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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일] 박한선 서울대 인류학과 조교수 

진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본 일과 놀이 

노유선 기자
박한선 서울대 인류학과 조교수는 인류진화사에서 일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조명했다. 구석기시대 수렵채집사회부터 신석기시대,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근면성’과 ‘인내의 가치’를 체화해왔다는 설명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일이 긴 시간, 스트레스,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진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일의 의미를 살펴보고, 현대인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초기의 수렵채집사회부터 현대의 복잡한 문명까지, 인류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에 종사해왔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일을 향한 열정은 천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일을 싫어한다. 월요일 아침에 느끼는 불쾌한 경험, 사무실과 공장을 떠올리기만 해도 느껴지는 답답함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놀고 싶다. 우리는 주 5일의 일과 주말 2일의 여가를 맞바꾸면서 삶을 지탱해나가는지도 모른다.

수렵채집사회의 일과 놀이

1960년대,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구석기시대 수렵채집사회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하루에 단 3~4시간만 일하면서도 놀라운 풍요로움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매혹적인 주장인가? 이는 1960년대 히피 문화와 함께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현대인은 탐욕에 눈먼 사장님에게 착취당하며 과도한 일을 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일까? 우리의 조상은 맨날 놀면서도 풍족하게 살았다는데 말이다.

하지만 흔히 믿는 것과 달리, 수렵채집인의 풍요롭고 여유로운 모습은 환상일 뿐이다. 종종 5월의 봄날, 교외로 나가 안전한 산책로가 깔린 야트막한 야산을 산책하면서, 원시인의 삶이 아주 쾌적하고 여유로웠을 것이라고 속단한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은 고어텍스 등산복도 없었고, 복합소재로 설계한 등산화도 없었다. 5km 산책길이 아니라,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 5월의 봄날이 아니라,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12월의 엄동설한에도, 8월의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도 일하고 사냥하고 채집해야 했다.

수렵채집인은 근면보다는 준비를, 축적보다는 공유를, 성취보다는 예측을 중요하게 여겼다. 사실상 모두가 전략가이자 연구자였다. 사냥과 채집에 성공하려면 식물에 대한 폭넓은 지식, 모은 자원을 처리하는 방법, 사냥을 위한 동물 추적 및 포획 기술, 사냥한 동물의 고기를 요리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했다. 임시 숙소 설치, 불 피우기, 보호용 의류 제작 등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도 습득해야 했다. 궁극적으로는 가혹하고 험난한 환경에서 장기적 계획을 이어가고, 짝을 찾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등 모든 과업을 성취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는 보통 현대인이 주말마다 하는 일이다. 산과 바다로 떠나고, 축구와 야구를 즐기고, 연인과 데이트하거나 자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은 구석기 선조들의 주 업무였다. 그들에겐 순간순간의 활동이 모두 일인 동시에 놀이였다. 모닥불을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인 부족원들은 건기가 언제 끝날지, 사냥감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다음 성인식에서 누가 의례를 치를지 이야기를 나눈다. 이건 업무 회의일까? 그냥 여가에 즐기는 잡담일까? 콧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분명 일은 아니다.

수렵채집인은 놀지 않았다. 다만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노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수렵채집인에게는 아마도 일과 놀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근과 퇴근 시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불을 피우고 쟁기질을 하고 음식을 만드는 등 모든 일이 즐거운 여가이자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발적 활동이었다.

일에 대한 현대인의 아이러니한 태도

현대인이라고 다를까? 인간은 긴 세월 동안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활동을 ‘즐거워’하도록 진화했다. 인류 진화사의 99% 이상이 수렵채집인의 삶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 활동 자체를 즐기도록 진화해왔다.

그럼에도 현대인이 일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이유는, 일의 태반이 조상이 살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즐기지 않는 탓에 돈을 주면서 억지로 시키는 것이다. 현대인이 ‘일’에 상응하는 급여를 받는 이유는 일이 ‘하기 싫은 활동’이라는 데 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돈을 주고라도 할 것이다.

수렵채집인이 ‘여유로운 워커홀릭’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일이 ‘일의 원형’이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관계를 다독이고, 상황을 평가하고, 다음 세대를 기르는 일은 원초적 일이라 일컬을 수 있다. 하지만 신석기혁명을 지나면서 인간의 일은 고통스러운 반복 작업으로 변질됐다. 하루 종일 탄광에서 괭이질을 하거나 기판에 납땜질을 하거나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타닥거리는 일이 과업이 됐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하는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고통을 토로한다.

이 같은 과정에서 인류는 스스로 묵묵히 인내의 가치를 체화해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일이 많아도 괴로워하고, 일이 없어도 불안해하며 허전함을 견디지 못한다. 일은 하기 싫으면서도, 또 하고 싶은 대상이다. 현대인의 모순적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일에서 해방되면 행복할까

그렇다면 미래의 인류는 더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아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하기 싫어하지만, 동시에 일이 없으면 몹시 불안해한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근무시간을 줄여달라고 시위를 하지만, 시청 앞에서는 일자리를 늘려달라며 시위를 하는 이유다.

근무시간을 줄이고 휴가가 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2008년 폴 돌란 등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근무시간이 줄어들수록 불안을 더 크게 느낀다. 소득이 줄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소속이 있을수록, 직책이 있을수록 힘들어하면서 동시에 행복해한다. 심지어 업무량이 많아지면 더 만족해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과 책임이 얼마나 많은지 광고하듯 열심히 알린다. 어떤 의미에서 일벌레의 자발적 과로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근면과 성실은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짐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불안해하지도 말고, 초조해 하지도 말자. 수렵채집인은 뜻밖의 호조건을 만나면, 행복을 만끽한다. 꿀통을 발견한 하드자족은 벌꿀의 달콤함을 즐기며, 매머드를 잡은 원시인은 수개월 동안 사냥을 아예 하지 않고 여유를 누렸다. 매머드보다 거대한 잉여 자원이 넘쳐나고, 야생 벌꿀보다 달콤한 음식이 지천인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왜 ‘일’을 하지 못해 안달복달할까?

당신이 하는 활동이 모두 일이다. 신석기시대와 산업혁명시대를 거치며 ‘하기 싫은 일’을 근면하게 해낸 사람이 큰 성공을 얻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리고 구석기시대의 일과 신석기시대의 일을 균형감 있게 배분해보자. 미래 시대는 알 수 없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의 시대는 분명 구석기시대에 가까울 것이다. 원초적 일의 원형을 얼른 찾아내는 이가 얼리어답터다. 과거에서 찾는 미래다.

※ 박한선 - 진화인류학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현재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조교수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등이 있다.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202307호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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