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48) 

기호 – 어떤 것을 설명하는 다른 것 

19세기 기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기호(Sign)를 3가지로 분류했다. 도상(Icon)과 지표(Index), 상징(Symbol)이다. 예술 작품의 도움을 받아 난해한 기호학에 한 걸음 다가가보자.

▎루이즈 비제 르 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1783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기호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장미의 이름] 저자로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는 대표적인 기호학자로,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고 표현하는 인간세계의 모든 흐름은 기호의 만들어냄(생산)과 기호를 읽음(소비)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기호에 대한 연구의 시작은 플라톤이 [크라틸로스]에서 다룬 언어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본격적으로 기호학의 문을 연 초기 학자는 존 로크였다. 존 로크 이후 기호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이어졌다. 하나는 스위스 기호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서 유래했고, 다른 하나는 미국 철학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rice)에서 유래했다.

소쉬르에 따르면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한 가지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신적·추상적 개념인데 이것을 기의(記意, signified)라 부른다. 기의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머릿속에 또는 가슴속에 들어 있는 정신적 ‘의미’이기 때문에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의미의 운반체가 필요하다. 의미의 운반체를 기표(記票, signifier)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딸기’라고 표기된 한글의 기표 안에는 빨갛고 달콤하고 신선한 과일 딸기의 이미지, 즉 딸기의 기의가 담겨 있다. 같은 기의도 영어권에서는 ‘strawberry’라는 다른 기표 안에 담기게 된다.

퍼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상징의 관계를 연구했다. 기호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어떤 것’과 ‘다른 것’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퍼스의 도상, 지표, 상징이다.

도상(Icon): 유사한 이미지


▎빈센트 반고흐 [슬퍼하는 노인] 1890
도상은 1차원적인 기호에 가깝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대상과 닮은 외형적 모습으로 글씨를 만들었고, 미술 분야에서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초상화가 도상적 기호에 해당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속 인물은 실제 대상과 닮아 있다. 아이콘은 대표적인 도상이다. 무언가를 간단하게 표기했지만 닮아 있다. 집을 표현한 아이콘에는 삼각 지붕에 네모난 벽과 문, 창문이 그려져 있다. 집과 닮았고, 누가 보아도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가가 그린 강아지와 꽃은 실제 대상과 닮아 있는 하나의 기호다.

그런데 닮게 표현된 것은 아무리 닮게 표현해도 그 실제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극사실주의 화가가 500cc 생맥주를 유화로 정밀하게 묘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와~ 오늘같이 더운 날씨에는 퇴근하고 시원한 생맥주가 너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고 군침이 돌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지각한 것은 노란색과 갈색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혼합된 형상이며, 시원함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느끼는 공감각이다.

도상기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보들을 선별하고, 기존 경험에 근거하여 또 다른 체계로 묶게 되며, 기호의 본질보다는 스스로 지각한 구조 그 자체와 연결한다. 결국 도상기호는 실제 대상의 특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각 조건의 일부분만 재현한다. 그럼 진짜보다 더 잘 그리면 대상이 본질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화가의 그림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사진으로 찍은 생맥주라 하더라도, 축축함과 시원함이라는 감각은 재현되지 않으며, 그림 속 맥주는 안료로 그린 맥주일 뿐 그 본질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표(Index): 인과관계와 근거


▎알브레히트 뒤러 [코뿔소] 1515
지표기호는 인과관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고양이의 발자국이 자동차 위에 찍혀 있는 모습을 보면 ‘고양이가 내 차 위를 지나갔구나’라고 이해하게 된다. ‘고양이가 이곳을 총총 걸었구나, 여기에서 저기까지는 점프를 했구나’와 같이 지표기호를 보고 인과관계를 추측한다.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북받치는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혹은 어떤 질문에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것을 보고 ‘지금 주제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있구나’와 같이 유추할 수 있다. 낙엽이 지면 ‘가을이 왔구나’,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면 ‘눈이 왔구나’와 같이 원인과 결과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지표다.

반고흐의 [슬퍼하는 노인]을 보았을 때 ‘노인에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약 300년 무렵 아테네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저절로 발생하는 자연적 기호와 의사소통 목적으로 사용되는 규약적 기호의 차이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스토아 학파가 대표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의학적 증상이었다(예: 얼굴이 빨개짐 → 열이 난다). 어떤 기호를 보고 추측하는 것, 퍼스는 이것을 지표라는 범주에 넣었다.

상징(Symbol): 약속과 규칙

추상미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림 속에서 늘 찾았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대상을 인지하면서, 자연-대상을 그대로 옮겨 재현하는 도상에서 벗어나 대상과 표현된 이미지의 관계를 점차 끊어나갔다. 즉, 이미지를 추상화하기 시작했다. 추상화는 새로운 상징의 시각적 발현이었다.

상징은 인간이 임의로 만든 것이다. 도상과 지표는 자연 상태로도 존재하나 상징은 인간만 만든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 책 속의 문장, 숫자, 그림, 기업의 로고 등이 상징기호이다. 실제로 닮은 부분이 없더라도 내 안에서, 혹은 우리끼리 약속하여 임의적으로 만든 것이기에 규칙이자 약속이다. 상징기호와 대상체 간의 유사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숫자 5는 실제 다섯 개의 그 무엇과도 관계없으며, 알파벳 abc 역시 실제 세상과 닮은 점이 전혀 없다.

기호의 자의성

우리는 기표와 기의가 짝을 이루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이러한 기표들은 왜 해당 기의와 연결될 수 있었을까?’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생각해봐야 한다. 기호학자들은 이 둘 사이에 필연적이거나, 본질적이거나 직접적인 어떤 관계도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소쉬르가 강조한 기호의 자의성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으며, 기표와 기의가 결합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단지 그렇게 사용하도록 한 문화권에서 자의적으로 정해졌을 뿐이다.

기호의 자의적 특징은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기호가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의 언어권에서도 단 하나의 기표가 여러 개 기의를 가질 수 있고, 하나의 기의가 여러 개 기표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일의 종류인 ‘사과’는 모래 사(沙)를 사용하는데, 사과의 질감이 거칠고, 모래 빛을 띠고, 한자에 삼수변(氵)이 들어간 것이 과즙이 많음과 일치하여 사과라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이를 ‘apple’이라고 칭하며 일본에서는 ‘りんご(링고)’라는 단어를 쓴다. 같은 기의를 나타내는 기표가 모두 다른 것이다. 또 한글 ‘사과’는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낙엽교목 식물인 사과나무의 열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고 용서를 빈다는 의미도 있다. 같은 기호가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현상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소쉬르가 강조한 기호의 자의성이다.

기호가 자의성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가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한 것도 온전히 자의적이다. 예를 들어 부정적 자기표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자기표상은 주요 타자들과의 대인관계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화된 자신에 대한 생각, 느낌, 감각, 기억, 의미를 말한다. 즉, 정신적 표상이다. 표상은 합리적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으나, 오랜 시간 굳어진 것이라 그냥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참과 거짓 여부에 상관없이 그 명제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에게 ‘쓸모없고 한심한 아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부모의 말을 내재화하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적 상식에 갇혀버린다.

개인적 상식(personalized common sense)은 진실이 아니지만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하여 어떠한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확신을 의미한다. 상식은 특정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 반복적으로 문화와 지식을 습득하면 이를 기본 교양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개념이다. 상식은 상식이니까 되묻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식의 함정이며, 많은 사람이 이런 개인적 상식이 참인지 확인하지 않고 살아간다. 당연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독일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 뒤러가 그린 [코뿔소]에는 갑옷처럼 생긴 옷을 입고 있는 코뿔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반려견이 겨울옷을 입듯 철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 물고기의 비늘과 같은 피부 표현은 지금 우리의 눈에는 사실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동시대 탐험가나 동물학자들이 코뿔소를 지면에 게재할 때, 이 그림을 200년 넘게 삽화로 사용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코뿔소를 대부분 직접 본 사람들이었지만 코뿔소의 가죽 표면과 그림의 일부 특징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이 그림을 코뿔소의 모습이라 선택하고 믿어왔다. 그리고 이 믿음을 깨고 나오는 데 200년이 걸렸다.

부모에게 ‘쓸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고 학습되어온 사람들은 그 모습이 자신에 관한 진실이라고 믿는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 자아상은 개인적 상식이 되어 그냥 그렇게 당연히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살게 된다. 그런데 ‘쓸모없는 아이’는 눈에 보이는 형상이 없다. 그냥 나의 부분이라 자연스럽게 생각해왔기에 떼어내지도 못하고 바꾸는 방법도 모르는 것이다. 심리치료 과정에서는 사람들이 그동안 진실이라 믿어왔던(그러나 사실이 아니며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세계를 이미지로 시각화하고, 자신의 비합리적 신념이 복제된 도상을 바라보고, 머무르고, 음미하고, 덮고, 안아주고, 부수고, 뒤집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규약적 도상이었던 부정적 자아상을 긍정적 모습으로 바꾸는 새로운 방법을 학습하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정의 내린 틀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재한다. 쉬운 용어로는 이것을 자아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가 정의 내린 나의 의미들이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또는 참인지 확인하는 데 시간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지금, 그동안 참이라고 믿어왔던 나의 가치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수정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402호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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