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솜털 보송보송한 열두 살 소년 임형주가 음악방송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나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노래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가 다시 나타난 건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다. ‘한국 최초의 팝페라 테너’라는 생소한 수식어를 가진 열일곱 살 미소년이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으로 화제몰이를 했고, 이후 세계를 누비며 ‘뉴욕 카네기홀 최연소 독창회 개최’, ‘CNN iReport가 공개한 세계 3대 팝페라 테너’, ‘BBC 뮤직매거진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팝페라 가수 TOP 5’ 등 화려한 타이틀을 더해갔다. 군 입대, 팬데믹 등으로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이 ‘어린 왕자’가 어느덧 24년 차 ‘아재 가수’가 되어 5년 만에 정규 7집 앨범을 들고 컴백했다.
▎ 사진:디지엔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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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in Time(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앨범 제목부터 ‘인생무상’이 떠오른다. ‘사의 찬미’, ‘봉선화’, ‘희망가’,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등 리메이크 위주의 수록곡도 앤틱스럽다. 30대 중반, 아직 풋풋한 청년의 나이에 웬 복고풍일까.“기획 단계부터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앨범이에요. 민요 아리랑부터 1910년대 ‘독립군 애국가’, 1920~30년대 가곡의 효시 ‘봉선화’, 대중가요의 효시인 ‘사의 찬미’, ‘희망가’,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 때 불렀던 ‘저 벽을 넘어서’까지 한국의 색채를 담은 앨범이죠. 사실 2년 전 준비하다 여러 사정으로 늦어졌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 같은 한류열풍이 아니었거든요. ‘코리안 클래식’으로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해보고 싶었던 거죠.”
그간 라디오 DJ, 유튜브 진행 등 노래보다 말을 더 많이 했네요.노래를 쉬면 좋을 줄 알았어요. 너무 앞만 보고 목표지향적으로 쉴 틈 없이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무대에서 2년이나 멀어질 줄 몰랐네요. 노래를 한다는 게 내가 재주가 좀 있어서 응당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됐죠. 국내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DJ도 해보고 재능 있는 후배를 발굴해서 프로듀서로 데뷔하는 기회가 되긴 했어요. 그런 일들도 뿌듯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나도 천상 플레이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국내 최초의 팝페라 테너’로서 지금 크로스오버 전성시대를 맞은 소회가 어떤가요.포레스텔라 조민규씨가 저를 두고 ‘한국 크로스오버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했다는데, 어느새 제가 그런 선배가 됐더군요. 최근에 BTS가 그래미상을 마지막 뛰어넘을 장벽으로 표현했잖아요. 제가 때마침 2017년부터 그래미 투표인단 겸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데,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팔자인 것 같아요. 이젠 인생 2막을 준비하면서 개인의 영광보다는 후배들 챙기는 포지션을 갖고 싶어요. 요즘엔 페스티벌 예술감독 같은 예술행정쪽으로도 관심이 가고, 요즘 말로 ‘국뽕이 차오르는’ 앨범을 낸 것도 그래서죠.
예술행정에도 도전하고파
▎임형주의 정규 7집 앨범은 한국의 역사적인 노래들을 담은 ‘코리안 클래식’ 콘셉트다. / 사진:디지엔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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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 인생 2막을 논하다니 심하게 조숙하다 싶은데, 자칭 ‘욕심도 싫증도 많은 사람’이라서다. 하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진득하게 한곳에 머문 적이 별로 없다. 어려서 미술을 배우다 방과 후 동요반에 들어가 전국대회를 휩쓸었고, 삼성영상사업단 임원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다가 두 달 만에 활동을 멈추고 예원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줄리어드 예비학교, 빈 슈베르트 음대, 로마 시립예술대학으로 떠돌며 세계 성악 문화를 섭렵했다.
왜 그렇게 옮겨 다녔나요.역마살이 확실히 있어요. 여행을 가도 한군데 지긋이 못 있고 다 돌아다녀야 해요. 깃발을 꽂아야 되는 캐릭터죠. 여러 나라에서 유학한 것도 다양한 문화를 다 체득하려는 욕심 때문이었고요. 빈에서는 독일 가곡의 제대로 된 딕션을,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 가창의 표현력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으니까요.
어쩌다 ‘한국 최초의 팝페라 테너’가 됐을까요.미국에 처음 가서 만난 개인 튜터 부부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일하는 분들이었는데, 제 노래를 듣자마자 ‘오페라틱 팝을 하면 대성할 목소리’라고 하시더군요. 정작 저는 사라 브라이트만과 안드레아 보첼리의 ‘타임 투 세이 굿바이’ 정도 알 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분들이 도밍고 매니저나 파바로티 매니저 같은 음악신의 유명 인사들에게 저를 소개시키며 키워주셨죠. 미국에서는 팝페라를 하고, 정통 오페라에 관심이 생기면 나중에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가서 배우라고 권해주신 것도 그분들이고요.
롤 모델이 있었나요.저의 평생 롤 모델은 조수미 누나예요. 어린 시절 같은 삼성영상 사업단 소속 아티스트로 인연을 맺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소녀 같아서 누나라고 불러요. 평생 순수한 소녀같이 사는 분이죠. 팬심이 여전해서 지금도 누나한테서 연락이 오면 심장이 콩닥콩닥거려요. 저는 매사에 조심성이 많은데, 누나는 예능감이 넘치는 점도 부럽고요.
이탈리아 모교에서 석좌교수가 됐는데, 뭘 가르치나요.이탈리아에서 제가 정통 성악을 가르친다면 말도 안 되죠. 저는 ‘칸토 모데르나’라는 현대 성악, 소위 ‘크로스오버 보컬’을 가르쳐요. 의외로 이탈리아에 팝페라 가수가 많지 않아서, 저 정도 커리어의 팝페라 가수를 데려오려면 돈을 많이 써야 되거든요. 저는 거기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으니 겸사겸사 제의한 것이죠.”
너무 승승장구하는 인생 아닌가요.워낙 어릴 때 데뷔해서 ‘만들어진 아티스트’라고들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요즘 데뷔하는 크로스오버 후배들은 [팬텀싱어]라는 플랫폼이 있고 전문 매니지먼트 시스템도 있지만 저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뭘 하려면 팝페라가 뭔지 설명부터 해야 했죠. 크로스오버를 한다고 하면 상업주의에 찌든 음악이라고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였고요. 해외에서는 내 돈 들여 공연장을 빌리겠다고 해도 오디션을 보더군요. 10여 년 전 프랑스 앵발리드에서 공연할 땐 한복을 못 입게 했어요.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곳에서 다른 나라를 상징하는 옷을 입으면 안 된다면서요.
흑역사도 있었겠죠.요 몇 년 악플러에게 시달렸어요. 카네기홀 공연 영상이 합성이다, 여잔데 남자로 성전환 수술을 했다,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는다는 소리까지 하더군요.
왜 그런 악플러가 생겼을까요.제가 열일곱에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애국가를 불렀잖아요. 그 이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치행사, 나눔활동에 불려 다녔는데, 여기저기 얼굴 내미는 게 못마땅한가 봐요. 저는 정치인이 아닌데, 음악가에게도 이분법이 필요한가요. 세월호도 연평해전도다 추모하고 싶은데, 세월호 추모한 놈이 연평해전 10주기에 가면 어떡하냐고 하더군요. 인간적으로 순수한 마음에 갔을 뿐인데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로 보이나 봐요. 악플러에게 신변 위협까지 받다 보니 두렵기도 한데, 제 멘토이신 한완상 전 부총리님이 ‘형주씨는 최초의 히트곡이 애국가 아니냐. 세월호 때도 많은 사람을 위로했고, 2002년 월드컵을 비롯해 나라의 빅 스포츠 이벤트 때마다 함께했으니, 시대를 담는 목소리를 팔자로 생각하고 살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에 크게 위로받았습니다.
“팝페라 황제? 팝페라 아재”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미소년으로 세상에 나와 ‘원조 이모 팬덤’을 거느렸던 그다. 혹시 나이 먹는 게 두렵진 않을까. 웬걸, 두려워서 은퇴까지 생각했단다. “최고의 자리에서 은퇴하는 아이돌이 가끔 있잖아요. 저도 데뷔 10주년에 ‘박수칠 때 떠나자’는 게 목표였어요. 근데 맘대로 안 되더군요. 소년미는 사라지고 살도 많이 쪘는데, 이제 내려놨어요. 리즈 시절 영상이 유튜브에 별로 없어서 아쉽지만, 어차피 비주얼 가수는 아니니까요. 주사 맞는다고 소년 될 게 아니라면 나이 들어가는 걸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어요. 나이테에 걸맞은 무게감도 갖고 싶고요. 데뷔 20년 차이 나는 후배들과 어차피 경쟁이 안 되잖아요. 저는 중후한 쪽으로 승부해야죠.(웃음)”
후배들의 아이돌급 팬덤이 부럽진 않나요.매니지먼트 시스템이 갖춰진 환경에서 서로 의지하며 활동하는 면에서는 부럽죠. 하지만 팬덤은 부럽지 않아요. 제가 ‘앨범 누적 판매 100만 장’을 달성한 아티스트잖아요. 한때 팬클럽 회원 4만5000명 찍어본 사람이거든요. 금방 쭉쭉 빠져서 그렇죠(.웃음) 다행히 정상에 있을 때부터 주변 지인들이 ‘내려올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런데도 하향곡선을 그릴 땐 상처가 생기더군요. 이제야 좀 초월한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도 박수와 환호는 길지 않은 게 자연스런 삶의 이치란 걸 조언하고 싶네요. 너무 ‘꼰대라떼’ 같나요?(웃음)
‘최연소’, ‘국내 최초’ 타이틀이 많은데, 부담스럽지 않은지.이제 나이가 차니까 더는 최연소를 이룰 게 없어서 아쉽죠. 세월을 체감하는데, 제 프로필에 대한 자신감이 커요. 수도사처럼 술 담배도 안하고 살면서 쌓은 커리어고, ‘내가 죽어도 커리어는 남는다’고 생각하거든요. 2022년 5월에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독창회를 여는 것도 또 다른 타이틀을 염두에 둔 계획이죠. ‘한국의 카네기홀’에 해당하는 세종문화회관의 4개 극장(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아티스트가 될 예정이거든요.(웃음)
숫자와 기록에 대한 집착이 있나 봐요.승부 근성이 강해서 그래요. 근데 그게 좋게 작용해서 원동력이 됐어요. 자꾸 앞으로 나가고, 새로운 기록에 대한 동기부여를 해준 거죠. 체력보다 욕심이 앞서 힘들긴 해요. 비행기를 너무 타서 공황장애도 있고, 코로나 블루도 생겨서 신경안정제도 먹고 카운슬링도 받아요. 남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걸로 알지만 어린 나이부터 어른들 세계에 살면서 상처가 많았거든요. 실수를 많이 할 나이에 실수하지 않는 법부터 배웠으니까요. 음악가로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인간 임형주는 불쌍한 애예요.그는 소위 ‘소년 출세’를 한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왜곡된 시선과 편견이 억울한 듯, “누구나 고통의 무게가 있다”고 강변했다. 꽃길만 걸은 듯 보이는 인생도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어려서부터 친구들은 ‘너는 행복해야만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남의 인생을 절대 속단하면 안 돼요. 해외를 돌며 최고급 호텔에 묵고, 천하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뭐 하나요. 공연만 생각하면 긴장이 되서 수면유도제를 먹지 않으면 잠도 못 자는걸요. 낙제점 간신히 면한 열등 인생이라 생각해요. 음악만 해서 부족함이 많으니까요. 몇 년 전에 포브스에서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에 제가 들었다는데, 우리 집에서조차 영향력 없는 제가 무슨 아시아 영향력인가 싶더군요.(웃음) 어느 방송에선 저를 ‘팝페라 황제’라고 소개하던데, ‘팝페라 아재’가 더 어울리지 않나요. 이제 부담 없이,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어요.”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