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29) 

기념일 - 평범한 날에 부여된 특별한 의미 

기념일은 수없이 많다. 독립기념일 같은 공적인 기념일은 물론 생일 같은 사적인 기념일까지 무수한 기념일에 우리는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한다.

▎윌리엄 터너 [노엄 성, 일출] 1845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든 그날을 기념하려는 시도를 한다. 기념(紀念)은 뜻깊은 대상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기에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날일지라도 의식하여 기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많은 사람과 함께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누군가는 스스로에게 술 한잔을 건네며 생일을 기념한다. 특정 종교인들은 그 어떤 형태의 기념일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날을 짚고 넘어가며 그날을 되짚어본다.

기념일은 수없이 많다. 한 나라가 독립하고, 전쟁을 치르고, 독립 운동을 하고, 종교적 인물이 태어나거나 죽고, 법이 만들어지는 등 우리는 기념일을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접하며 살아왔다.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진 공적인 기념일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생일, 결혼기념일, 창립기념일, 개교기념일과 같은 사적인 기념일도 많다.

00:00의 마법

영국의 화가 터너(William Turner)는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풍경화를 주인공이자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게 한 위대한 인물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붓터치로 자연을 담은 그의 작품 [노엄 성, 일출]에는 푸른 새벽빛을 뚫고 떠오르는 아침 해가 그려져 있다. 또렷이 보이는 동그란 해가 아니라, 대기 속에 묻혀 녹아 있는 해는 터너가 죽기 6년 전, 그에게는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 있는 하루였을 것이다.

새해가 밝으면 많은 사람이 한 해 계획을 세운다. 올해 기필코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이야기하며 변화한 모습을 기대하는 일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23시 59분의 나와 1분 후의 나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다. ‘새해’는 우리가 정한 시간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지 물리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인 선은 많은 것을 바꾸는 힘이 있다. 새해는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라고 사람들이 정해놨기 때문에 이전까지 잘 되지 않았던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2월 31일에 보는 일출과 1월 1일에 보는 일출이 같은 해라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다. 심지어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면서 해가 보여지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1월 1일에 뜨는 해는 특별하다.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을 새롭게 맞이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일출 명소에는 인파가 몰려 제대로 해를 보기도 어렵다. 이것이 특정 기념일에 부여한 의미가 가지는 힘이다.

나에게만 소중한 특별한 날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새해 첫날이나 어버이날, 스승의 날, 제헌절, 광복절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기념일도 있지만 한 개인에게만 의미 있는 기념일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생일이다. 생일은 한 개인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자 매년 돌아오는 그날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몸 안에서 존재하던 생명체가 세상 빛을 보게 된 첫날을 우리는 매년 기억한다.

삶이 고통스럽고 세상에 자신을 ‘피투(彼投)’시킨 부모가 원망스러운 사람들은 생일 따위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생각 역시 분명히 자신이 태어난 생일을 의식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의 마법사라 불리는 화가 샤갈(Marc Chagall)은 운명의 여인 벨라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몇 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이 그림은 샤갈이 결혼하기 얼마 전 맞이한 그의 생일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랑하는 벨라가 꽃다발을 들고 있다. 그녀에게 달려가 키스를 하는 샤갈의 행복한 감정이 둥실 떠오르는 몸으로 표현돼 있다.

생일, 연인과의 기념일, 결혼기념일 등 개인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날은 그날을 평소와 전혀 다르게 인식하도록 한다. 생일이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와 선물을 받기도 하고, 의미 있는 사람과 평소보다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일상의 같은 날 중 하나인 하루가 나만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 되는 것 역시 관념적으로 우리가 설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라고 해서 생물학적으로 내가 특별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일에도 밤새 일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서운한 말을 들었다면, 어버이날 자녀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면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건이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특별하고 싶은 날, 소중히 대해지고 싶은 욕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함께 모이는 시간


▎비고 요한센 [고요한 밤] 1891
개인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기념일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계절에 따라 특별히 좋은 날들이 존재했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곤 했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 지금의 명절 형태로 자리 잡았다. 현재는 추석, 설날처럼 공휴일로 지정된 날을 제외하고는 많은 명절이 우리 삶에서 사라졌다. 명절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그 의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가족이 모이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특정 종교인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 종교 지도자의 생일이라서가 아니라, 이날이 되면 많은 사람이 추운 날씨에도 서로 연락을 취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따듯함을 나누기 때문이다.

덴마크 화가 요한센(Viggo Johansen)의 작품 [고요한 밤]에는 커다란 트리를 정성껏 꾸민 후 그 주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큰 트리에 오너먼트를 원하는 위치에 달고 주변을 꾸미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가족들에게 주는 선물을 트리 밑에 두고 포장을 함께 뜯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부모는 어린 아이들에게 산타가 밤에 선물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며, 아마 산타의 선물도 저 트리 아래 있을지도 모른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 모든 행위는 가족이 함께 모여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위한 것이다.

좋은 것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기념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축하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좋은 날이라 생각하는 날에는 축하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다. 대표적으로 한 사람이 사망한 날을 기리는 기일이나 전쟁이 일어난 날이 있다.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 군이 스페인의 민간인 저항군을 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1808년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올리자 스페인 민중이 저항했고, 이에 프랑스 군인은 학살을 자행했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카메라가 없던 시절 많은 화가가 전쟁의 참혹함을 작품 속에 담고 또 담았다.

좋은 날을 축하하고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 개인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기도 하고, 또 과거에 중요한 시험에 합격한 날은 자신의 노력이 보상을 받은 자랑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회사 창립기념일은 한 회사가 정식으로 세상에 존재함을 드러낸 날로,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회사의 창립 취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좋지 않은 날조차 기념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어 더는 무의미한 희생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취지에서이다. 실수했거나 고통받은 일이 있다면 잊고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과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좋은 날뿐만 아니라 나쁜 날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 날마다 해는 떠오르고 비슷해 보이는 하루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좋은 날을 축하하고, 좋지 않았던 날들을 거울로 삼는다면 비슷해 보이는 매일이 그 안에서 계속해서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207호 (202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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