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선승 잇큐(一休)의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벚나무 가지를/부러뜨려 봐도/그 속엔 벚꽃이 없네/그러나 보라/봄이 되면/얼마나 많은/벚꽃이 피는가’. 겨울의 깊은 침묵 속에서도 생명은 약동한다.
▎빈센트 반고흐 <꽃핀 아몬드 나무> 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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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멈춤의 계절이다. 차가운 바람은 모든 것을 웅크리게 만들고, 땅은 얼어붙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자연은 숨을 고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땅 아래에서는 새싹이 움트고, 나무는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묵묵히 힘을 기른다. 삶도 그러하다. 때로는 주저앉은 것 같고, 멈춘 듯한 순간이 찾아와도 그 안에는 다시 일어설 힘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다.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겨울을 지나 찾아온다. 그 겨울은 차갑고 무겁지만, 우리에게 더 깊이 내면을 돌아볼 시간을 준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잠시 멈춘 것 같았던 이 시간들이 쌓여, 결국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긴 어둠이 지나고 빛이 찾아오면 우리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향으로. 시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것은 아주 작고 조용한 움직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모여 우리를 봄으로 데려다준다.지금, 나는 어떤 시작을 준비하고 있을까. 웅크렸던 마음을 조금씩 펴며, 다시 걸음을 내디딜 시간이다. 겨울이 길었던 만큼, 봄은 더 따뜻하게 찾아올 것이다.
겨울을 지나고 처음 피는 꽃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고흐의 <꽃 핀 아몬드 나무>는 새하얀 꽃망울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두꺼운 붓 터치로 표현한 나뭇가지는 견고하게 뻗어 있지만, 그 위에 매달린 꽃들은 섬세하고 가벼워 보인다. 가지마다 피어난 꽃들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막 움튼 생명처럼 희망과 밝음을 가득 품고 있다. 아몬드 나무의 꽃은 서양에서 봄을 알리는 첫 번째 신호이자, 차갑고 긴 겨울을 이겨낸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서 매화가 겨울을 견뎌낸 후 가장 먼저 꽃을 피우듯, 아몬드 나무도 혹독한 계절을 지나 다시 태어나는 봄의 시작을 알린다.이 그림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겨울의 어둠과 고요가 길어질수록 그 끝에서 피어나는 꽃은 더욱 눈부시다. 누구나 인생의 겨울을 지나며 지쳐 있을 때가 있다. 아무리 움츠리고 웅크려 있어도,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이 아몬드 꽃이 보여준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뿌리는 더 단단해지고, 언 땅을 뚫고 피어난 꽃은 더욱 강인하다.지금 나의 겨울이 얼마나 길고 힘들었든, 그 끝에서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다. 이 작은 꽃망울처럼, 희망은 조용히 우리 곁에 찾아오고 새로운 시작을 알릴 준비를 하고 있다. 차가웠던 계절을 지나 내가 피워낼 꽃은 어떤 모습일까?
태양을 품은 꽃의 의지
▎구스타프 클림트 <해바라기> 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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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하면 많은 사람이 반고흐의 강렬하고 거친 노란색 꽃을 떠올리지만, 구스타프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조금 다르다. 클림트의 그림 속 해바라기는 마치 하나의 인물처럼 우뚝 서서, 푸른 배경과 주변의 꽃들 속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끝까지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굵고 단단한 줄기, 풍성한 잎사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해바라기는 강인한 생명력과 함께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아낸다.그 아래를 가득 메운 작은 꽃들조차 해바라기의 주변에서 함께 생동하며, 서로를 빛내는 생명의 순간을 담아낸다. <꽃핀 아몬드 나무>가 겨울을 견디고 처음 꽃을 피워낸 희망을 이야기했다면, 이 해바라기는 이미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다. 끝없는 노력 끝에 마주하는 성취의 순간, 혹은 어두운 시간을 이겨내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 힘찬 발걸음 말이다.때로는 지치고 힘든 날들이 우리를 찾아올지라도, 클림트의 해바라기처럼 조금씩 고개를 들어보자. 작은 희망이라도 가슴속에 품고 있다면, 그 힘이 우리를 다시금 태양이 비추는 자리로 데려다줄 것이다.
빛이 닿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하루
▎에드워드 호퍼 <아침 햇살> 1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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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 햇살>은 고요한 방 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그녀를 비추는 따뜻한 햇빛은 방 안의 침묵을 깨고,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장면은 마치 어제의 무게를 내려놓고 오늘을 다시 시작하려는 한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녀는 아직 가만히 앉아 있지만, 그 얼굴에서는 단호하면서도 고요한 힘이 느껴진다.이 그림은 말한다. 빛은 언제나 어둠을 지나 다시 찾아오고, 새로운 하루는 그렇게 우리 앞에 주어진다는 것을. 때로는 일어나기 힘든 날도 있고, 변화의 문턱에 서서 망설일 때도 있다. 하지만 창가를 비추는 아침 햇살처럼, 시작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둠 속에 웅크렸던 어제를 지나, 따뜻한 빛이 닿는 오늘의 첫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다시 나아갈 준비를 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괜찮다.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바라보고, 차분하게 시작을 준비하는 것도 또 다른 시작의 한 모습이다. 오늘 창가를 비춘 그 햇살처럼, 나의 하루에도 다시 작은 빛이 스며들기를.
새로운 길을 향해, 안개의 너머로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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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산 정상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끝없이 펼쳐진 안개와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장면을 그렸다. 그는 비로소 높은 곳에 올랐지만, 그 너머의 풍경은 여전히 뿌옇고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기보다는 안개 너머를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갈 다음 발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생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을. 더 멀리 펼쳐진 세상, 더 높은 목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시작은 늘 불안하고 어둡지만, 그 길을 뚫고 올라선 후에는 더 넓은 시야와 새로운 도전이 주어진다. 안개는 모든 것을 가리지만, 그 너머에는 분명 또 다른 길과 가능성이 존재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출발선일 수도 있고 잠시 멈춘 쉼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마음과 나아가려는 의지다. 길이 뚜렷하지 않아도, 끝이 보이지 않아도 한 걸음 더 내디뎌보자. 언젠가 안개가 걷히고 내 앞에 더 크고 찬란한 세상이 펼쳐질 테니까.
시작을 잇는 시간들겨울을 지나 처음 피어나는 꽃,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 해바라기, 창가에 앉아 아침 햇살을 맞는 여인, 그리고 안개 속에서 길을 바라보는 방랑자. 이 네 작품은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시작’을 이야기한다. 반고흐의 <꽃핀 아몬드 나무>는 차갑고 고된 겨울을 뚫고 피어난 작은 꽃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겨울이 깊을수록 뿌리는 더 단단해지고, 꽃은 더욱 눈부시게 피어나는 법이다.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생명력을 담았다. 그 꽃이 서 있는 자리엔 고단했던 시간과 흔들림이 있지만, 결국 태양 아래 당당히 빛나고 있다.에드워드 호퍼의 <아침 햇살> 속 여인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맞으며 조용히 오늘을 준비한다.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도 새롭게 시작될 하루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다시 나아갈 힘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정상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눈앞에 펼쳐진 안개의 풍경을 마주한다. 안개 너머 미지의 세계는 불확실하지만, 그곳엔 또 다른 가능성과 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우리는 살아가며 각자의 계절을 지나간다. 어떤 날은 겨울처럼 차갑고 막막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낸 후엔 반드시 봄이 찾아온다. 때로는 태양을 향해 단단히 뿌리내리고, 때로는 고요히 앉아 나를 돌아보고, 때로는 안개 속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우리의 시작을 만든다.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 나는 어떤 시작을 준비하고 있을까. 겨울의 끝자락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나만의 봄을 맞이할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다. <치유미술관> 외 19권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