음악으로 옮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관현악의 흐름을 타고 울리는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소리는 물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곡에는 왠지 모를 우수가 전반적으로 흐른다. 어쩌면 천국을 잃어버린 자들의 탄식 소리일까?

파야는 1915년에 이 곡을 작곡하여 이듬해에 마드리드에서 초연했다. 이 곡에는 멜랑콜리가 흐르면서도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파야는 1907년부터 7년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드뷔시, 라벨 등 인상주의 음악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함브라 성채 아래 파야가 살던 집. / 사진:정태남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스페인 국민주의 음악을 이끌어나가던 핵심 인물은 페드렐, 알베니스, 그라나도스, 파야였다. 그들 중 파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 지방 사람들이었다. 파야는 안달루시아의 항구도시 카디스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안달루시아 혈통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중동부 해안의 발렌시아 사람이고 어머니는 카탈루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달루시아에서 성장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깊숙이 안달루시아 음악의 토속적인 본질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스페인 정원의 밤]은 ‘헤네랄리페에서’, ‘멀리 들리는 춤곡’, ‘코르도바산맥의 정원들에서’ 세 곡으로 구성된 일종의 3악장 피아노 협주곡이다. 그중 두 번째 곡의 제목은 정원과 관계없고 알바이신 지역에서 들리는 집시들의 플라멩코 춤곡이 헤네랄리페로 메아리쳐 들리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세 번째 곡에는 남부 스페인의 전통적인 부활절 음악과 집시 음악이 혼합되어 있다.

그라나다를 사랑했던 파야의 고뇌


▎마누엘 데 파야. / 사진:정태남
파야는 파리생활을 마친 후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는 아예 그라나다로 이주하여 알함브라 성채 아래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그는 안달루시아의 민중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함께 안달루시아의 민속음악을 재발견하고 정제해내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고뇌의 시간이 찾아왔다. 1936년 스페인은 내전에 돌입했다. 쿠데타의 주역 프랑코 장군은 좌익 성향의 시인 로르카의 작품을 금지했고 그런 와중에 로르카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파야는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프랑코 장군에게 탄원했다. 하지만 로르카는 그라나다 근교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동료의 비극적인 최후는 파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페인 내전은 1939년 봄 프랑코 장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군’을 뜻하는 영어 제너럴(general)은 스페인어에서는 똑같은 철자이지만 발음은 ‘헤네랄’이다. 프랑코 장군은 ‘헤네랄’ 정도가 아니라 ‘위대한 장군’, ‘최고의 장군’이란 뜻으로 헤네랄리시모(Generalisimo)로 불렸다. 프랑코가 정권을 잡자 파야는 아예 짐을 싸서 조국을 등지고 머나먼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이주해버렸다. 프랑코는 그에게 상당한 금액의 연금을 제의하고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하지만 파야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7년을 보내고 1946년 11월 14일, 70회 생일을 얼마 앞두고 숨을 거두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헤네랄리시모’란 말은 듣기조차 싫었던 모양이다. 그가 끝까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싶었던 것은 ‘헤네랄리페’가 아니었을까?

-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004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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