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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40) 기마병의 가공할 만한 위력 

 

몽골군은 프르제발스키 말(Przhevalsky horse)이라는 야생마를 탔다. 이 품종은 평균 키가 13~14뼘 정도에 다리가 두꺼우며 유럽의 군마보다 몸집이 훨씬 작고 힘도 세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몽골 말들은 말발굽으로 툰드라를 뒤덮은 눈을 긁어내 그 속에 있는 풀이나 이끼를 찾았고 심지어 나뭇잎을 먹기도 했다.

▎몽골초원에서 말몰이를 하는 장면.
말이 눈 속에서 먹이를 찾을 수 있었던 덕에 몽골군대는 혹독한 추위에서도 말을 부릴 수 있었다. 실제로 몽골군대는 이 말들을 타고 한겨울에 파미르고원을 넘어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몽골 병사들은 말 서너 필을 끌고 다니면서 강행군 중에는 몇 시간 만에 말을 바꿔 타 말의 체력을 비축해주었다.

몽골군은 말 안장에서 잠을 자면서 이동했으며, 아주 먼 거리를 갈 때는 말만 바꿔 타면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예를 들어 1221년 칭기즈칸의 군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틀 만에 200㎞를 이동했다. 1241년에는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사흘 만에 약 300㎞를 달려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진군했다. 몽골 기병들은 식량으로 쓸 젖과 피를 얻기 위해 주로 암말을 몰았다. 몽골 말은 유난히 영리하다. 베트남전쟁 때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베트남의 대미항쟁을 지원하기 위해서 몽골에서 베트남으로 보낸 말 중에 한 마리가 몽골로 다시 돌아와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었다. 동북아 전역에 서식하던 야생마 프르제발스키는 서식지 파괴와 남획으로 멸종위기에 몰렸으며, 지금은 동물원에나 가야 볼 수 있다. 한때 몽골제국이 직접 통치했던 제주도에 지금도 있는 작은 몸집의 말들은 당시 몽골 말의 혈통이라는 것이 이미 한국과 몽골의 연구자들에 의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한국의 다른 지역에는 이런 계통의 말이 없다.

명나라는 조선의 군사력이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북방민족의 침략이 극심하다는 핑계로 일부러 엄청난 수의 말을 진상하도록 압박했다. 조선에서는 사복시에서 군마의 품종개량과 성능 강화를 위해 일종의 유전자 연구를 진행했다. 수차례 실패 끝에 당대 최고의 기마민족이었던 여진에서 들여온 종마를 조선마와 복잡하게 교배해 철청준마(鐵靑駿馬), 오명마(五明馬) 등 준마 20여 종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명나라의 가혹한 군마 헌상 강요로 인해 그 좋은 말들을 거의 다 빼앗겼다. 조선 후기 청나라 때는 군마 헌상을 강요받지는 않았지만 조랑말을 타고 싸워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유목민 흉노족은 한나라의 일개 현에 불과한 인구를 가졌지만, 고대 첨단무기인 말과 활의 위력을 활용하여 차별화된 군사력으로 인구가 수십 배인 농경민족을 제압할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족은 헝가리에서 몽골초원에 이르는 초원벨트를 기마병으로 점령했다. 몽골족도 자기네보다 100배가 많은 인구를 기마병의 위력을 활용해 정복했다. 잘 훈련된 기마병의 위력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말 타는 사람들


▎〈고구려 무용총 벽화 수렵도〉 몽골의 역사학자 B. 소미야바아타르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를 보고 “앞에 있는 동물을 앞으로 쏘고, 뒤에 있는 동물은 산 넘어 쏜다”라는 몽골 고대의 속담이 그대로 표현된 그림이라고 감탄한 바 있다.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쪽 중에서

스키타이부터 시작해서 근대 이전까지 기마병의 위력은 현대 지상전의 탱크와 비슷했다. 중장기병이 시속 40~50㎞로 돌진해서 칼과 창으로 보병을 내리칠 때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현대전에서 보병이 탱크에서 느끼는 공포감과 비슷했을 것이다. 흉노는 100분의 1 수준의 인구를 가지고도 중국 대륙의 제국들과 자웅을 겨루었고, 칭기즈칸은 불과 10만 내외의 기병으로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란계 민족들은 재갈, 고삐, 전차, 안장, 금속제 등자 등 여러 마구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아리아인부터 스키타이, 페르시아, 파르티아까지 수천 년간 중앙유라시아를 호령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전쟁을 할 때만 해도 말이 사람을 지탱하기 힘들어 전차를 사용했다. 이후에 말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지며 기원전 7~8세기부터 스키타이, 흉노가 말을 타고 기마전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스키타인인은 중앙유라시아에서 유목민족을 일대 군사 세력으로 성장하게 한 고삐, 말 위에서 활쏘기를 가능하게 한 단궁, 기마 군단 등을 최초로 만든 이란계 민족이다. 세계 최초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도 말을 탄 전사들이 세운 국가이다. 페르시아라는 말의 어원은 이란고원 남부의 파르사를 그리스 사람들이 페르시아라고 불러서 생긴 이름이고, 파르사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말 타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고구려 벽화에도 나오는, 뒤를 돌아 화살을 쏘는 파르티안 샷은 후퇴하면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환상적인 필살기였다. 이 파르티안 샷의 기술도 스키타이인들이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의 최종병기 말


▎시안시립박물관에 전시된 벽화. 파르티아식 활쏘기와 한혈마가 있는 부조, 수덕현 출토. 상단의 중앙에 말을 타면서 뒤돌아 화살을 쏘는 방법을 파르티아식 활쏘기라 한다. 고구려 벽화와 스키타이 조각에 파르티아식 활쏘기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말타기에 급급한 어설픈 농경정주민 기마병들에게 어떤 각도에서도 활을 쏘는 파르티아식 활쏘기는 공포였을 것이다.
한나라 효경제 시절 한 군관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단 3기의 흉노 궁기병을 만나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금나라 때 17기의 강화사절단이 본국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북송 지휘관이 보병 2000명을 동원하여 이들을 습격했다. 금의 17기 기마병은 곧바로 중앙에 7기, 좌우 날개에 5기씩 세 부대로 나뉘어서 화살을 쏘며 적을 교란했다. 결국 보병 2000명은 완전히 농락당하고 궤멸했지만, 금나라 기병 17기는 단 1기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특히 적의 진이 흐트러지고 후퇴할 때 기마병으로 추격해서 적을 섬멸한 기록은 역사에 수없이 많다.

농경정주민들이 역사상 유목민들과 전쟁을 치러 이긴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유목민족들이 잘 안 뭉치고 서로 싸워서 그렇지 똘똘 뭉치면 농경정주민들을 정복하는 것은 큰일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기관총이 나오기 전까지 육지에서 기마병을 이길 수단은 별로 없었다. 요즘은 한 달 정도 훈련하면 쓸 만한 소총수를 양성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농경정주민들을 건강한 청년 기마병으로 훈련하려면 몇 년이 걸렸다. 몇 년을 치열하게 훈련하더라도 평범한 유목민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농경정주민들의 땅에서 말을 키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큰돈을 주고 유목민들에게 계속 말을 사와야만 기마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세 때는 궁병 하나 키우는 데도 몇 년간 훈련을 해야만 했다.

반면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운다는 유목민들은 양을 키우고, 말 타고 사냥하는 것 자체가 바로 전투기술이 되었다. 칭기즈칸도 툭하면 부족들을 끌고 사냥을 나가 놀면서 군사훈련을 했다. 15살 소녀부터 60살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성원 대부분이 바로 전투전력이 되었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궁기병이 되지만 농경민들은 고도의 훈련을 해야만 궁기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경민들이 유목민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총력전이 아니라면 보통 농경민들은 인구 중 1%를 훈련된 군사로 활용할 수 있었다. 반면 유목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바로 최강의 궁기병으로 전용 가능한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니 전체 인구수로 따지는 전력 차는 별 의미가 없었다.

말을 이용한 신속한 기동전과 전격전은 농경민들이 구사하기 힘들었다. 칭기즈칸과 맞섰던 금나라나 호라즘은 훨씬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넓은 땅을 지키느라 전력을 한곳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작은 병력으로도 신속한 기동전으로 수 배, 수십 배의 적을 각개격파했다.

400년 뒤 병자호란 때 인조를 구하기 위해 모여든 조선 보병 4만여 명은 경기도 광주 대쌍령리에서 청나라 기병 300명과 마주쳤다. 17세기 초 조선의 인조는 정묘호란에서 쓰라린 패전을 당하고도, 세상 물정 모르고 청나라를 도발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3만 기마병은 압록강을 건너고, 신의주에서 단 5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고, 크게 당황한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가려던 발길을 돌려 비축식량이 없던 남한산성으로 서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기병들은 전격적 전략으로 유명한 롬멜의 기갑사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치고 내려왔던 것이다.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했지만 훈련이 제대로 안 되었던 조선의 4만 조총수는 단 300명에 불과한 청나라 기병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한편,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긴 유럽은 대서양으로 진출해야만 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말을 앞세운 유럽 군대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갔다. 스페인의 하급전사 에르난 코르테스는 불과 말 열몇 필과 군사 수백 명을 데리고 겁에 질린 아즈텍 사람들을 학살하고 멸망에 이르게 했다.

※ 김정웅 -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310호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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