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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이탈리아 베로나(VERONA)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베로나는 쾌적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도시환경을 자랑하며, 고대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다. 이 도시는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제피렐리에 의해서도 ‘불멸의 사랑’의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베로나의 심장 에르베 광장. / 사진:정태남
아디제(Adige)강은 베로나의 심장부를 휘감고 흐른다. 강 건너 언덕 위에서 높이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베로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속 장면들을 떠올린다. 그중 로미오의 절규를 음미해본다.

“베로나의 성곽 바깥에는 세상이 없고, 연옥(煉獄)과 고문이 있는 곳, 바로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 이곳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이고, 세상으로부터의 추방은 곧 죽음뿐입니다.”

유서 깊은 고도(古都)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 베로나는 인구 25만 명 정도의 소도시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서쪽으로는 밀라노, 동쪽으로는 베네치아, 남쪽으로는 볼로냐, 피렌체, 로마로 통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다. 게다가 쾌적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도시환경을 자랑하며 고대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기도 하다.

베로나의 중심 지역은 『로미오와 줄리엣』 에서 언급된 중세 성곽과 아디제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서는 반원형 극장 아레나(Arena)를 비롯하여 아디제강 인근에 세워진 반원형 극장 유적 등 2000년 전 로마제국시대의 흔적을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베로나의 심장인 에르베 광장(Piazza delle Erbe)은 고대 로마의 공공 광장으로, 정치ㆍ경제ㆍ종교의 중심이 되던 포룸(Forum)이 있던 자리다.

한편 아레나는 음향이 뛰어나기 때문에 1913년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페라 [아이다]를 무대에 올린 이래로 수준 높은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레나 다음으로 유명한 로마시대의 유적은 아디제강 건너 언덕 기슭에 있는 반원형 극장이다.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세워진 이곳에서 여름이 되면 무대를 설치하여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공연하는데,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는 단연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 막이 오르기 전, 해설자가 다음과 같이 이 극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지 미리 말해준다.


▎아디제강 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베로나 시가지. / 사진:정태남
“세도 있는 두 가문이 아름다운 베로나를 무대로 하여 오래 쌓인 원한으로 또 싸움을 일으켜 평온한 시가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이 두 숙명적인 원수의 배 속에서 불우한 한 쌍의 연인이 태어납니다. 이들의 사랑은 불행하고 불우한 파멸인 죽음으로 끝나고, 두 가문의 갈등도 끝납니다.”

해설자는 이 극의 배경이 어디인지 확실히 밝히지만 시대적 배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황을 봐서 13세기이다. 왜냐면 당시 베로나에서는 귀족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곳곳에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혼란스런 베로나를 평정해간 가문은 스칼리제리(Scaligeri), 일명 스칼라(Scala)였다. 이 가문은 1387년 밀라노에 패배할 때까지 거의 130년 동안 베로나를 통치하면서 이곳을 한때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듯, 현재 베로나 중심가에서 눈에 띄게 아름답고 품위 있는 건축물들은 바로 스칼라 가문이 세운 것이다. 한편 『로미오와 줄리엣』 에 등장하는 베로나의 군주 에스컬러스(Escalus)는 다름 아닌 스칼라 가문의 군주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탄생


▎로마제국 시대의 원형극장 ‘아레나’ / 사진:정태남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 을 쓴 시기는 1591~1595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베로나에 얼마 동안 있었길래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도 그가 처음부터 만든 것이 아니다. 사실 셰익스피어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새롭게 지어내기보다는 주어진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재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즉, 그는 다른 작품에서 소재를 빌려와 자기 의도에 맞추어 그것을 자르고, 붙이고, 늘리고, 빈틈을 메우곤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도 예외가 아니다.

베로나를 배경으로 이런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 을 쓰기 60여 년 전인 153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명은 『로미오와 줄리엣』 이 아니라 『줄리엣타와 로메오』 였는데 작가는 베로나의 이웃도시 비첸짜 출신의 루이지 다 포르토(Luigi da Porto)였다. 그의 작품은 베로나의 두 가문 사이의 불화를 소재로 했는데, 두 가문의 이름은 카풀레티(Capuleti)와 몬텍키(Montecchi), 비극의 주인공은 로메오(Romeo)와 줄리엣타(Giulietta)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는 몬태규와 캐퓰릿,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탈리아의 사제이자 작가인 반델로(M. Bandello)에 의해 다시 쓰여져 1554년에 출간되었다. 그 후 이 작품의 프랑스어 번역판이 1562년경에 영국 시인 브루크(A. Brooke)에 의해 운문으로 손질되었고, 30여 년 후 셰익스피어는 이것을 5막의 희곡으로 바꾸면서 극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첨가하여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조해냈던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손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로미오와 줄리엣』 이 불멸의 사랑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20세기에 여러 감독이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중 1968년 이탈리아의 프랑코 제피렐리가 만든 영화가 단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현장


▎줄리엣 집 안에 재현된 줄리엣의 침실. / 사진:정태남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 베로나는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제피렐리에 의해서도 ‘불멸의 사랑’의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베로나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과 비극을 보여주는 현장이 더러 있다. 로미오의 집, 즉 몬텍키 가문의 저택은 스칼라 가문의 묘소가 있는 거리에 있고, 줄리엣의 집, 즉 카풀레티 가문 저택은 베로나의 중심인 에르베 광장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골목에 있다.

줄리엣의 집을 찾는 ‘사랑의 순례자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줄리엣 동상 앞에서, 또 로미오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는 줄리엣의 발코니 아래에서, 또는 줄리엣의 집 안에 있는 당시의 실내장식과 제피렐리가 감독한 영화에서 사용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의상과 소품들을 둘러보면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런데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가슴이 유별나게 반질반질하다. 그것을 만지면 사랑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 때문이란다. 가슴을 만지는 사람들은 물론 주로 남자들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순례’의 마지막 코스는 중세 성곽 밖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이다. 수도원 지하 입구에는 셰익스피어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희미한 불빛이 켜진 지하실에는 줄리엣의 대리석 관이 있는데 관은 텅 비어 있다. 이 빈 무덤은 비극과 비탄의 상징물이기도 하지만, 평화와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줄리엣 동상과 줄리엣의 발코니. / 사진:정태남
그런데 베로나에 로미오의 집, 줄리엣의 집, 줄리엣의 관이 있으니 로미오와 줄리엣이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 루이지 다 포르토는 두 앙숙 가문의 이름을 단테의 『신곡』 중 ‘연옥 편’에 등장하는 몬텍키와 카펠레티를 차용하여 몬텍키(Montecchi)와 카풀레티(Capuleti)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이 두 가문이 베로나에서 서로 싸웠다고 했으나 그들의 아들이나 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두 연인이 실존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이야기는 13세기의 베로나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사건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을 토대로 창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럼에도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현장을 직접 한 번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베로나로 몰려오고 있다. 사실 줄리엣의 집은 폐가가 된 13세기 저택을 20세기 전반에 복원한 것이다. 이야기의 현장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줄리엣의 집이나 발코니, 로미오의 집, 줄리엣의 무덤이 모두 ‘가짜’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꿈같은 이야기에서 꿈을 찾을 뿐이다.

※ 정태남 -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312호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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