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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20) High risk, High return의 실크로드 

 

고대 이집트에 남아 있는 운송료 기록을 보면 일반 노무자들 인건비보다 훨씬 더 높게 책정돼 있었다. 아마 목숨을 건 생명수당이 포함되어서 운송료가 비쌌을 것이다.

▎신장위구르의 천산남로
고대에 먼 거리를 오가며 장사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면 장삿길은 비교적 안전했겠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할 때는 목숨을 걸고 장삿길에 나서야 했다. 장거리 이동 중에 식량이나 물이 보급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웠다. 또 고대에 인접 지역과의 적대적 관계는 종종 상인들에 대한 적의와 두려움으로 이어져 먼 거리까지 상품을 직접 운반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17세기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갈 때 험한 길에서 추운 날씨로 10명 중에 3~4명은 동사했다. 마로코 폴로가 고비사막을 횡단할 때도 가장 짧은 코스가 한 달이나 걸렸다. 가장 긴 코스는 1년가량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을 지날 때는 최소한 한 달 치 식량을 가지고 가야 했고, 길을 잘못 들면 바로 굶어 죽었다. 특히 파미르고원의 고산들은 12일을 걸어도 참새 한 마리 볼 수 없다. 해발이 높아 불을 피울 수가 없어 음식을 익혀 먹을 수도 없다. 17세기 포르투갈의 선교사 벤투 데 고에스가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를 거쳐서 중국에 올 때도 여정은 험난했다. 파미르고원을 넘으면서 “날씨가 너무 춥고 산소가 희박해서 사람이나 말이 숨을 쉴 수 없으니 도처에 시체들이 즐비했다. 파, 마늘, 생강으로 겨우 버텼다”고 했는데 고에스가 몰고 갔던 말 6마리도 모두 이곳에서 아사했다. 사막도 상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막 횡단에 대한 상인들의 공포감은 타클라마칸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서유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을 찾을 수 없는 길이 길게 이어졌고 세찬 모래 폭풍이 느닷없이 몰아치기도 했다. 어떤 길에는 여행자와 그들이 몰고 가던 낙타의 유골을 빼고는 어떤 표지도 없었다. 지름길을 택한다고 남들이 덜 이용한 길을 가다가 수많은 상인과 여행객이 사막의 열기에 말라 죽었다. 일행이 대규모 카라반을 쫓아가다가 뒤로 처지면, 미숙한 여행자들은 며칠 동안 헤매다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한 끝에 더는 가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죽었다.

그러면 그들의 시체는 바람과 모래에 침식되어 곧 뼈만 남게 되고, 드러난 뼈는 햇빛에 하얗게 표백되었다. 남송 말기 주밀은 “돌아오는 길에 수천 리의 사막이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물도 없으며 모래가 눈을 가리는 바람에 한 달 만에 지나갈 수 있었다. 소금과 밀가루를 섞어 낙타의 입에 넣어주면서 목이 막혀 질식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사람들은 떡을 만들어 물과 함께 허리에 차거나 동물 가죽으로 감싸서 보관했다가 물에 적셔 먹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 길을 가는 것을 마치 하늘에 오르는 만큼 어렵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험난한 실크로드를 다니는 상인들 중 일부는 풍요로운 중원이나 강남에 도착하면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

두려움과 공포의 망망대해가 희망과 유토피아로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카라반 대상(출처 Wikimedia Commons), 낙타를 몰고 가는 대상들의 모습은 20세기 말까지 지구촌 오지에서 볼 수 있었다.
중국에서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는 주로 천체의 수평면상 고도를 측정해 구면삼각법으로 배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측항법에 의존했다. 안개가 끼고 흐린 날 항해하는 것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못지않게 위험했다. 뱃사람들은 그리스 시대부터 위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18세기에야 가능해졌다. 중세까지도 장사꾼들은 바다를 두려워했다. 5세기에 바닷길로 인도를 다녀온 중국 구도승들은 이 두려움을 생생하게 기록에 남겼다.

“대양은 경계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동서를 구분할 수 없었다. 해, 달, 별을 관찰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면 배가 바람에 실려 이동했지만 마땅한 길 없이 나아갔다. 깜깜한 밤에는 파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결이 서로 부딪치면서 마치 불이 난 듯 밝아졌다. 상인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해 공포에 질렸다. 바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닻을 내릴 수 있는 곳도 찾을 수 없었다.”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은 백제 서해안 가장 서쪽 끝에 있어서 항로를 가장 용이하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였다. 출토된 다양한 토기류에서 백제의 중앙과 영산강 유역 세력, 가야, 왜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남조 양식의 청자, 방제경, 가야 양식의 마구, 왜 양식의 석제 모조품 등은 한국, 중국,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항해로와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고대 사람들이 원시적인 제사를 지낸 흔적이 문화 경관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해양 제사문화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또 현재까지도 어부들의 안전과 고기잡이를 도와준다는 개양할미(변산반도 앞바다를 수호하는 해신)의 전설이 내려오며,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가 매년 열리고 있어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죽막동 유적에 자리한 수성당은 서해를 다스리는 개양할미와 그가 낳은 8자매를 함께 모신 제당이다. 전설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각 도에 한 명씩 딸을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깊이를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준다고 한다.

『심청전』에서 장사꾼들이 공양미 300석을 주고 심청이를 사서 인당수(백령도 인근)에 바친 까닭은 그만큼 바다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요즘 쌀 가격으로도 공양미 300석이면 2억원 정도 된다. 서해안의 고대 항구들 근처에 오룡묘같이 뱃사람들의 안전과 무역의 성공을 비는 사당이 곳곳에 있는 것은 고대 바다가 그만큼 위험하고 두려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도 지쇠(持衰)라는 사람을 두어 항해가 순조로우면 그냥 두고 질병이나 폭풍을 만나면 그를 죽이고자 했던 의식이 있었다. “그들이 바다 건너 중국으로 올 때는 항시 한 사람에게 머리 빗질을 하지 않게 하고 서캐와 이를 물리치지 못하게 하며 의복을 때 묻은 채로 두며 육식을 하지 않게 하며 상주처럼 여인들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를 지쇠(持衰)라 한다. 행로가 길하고 좋으면 함께 그 생구(生口)에게 재물(財物)을 주었다. 행로 여정 중에 질병이 있거나 폭풍해를 만난다면 죽이고자 했는데 이는 지쇠가 삼가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해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고대 사람들은 세상은 한정된 공간이고 바다의 끝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고대 서구에서는 바다의 끝에는 온갖 괴물이 있고 그 끝은 낭떠러지라고 믿었다고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이런 믿음이 생겼다.

2000년 전, 중국의 초창기 발명가들은 천연적으로 자화된 철광석 덩어리인 자철광을 줄에 매달아 양극을 가리키는 용도로 활용했다. 그 후 한나라 때 좀 더 정교한 지남기라는 나침반이 등장했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의 원항 항해도 지남기가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항해사들도 군사작전과 인도양을 왕래하는 무역에 나침반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중국 뱃사람들과 장사꾼들이 유라시아로 전파한 나침반 기술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다.

10~11세기 이슬람 파니마 왕조 시대에 풍요롭고 관대한 분위기에서 유대인 상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들은 없애지 못했는데, 카이로의 고대 회당 인근에 있는 보관소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유대인들이 가족이나 장사꾼들과 일상적으로 나눈 서신은 지브롤터에서 알렉산드리아나 인도까지 오갔는데, 여기에는 장사꾼들의 고되고 위험하며 암울한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특히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모든 여행자에게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주로 다른 상인이 그 역할을 했고, 상인들은 서로에게 안전을 맡겼다. 어느 배를 타든 살인, 해적, 질병에 노출되었고 배가 표류하는 일도 많았다. ‘유령선’은 망망대해 인도양의 향료 수송로에서 선원들과 승객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엿보게 한다.

산과 바다, 사막보다 더 무서운 사람


▎신안해저선을 복원한 모습. 이 배에 탔던 원나라, 고려, 일본 장사꾼과 선원들은 유물과 함께 수장되었다.
실크로드의 산과 바다, 사막이 아무리 험난하다 해도 대자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다. 몽골제국 시기에는 금항아리를 진 여자가 제국의 어떤 길을 걸어도 안전했다고 하지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따르면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해협은 해적들로 인해 극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실크로드의 도적 떼, 국가, 부족들은 사막의 갈증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은 상인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했다. 2세기까지는 로마가 교역로로 연결되었지만 3세기 유라시아가 혼란해지고 실크로드가 위험해지자 무역이 끊기기도 했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실존 모델인 현장법사가 7세기에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갈 때도 여러 차례 강도를 만났는데 그중에는 돌궐 도적 떼 2000명도 있었다. 같이 가던 상인들이 앞서가려는 욕심에 밤중에 길을 떠나 4㎞ 정도 앞서갔는데 현장법사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상인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실크로드 위에는 버려져서 폐허가 된 도시들, 썩어가는 시체들, 말라비틀어져 딱딱해진 나무들, 인간·낙타·말의 오래된 유골들이 널려 있었다. 서아시아의 아라비아사막과 북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인들과 여행자들은 사막에서 어떤 방식으로 습격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한다. 접근하는 상대가 같은 편일 수도 있지만 늘 적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습격자는 대부분 우리 부족과 원수 관계이거나 교류가 없었던 자들이다. 어느 편이든 상대는 상인들이 가진 낙타와 무기, 상품을 빼앗으려 했고, 특히 원수 관계인 자들은 목숨까지 노렸다. 유라시아가 육지와 바다로 연결된 9세기에 신라에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가려면 4개월이 걸렸다. 신라 승려 혜철은 814년에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다가 황해도 황주에서 적발되어 일행 30명은 죽고 혼자 살아남아 당나라에 겨우 도착했다. 고대국가는 민간인의 여행이나 교역을 엄격히 금지했는데, 교역에서 얻는 이익을 국가가 독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무역이 정치체제를 흔들어 놓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도적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의 관세청 역할을 하는 공무원이었을 것이다. 고대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던 페니키아 장사꾼들이 지역 실세들에게 통과세를 낸 것을 관세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능을 생각해보면 오래전 선사시대부터 관세와 비슷한 통행세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국가는 고대 이래 국제 간 무역을 철저히 통제해왔다. 신약성서에도 “삭개오(Zaccheaus)라는 자는 세관장으로서”라는 대목이 나온다. 관세를 의미하는 단어 ‘Tariff’는 16세기 스페인 요새 ‘Tarifa’에서 유래했다. Tarifa에 근거를 둔 무어인 해적들이 지브롤터해협을 지나는 화물선으로부터 공물을 강제로 빼앗았다. 동양에서는 세관의 기원을 당나라의 해외무역을 전담하던 관청인 시박사(市舶司)로 본다. 그 시절 한반도에서 맹활약했던 장보고의 청해진도 아마 세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관세를 내지 않고 밀수하는 장사꾼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며 국가와 도시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만들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25% 관세를 부과했고, 당나라 때 광저우에 도착한 페르시아·아라비아 상인들은 물건값의 30%를 관세로 지불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보스턴 티 파티는 영국이 차에 세금을 물리는 올려서 현지인들이 반발해서 일으켰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더 큰 이익을 얻으려는 밀수업자들이 뒤에서 조종을 했었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108호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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