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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42) 거대한 병영국가 몽골제국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부족 연합체 수준의 몽골제국을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 서북부의 몽골족을 일컫는 몽골이라는 이름은 몽골고원의 모든 부족을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부족 연합체 대신 대몽골이라는 거대 단위를 만들었다. 기마전사들은 십호, 백호, 천호, 만호 단위로 조직되었고, 이 조직은 기존의 씨족과 부족 중심의 시스템을 해체했다. 누구도 자신이 속한 만호에서 벗어나 다른 만호로 들어갈 수 없었고, 만호의 지휘관들은 친위대인 케식에서 뽑아 썼다. 십호(10명)와 백호(100명)는 부족 단위로 조직되었지만, 천호(1000명)와 만호(1만 명)은 반드시 각기 다른 부족 출신의 십호와 백호들로 구성되도록 했다. 이런 부대는 동고동락하는 집단이 되어 전우애를 바탕으로 전투력을 극대화하면서도 부족적 분열성을 군대를 통해 융화한 것이다. 이것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법가 군주들이 처절한 전쟁 과정에서 관철한 병농일치제(군산일치제)를 초원에서 병목(兵牧) 일치로 재현한 것이다. 1246년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을 방문한 프란체스 교회의 수도사 카르피니는 “명령 없이 퇴각하는 자, 약탈을 위해 대오를 이탈한 자를 가차 없이 사형한다”라고 전했다. 그들은 보병처럼 십진법 단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함께 전진하고 함께 퇴각했다. 말에서 떨어진 동료를 되찾지 않은 자는 군법으로 처단했고, 심지어 군대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 호장들의 아내와 자식까지 죄인으로 간주했다.

몽골제국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려면 신속한 정보 전달과 의사결정이 중요했다. 요즘의 인터넷이라 할 수 있는 역참제가 몽골제국의 혈관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중앙을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30~40㎞마다 역참을 설치해 운영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5㎞마다 칸의 소식과 명령을 전달하는 파발을 두어 아무리 먼 거리도 며칠 내에 칸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칭기즈칸이 설치했던 역참은 현대의 인터넷처럼 정보 시스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속도를 중시하고, 그의 통치 영역에 거미줄 같은 역참을 설치함으로써 소수 민족이면서도 거대 제국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파발마가 전쟁 소식을 전하러 하루 105㎞를 달렸다고 하는데, 몽골 군대는 호라즘 제국을 정복할 때 하루에 134㎞를 이동했다. 그러니 조선 파발이 전쟁 소식을 전하기도 전에 몽골 군대가 들이닥쳤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유럽 원정 때 몽골 파발마가 하루에 352㎞를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헝가리 평원의 전쟁터에서 몽골고원까지 일주일에 주파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몽골제국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도 4일 정도면 몽골군의 전령이 고려 전장터의 소식을 카라코룸에 전달했을 것이다.

조직문화 측면에서 성과의 공정한 배분도 몽골군이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전리품은 집단 사냥에서 잡은 동물처럼 계급에 따라 모든 몽골군에게 분배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황동 단추 하나, 은 조각 하나까지 정확한 공식에 따라 나누었다. 그 공식은 칸에게 가는 10%에서 고아나 과부에게 가는 일정한 몫까지 빈틈없이 규정해두었다. 또 칭기즈칸은 900년 전에 정교한 현대식 성과급 제도를 만들어냈다.

몽골 통일 후 반포되었던 일종의 율법인 ‘야사’에는 “칭기즈칸께서는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 먹으려면 다른 사람과 같이 먹어야 한다. 또 전우보다도 많이 먹는 것을 금지한다”고 적혀 있다.

인류학자 공원국 박사는 “몽골 기마군단의 군법은 글자 하나도 다르지 않은 진시황의 군법이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까지 이런 군법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대규모 기마군단은 없었다. 몽골제국은 유목제국 선배들의 행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거란은 확고한 대형을 가진 10만 기병을 길렀지만 여전히 부족 중심의 동원체제를 유지했다. 초원에서 만호(투멘)를 최고 단위로 하는 군제 역시 역사가 길지만 부족의 전투 시 명칭일 뿐이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전투 대형인 만호를 방목 단위로 만들어냈다. 친위대(케식)는 여러 부족(씨족)에서 뽑은 용사들인 동시에 인질이었다. 결국 그가 만들어낸 제국의 핵심은 거대한 병영이었다.

스폰지처럼 전쟁 기술을 빨아들인 몽골제국


▎1207년의 몽골제국.
우리가 배운 농경 정주민의 역사에서는 유목민들이 농경민을 침략하는 ‘악의 무리’로 묘사되지만, 유목민들에게도 농경 정주민은 가혹했다. 칭기즈칸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중국의 농경민에게서 아무 거리낌 없이 배웠다. 단순히 베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고난한 삶의 여정에서 배운 생존철학, 거기에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를 창의적으로 결합해 역사상 최강의 군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몽골 기마군단은 잔인한 전쟁 기계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현대사회 못지않은 강력한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고, 팍스 몽골리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몽골 군대의 중기병은 무명으로 된 갈색이나 청색 겉옷(칼라트, kalat) 가슴 부분에 소가죽이나 미늘을 대고 칠을 입힌 가죽을 덮어 만든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미늘 갑옷과 쇠사슬 갑옷은 중국, 서방과 전쟁을 치른 후에야 몽골군에 도입되었다. 서하와 첫 전쟁(1207)을 치른 후, 칭기즈칸은 군대에 비단 속옷을 도입했다. 비단속옷은 오늘날 방탄조끼 같은 역할을 했는데, 화살에 맞아도 화살촉이 비단에 감기면서 침투 속도가 느려져 부상의 심각성도 덜했다.

칭기즈칸 이전에도 유라시아 농경 정주민들은 수천 년간 유목민들과 전쟁을 해왔지만,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에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첨단 전쟁 기술이다. 새로운 패권은 새로운 기술이 좌우한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머나먼 원정에서 적은 병력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민첩한 기동력과 기술뿐이다. 칭기즈칸의 이름인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해석도 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단은 전통적인 유목 군사기술을 개량해 소형 활, 화살촉과 휘어진 반월도, 개선된 안장과 등자를 만들어냈다.


▎약 10㎏인 칭기즈칸 시대 갑옷과 철모. 칭기즈칸 마동상 박물관 소장.
몽골 기마군단은 초원에서는 펄펄 날았지만 농경민 군대가 성 안에서 지구전을 시작하면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몽골군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점령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장인과 기술자를 찾아내 데려갔다. 투항하는 기술자는 특별대우를 했고, 포로 중에서도 기술자, 장인들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 포로들 가운데 기술자를 가려내 몽골군에 편입해 공병대를 편성했으며, 새로운 전투와 정복을 할 때마다 전쟁 기계로서 그들의 성능은 향상되어갔다. 목수, 대장장이, 농업 기술자, 방직 기술자 등이 많을 때는 수천 명씩 포로로 몽골로 끌려갔다. 칭기즈칸은 기술을 몰랐지만, 기술이 있어야만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칭기즈칸이 몽골 부족들을 통일할 때는 주로 기병에 의존했지만, 금과 서하, 호라즘을 공격하면서 포병을 조직했으며 무기 면에서도 전통적인 유목 기병의 칼과 활에서 벗어나 공성 기계와 화기 등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금과 서하의 신기술을 흡수했다.

칭기즈칸은 서하(탕구트) 원정 때부터 중국의 공성 무기를 도입했다. 중국에서는 수천 년 사용되었던 공성 무기였지만 초원에서 온 몽골군에게는 낯선 무기였다. 이 공성 무기를 가지고 금나라, 호라즘, 이슬람제국을 공격할 때 본격적으로 써먹었다. 1214년 칭기즈칸의 금나라 침공 중 금나라 병사 상당수가 몽골에 투항했는데 이 중 다수가 공병대, 포병 소속이었다고 한다. 금이 보유하고 있던 공성 기술, 화약 기술과 시설을 포함해 상당수 기술자를 몽골로 끌고 갔다. 몽골군은 이들에게서 투석기, 대포, 초보적인 로켓 등 선진적 공성 기술을 전수받았다. 1214년 칭기즈칸은 대장 목화려도(木華黎挑)로 하여금 전사 500명을 선발해 포병부대를 편성하고, 금나라와 서하에서 노획한 대석포(大石砲)로 무장했다.

‘창을 쏘는 기계 3000개와 노포(弩砲), 즉 화살을 쏘는 일종의 대포 300개,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700개, 사닥다리 4000개, 돌을 던지는 장치 2500개’

몽골 기마군단이 이란에 있던 니샤푸르라는 도시를 공격할 때 동원한 무기 목록이다. 이 정도 수준의 장비면 요즘의 포병, 공병, 보병, 기갑병이 복합 편성된 규모다. 1219년 호라즘 원정 때는 신기술로 무장한 몽골군 포병부대와 공병부대가 맹활약했다. 1231년 호라즘을 정복한 몽골군은 기술자와 장인을 6만 명이나 잡아들였다고 한다. 그들을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롬으로 데리고 가 기술자 집단촌을 만들었다. 기술자와 장인들은 거기서 대접받고 살면서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해냈다. 1241년 몽골군이 폴란드를 공격할 때, 폴란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몽고군은 요술을 부려서 큰 깃발을 흔들 때 X형의 머리에 입에서 연무를 토하는 괴물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참기가 어려웠으며 폴란드 병사가 이를 직시할 수 없어서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몽골제국 기마군단은 말만 잘 타고 화살만 잘 쏘아서 세계 최강의 강군이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당대의 첨단 전쟁 기술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였기 때문에 세계 최강이 되었다. 반도체산업의 역사를 보니, 냉전시대의 군사기술에서 탄생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은 무역전쟁, 기술전쟁, 금융전쟁인 동시에 중국의 대만 침공과 같은 대규모 첨단 전쟁을 염두에 두고 벌어지고 있다. 21세기의 전쟁은 반도체의 연산력(Computing Power)이 센 나라가 이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남한에는 다행스럽게도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생산기술과 파운드리 생산기술이 있다.

※ 김정웅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자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겸임교수. 30여 년간 5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의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기업 간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다가 폐업 위기를 겪었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해 전화위복을 이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레거시 장비를 전 세계에 5만 대 넘게 판매하며 서플러스글로벌을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과 2021년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Autism Expo를 개최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2312호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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