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이탈리아 로마(Roma) 

로마의 뒷골목에서 만나는 ‘맨발의 예수 그리스도’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카라바조.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 안에서는 마태복음의 저자 성 마테오의 생애를 담은 유화 3점을 볼 수 있는데, 그중 [성 마테오를 부르심]은 그가 남긴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올해는 이 명화가 탄생한 지 420년이 되고 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카라바조의 명화를 볼 수 있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 / 사진:정태남
세계 어느 나라 미술관이든 이 화가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으면 미술관의 브랜드 가치는 엄청나게 상승한다. 또 그의 작품 기획전이 열릴 때면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 예로 2010년 로마에서 열렸던 기획전의 입장권 암표 가격은 10배나 뛰었을 정도였다. 그는 17세기 전반 한동안 크게 명성을 크게 누린 후 오랫동안 잊혔다가 20세기 중반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해 지금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올해는 그가 남긴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성 마테오를 부르심]이 탄생한 지 420년이 되고 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화가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아니라, 그보다 약 100년 후에 태어난 미켈란젤로 메리지(Michelangelo Merisi, 1571~1610)이다. 그는 밀라노에서 출생하여 밀라노 북동쪽 도시 베르가모 근교의 카라바조(Caravaggio)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나중에 로마에서 그냥 ‘카라바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가 등장했던 시기는 미술사적으로 볼 때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고 바로크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마니에리즈모(manierismo, 매너리즘) 시대의 후반에 해당한다. 그는 20대에는 정교한 정물화와 인물화 소품을 주로 그리다가 29세 때 ‘성 마테오 연작’을 의뢰받고부터는 본격적으로 감동적인 종교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성서의 인물과 배경을 이상화하는 기존 화풍을 뒤엎고 대담한 구성과 철저한 사실주의에 따라 주인공의 생애에서 극적인 순간을 마치 사진 찍듯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는데, 로마의 뒷골목 술집에서 찾은 평범한 사람들과 심지어 매춘부도 성서 속 인물의 모델이 되었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


▎어둡고 화려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 내부. / 사진:정태남
오늘날 카라바조의 작품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등 여러 주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로마 시내 중심부에는 그의 작품을 줄도 서지 않고 입장료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성당이 세 개나 있다. 그중 하나가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이다. 프랑스어로는 생 루이 데 프랑세(Saint Louis des francais)인데, ‘프랑스 사람들의 성 루이’란 뜻이다. 이곳은 로마에 거주하는 프랑스 사람들과 로마에 온 프랑스 순례자들을 위한 프랑스 국립 성당이다.

로마 명소인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 사이에 있는 이 성당은 겉모습이 수수해서 일반 관광객들은 모르고 지나치지만 그래도 ‘족보 있는’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자코모델라 포르타가 설계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구상했던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수정하여 완공한 주인공이다. 한편 이 성당의 정면은 건축가이자 뛰어난 구조 엔지니어였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1589년에 완공했다.

밝고 담백한 외관과 달리 성당 내부는 매우 어둡다. 하지만 18세기 후기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건축가와 예술가들에 의해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성당 내부 좌우에는 모두 10개의 소예배당이 있는데, 이런 소예배당을 이탈리아어로는 카펠라(cappella), 프랑스어로는 샤펠(chapel), 영어권에서는 프랑스어 철자를 자기네 식으로 읽어 ‘채플’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소예배당들은 보통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이 매입하여 가문의 이름을 붙이고는 예술 작품으로 멋지게 장식했다.

카라바조 팬들이 몰리는 곳은 이 성당 중앙제단 가까이에 있는 카펠라 콘타렐리(Cappella Contarelli)이다. ‘콘타렐리’는 프랑스 주교 코앵트렐(M. Cointrel)을 이탈리아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는 상속자들에게 이 소예배당을 마태복음 저자 성 마테오의 생애를 담은 그림으로 장식해달라고 유언하고는 1585년에 1 세상을 떠났다.

한편 카라바조는 21살이 되던 1592년에 로마에 와서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이름 없는 화가로 활동하다가 권세가 막강하고 예술적 안목이 깊은 델 몬테 추기경의 눈에 띄었고 델 몬테 추기경은 1598년에 그를 콘타렐리 추기경의 상속자들에게 추천했다. 이리하여 카라바조는 난생처음으로 고위 성직자나 귀족 같은 개인 수집가가 아니라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는 성당 안에 대형 종교화 두 점을 그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 마테오의 부르심]과 [성 마테오의 순교]인데 크기는 세로 323㎝, 가로 343㎝이다. 콘타렐리 소예배당의 양쪽 벽을 장식하는 이 그림들은 1599년에 시작하여 1600년에 완성되었다. 반면에 중앙 제단을 장식하는 [성 마테오와 천사]는 2년 뒤인 1602년에 추가되었다.


▎콘타렐리 소예배당에 있는 카라바조 명화. 좌우 벽면에 [성 마테오를 부르심]과 [성 마테오의 순교]가 있고 중앙엔 [성 마테오와 천사]가 있다. / 사진:정태남


카라바조 최고의 명화 '성 마테오를 부르심'


▎[성 마테오를 부르심]. / 사진:정태남
콘타렐리 소예배당 왼쪽 벽면을 장식하는 [성 마테오를 부르심]은 마태복음 9장 9절, 즉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는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한편 ‘마테오’는 이탈리아식 이름이고 우리나라 개신교 성경에서는 ‘마태’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그가 예수의 부름을 받기 전의 이름은 레비(또는 레위)였다. 당시 유대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속주였고 세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마테오가 다른 세리들과 탁자 옆에 앉아 그날 거둔 세금을 계산하고 있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함께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은 마테오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 손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천지창조] 중, 신의 손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 아담의 손을 연상하게 한다. 그 손길을 베드로가 따라 하고 있다. 베드로는 교회의 상징이니 교회를 통하여 예수에게 나오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탁자 오른쪽의 두 젊은이는 뭐 이런 사람들이 찾아왔느냐는 듯 약간 깔보면서 경계하는 표정이고, 탁자 왼쪽 끝에 앉은 젊은이는 오로지 돈을 세는 데만 몰두하고 옆에 선 안경 낀 노인은 이 젊은이가 돈을 제대로 세고 있는지 감독하는 듯하다. 즉, 이 두 사람은 세상의 물질에 집착하느라 영적인 구원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마테오를 보면, 오른손은 아직도 조금 전에 세다가 만 동전에 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들어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를 찾아왔느냐는 듯 왼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자리를 박차고 막 일어서려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는 마테오가 새 사람으로 변화되기 직전과 직후의 상황이 동시에 감지된다. 매우 평온하면서도 극적인 이 상황은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더욱 강조되어 있는데 이 빛은 은총의 빛이며, 구원의 빛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실내인지 실외인지 애매모호하다. 어떻게 보면 로마의 뒷골목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기도 한다.

또 탁자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이 사건이 일어난 2000년 전 로마제국 시대가 아니라, 카라바조가 살던 시대의 복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갑자기 찾아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 머리에 희미한 광채가 신성을 표현해주는 것 외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고 얼굴은 이곳을 찾아오느라 피곤한 듯하다. 게다가 맨발이다. 또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지친 모습인 데다가 맨발이다. 이것은 어쩌면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 살아가야 하는 참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보기에 따라 이 그림에서 주인공인 마테오가 누구인지 애매모호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보통 마테오라고 여기는 인물이 왼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옆의 젊은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돈을 세는 일에만 몰두하는 젊은이가 바로 마테오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 그림은 보는 사람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겠다.

‘뚜렷한 명암대비’의 삶


▎카라바조가 죽은 다음 화가 레오니가 1621년경에 그린 카라바조의 초상화. / 사진:정태남
성 마테오 연작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에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일약 스타 화가로 떠올랐다. 그 후 그의 화풍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 여러 나라 화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삶은 그의 작품처럼 명암대비가 너무나 뚜렷했으며 스캔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감동적이고 심오한 종교화를 그렸지만 실제 성격은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매우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는 로마의 뒷골목에서 주먹질을 함부로 하여 감방살이를 밥 먹듯 하더니 결국에는 살인죄까지 저질러 나폴리, 시칠리아, 몰타 등 여러 곳으로 도피해야 했다. 그러다가 교황청의 사면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북상했다. 하지만 교황령과 경계를 이루던 토스카나 지방의 한 작은 항구에 다다른 다음 그만 객사하고 말았다. 자세한 기록이 없으니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다. 1610년, 그의 나이 39세였을 때였다.

* 이탈리아 한글 표기는 가급적 현지 발음을 따랐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011호 (202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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