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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① - “카라얀의 호흡과 손길이 내 노래 빚어냈다” 

소프라노 조수미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음악과 테크놀로지, 예술과 비즈니스 융합한 마에스트로…황혼을 함께한 제왕에게 배운 예술혼의 절정

▎조수미의 음악적 성공은 뛰어난 재능과 끝을 모르는 노력, 그리고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체화한 유연한 흡수력에서 비롯됐다.
예술가의 생애에는 ‘비등의 순간’이 있다. 타고난 재능과 열정, 피나는 노력이 화려한 꽃으로 만개하는 순간에는 그를 이끈 위대한 스승의 모습이 보인다. 마에스트로의 후광 속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또 한 명의 마에스트로. 세월이 흘러 잔영이 희미해져도 그 영감은 강렬하다. 한국 예술사의 걸출한 천재들이 만났던 스승과 멘토, 그 위대한 계승과 소통의 순간을 포착한다. - 편집자

소프라노 조수미와의 인터뷰는 2월 23일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이뤄졌다. 그가 급거 귀국한 이유는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 때 바리톤 최현수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월간중앙>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의 기획 취지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그의 음악 멘토,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추억하는 일은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2∼3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의 뇌수에 꽂힌 카라얀의 음악적 영감과 카리스마의 잔상은 강렬한 것이었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음악적 스승은 무수히 많다. 그중 가장 중요한 3명을 꼽는다면 선화예중·고 시절의 유병무 선생, 서울대 음대 시절의 이경숙 선생, 그리고 지휘자 카라얀이다. 유병무 선생은 조수미에게 합창의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학창시절부터 그는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동시에 그는 음악적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친구들과 함께 노래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는 “유병무 선생에게 합창단원으로서의 책임감과 리더십,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눈치’를 배웠다”고 말했다.

‘첫 사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대학시절

서울대 이경숙 교수는 고3 시절 레슨을 받으며 처음 만난 은사다.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로, 그는 조수미의 음악 인생을 향도했다. 이 교수는 조수미가 세계 정상의 성악가로 성장할 가능성을 일찍부터 예감했다. 서울대 1년을 마친 조수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하고 성사시킨 배경에도 이 교수의 선견지명이 있었다.

“프리마돈나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주 고귀한 아우라와 컬러풀한 개성을 가진 분이었죠. 그러나 정작 이 교수에게 배운것은 음악에 대한 겸허함이었습니다. 음악이란 절대 재능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지요. 그 분에게는 음악이란 결국 노력의 결정체라는 평범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처음 오디션을 받을 때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의 노래를 꼼꼼히 들었던 이 교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래를 마치고 잔뜩 긴장한 조수미를 꼭 안아주며 그 놀라운 재능을 칭찬했다.

“선생님은 늘 가사가 가진 중요성, 자연스러운 발음과 발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부지불식간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자연스러운 가사가 리듬을 타고 몸 밖으로 흘러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도 가장 중요한 노래의 원칙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울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뒤 학업과 레슨에 충실하지 않은 저를 엄하게 꾸중하셨죠. 광적인 ‘첫사랑의 늪’에서 제가 헤어나지 못했거든요. 어떻게든 바로잡으시려 했는데, 쉽지 않았을 겁니다. 태만한 태도로 레슨을 들어갔을 땐, 노래를 그만두라며 연구실에서 쫓아낸 적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 조수미는 독일 출신의 세계적 성악가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2006년 타계)가 부른 브람스의 ‘자장가’를 들었다. 아버지가 소장했던 LP음반을 통해서다. 슈바르츠코프를 사사했던 이경숙 교수는 조수미에게 독일 음악의 서정성과 단아하고 견고한 형식미를 맛보게 했다.

“1983년에 찰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슈바르츠코프를 직접 만나 마스터클래스를 받은 적이 있어요. 굉장한 경험이었죠. 슈바르츠코프는 잘 절제되고 기품 넘치는 독일적 프리마돈나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태리 성악을 본격 공부하면서 오페라에 대한 저의 관념이 바뀌었어요.

이태리는 육감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하고 활발하고 또한 절제되지 않은 곳이지요. 기질적으로, 또 음악적으로 저하고 잘 맞은 곳이었습니다. 슈바르츠코프처럼 고귀한 프리마돈나의 모습도 존경했지만, 그때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음악세계는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조수미는 19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1801년에 건립된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1300석)은 이탈리아 4대 극장의 하나로 꼽히는 명소다. 이때의 굉장한 성공이 카라얀과의 만남을 예약해주었다. 카라얀이 살았던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는 국경을 사이에 둔 지척의 거리. 이날 객석에는 카라얀의 비서가 앉아 한 동양인 소녀의 놀라운 목소리를 들었다.

1987년 초 카라얀의 비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찰츠부르크에 와서 카라얀의 오디션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태리의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바리톤 루치오 갈로와 함께였다. 이 두 사람의 성악가는 조수미와 함께 현재 세계 정상의 오페라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고 있는 거장으로 성장했다.

“감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카라얀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짧은 거리였지만 몸이 불편한 카라얀은 슬로비디오 속의 인물처럼 느릿느릿 걸었지요. 황혼같은 제왕의 말년… 그리고 슬프고도 아름다운 황혼이었습니다. 리골레토의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 전주가 흐를 때, 난생 처음 떨린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실감했어요. 다리는 후들거리고 손에는 땀이 배었지요.”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신의 선물


조수미의 노래를 들은 카라얀은 전율했다. “축하하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지? 수미 조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목소리,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신의 선물이야. 그 선물을 잘 갈고 닦아 사람들에게 기쁨을 줘야 해.” 카라얀은 이 ‘불가사의한 사태’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어디서 배웠지? 누구에게 사사했지? 한국에서 배웠다고?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한국에도 그렇게 뛰어난 선생들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대단한 나라야.”

그러면서 카라얀은 자신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의 서울공연 때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카라얀의 부인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남편의 공연을 보다가 핸드백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권과 신분증이 그 안에 들어 있어 난감한 상황.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체념했지만 다음날 핸드백은 고스란히 주인에게 돌아왔다.

카라얀은 처음 만난 조수미에게 “이런 일은 한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한국 사람의 정직함과 순수함을 거듭 칭찬했다고 한다.

“마에스트로는 그날 2년 후 찰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될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오스카 역을 제안했지요. 오스카역은 <리골레토>의 질다와 더불어 라이트 소프라노들이 즐겨 하는 역입니다. 남장을 해야 하고 비록 음악적 흥미는 떨어지지만 줄거리로 볼 때는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꼭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제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었습니다.”

카라얀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럼 그걸 공부해보지. 1989년 1월에 빈에서 녹음이 있을 테니까. 구스타프 완 역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맡을 거야. 아멜리아는 조세피나 바스토우가 맡고. 이왕이면 바흐의 장엄미사곡도 연습해두지. 내년 부활절 기념 페스티벌에서 그걸 해보자고….”

카라얀은 눈을 감고 지휘한다. 한 시간짜리 교향곡은 물론이고 세 시간짜리 오페라를 연주하는 데도 카라얀은 악보 한번 보지 않는다. 완벽하게 외우던 오페라가 50개가 넘는다. 그의 녹음 기술도 거의 지휘 수준이어서 그와 필적할 사람이 없다. 예술과 비즈니스를 접목하고 음악과 테크놀로지를 융합했다.

“그는 재능이나 운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 시절 엄청난 음악적 고행을 겪으며 벽돌 쌓듯 실력과 캐리어를 구축했지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악조건 속에서 음악을 했던 경험이 있어요. 그는 또한 선견지명의 인간입니다. 화가 피카소에게 붙이는 아방가르드(전위)라는 말을 그에게도 붙여야 해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비범한 이해력을 갖고 있었고, 모든 것을 직접 해보고 싶어했습니다. ‘직접’ 말이에요. 실연(實演) 못지 않게 레코딩의 유용성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죠. 그런 측면에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 닮았어요. 1957년 프랑코 제프렐리와 함께 만든 영화 <라보엠>은 지금 봐도 기가 막힙니다. 아티스트인데도 비즈니스를 했어요. 아주 실용적·실천적인 인물입니다.

주빈 메타처럼 지갑을 자주 잃어버리고 계산에 어두운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음악을 운용했지만 그건 자기 마음대로 흔드는 권위적 카리스마와는 달랐습니다. 다재다능한 카리스마라고나 할까…. 현란할 정도로 다양한 탤런트로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며, 그 압도적인 실력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거죠.”


“마에스트로, 노르마는 부를 수 없습니다”

카라얀이 제작한 음반의 퀄리티는 놀랍다. 베토벤 교향곡 전 곡을 세 번이나 녹음했다. 에인절스와 한 번, 도이치 그라모폰과 두 번이다. 세 전집 모두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 명반이다. 영상, 오페라 프로덕션, 레코딩, 아트 비즈니스 모두에 파노라마와 같은 그의 재능이 찬연하게 빛난다.

“모든 아티스트가 그러하듯 카라얀도 실수를 했어요. 오페라 프로덕션이나 레코딩을 할 때 테크놀로지의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죠. 어떤 성악가에게 목소리에 맞지 않는 역을 부르게 한다거나…. 예컨대 호세 카레라스와 염문설이 있었던 카티아 리차렐리는 리릭 소프라노인데 카라얀은 드라마틱한 것을 요구했어요.

리차렐리의 목소리가 그로인해 결정적으로 나빠졌다는 설이 무성했습니다. 제게도 카라얀은 빈첸초 벨리니의 <노르마>를 녹음하자고 했어요. 25세 때 말이에요. 그 나이에 노르마는 분명 무리거든요. 성악가의 역량을 기교적으로 과시하는 ‘벨칸토 창법’은 젊은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상처를 내기 쉽습니다. ‘마에스트로, 저는 할 수 없어요’라고 딱 잘라 거절했지요.”


1987년 카라얀이 조수미,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담은 흥미로운 동영상이 있다. 이 동영상을 보면 카라얀이 조수미를 얼마나 아꼈고, 얼마나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조수미와 체칠리아 바르톨리는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을 부른다. 두 사람은 바흐의 미사곡 중 듀엣 부분을 연습하려고 한다. 그런데 도중에 카라얀은 조수미에게 부활절에 무엇을 할 건지, 서울로 되돌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조수미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레코드회사를 위하여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나 <리골레토>를 부르게 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카라얀은 밤의 여왕의 아리아는 기관총처럼 노래를 불러야 하므로 목에 무리를 줄 수 있다고 걱정한다. 즉 탐욕스러운 레코드회사와 궁합 안 맞는 오케스트레이션 때문에 며칠에 걸쳐서 무리한 연습을 하고, 고작 1만 달러를 받고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 남겨 놓은 채 사라지게 될 뿐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자신을 위해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불러보라고 한다. 도입부를 약간 부르던 조수미는 갑자기 목소리가 새면서 현기증이 나서 못하겠다며 웃는다. 연습도 별로 못하고 곡도 기억 못한다고 하면서도 엄청난 목소리로 ‘밤의 여왕’을 기막히게 부른다. 카라얀은 자신을 납득시켰다며 웃으며, 조수미의 목소리가 마치 ‘물처럼 맑다’고 극찬한다.

카라얀은 강인하고 남성우월주의적인, 가부장적인 지휘자로 악명 높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 진실이고, 일면은 진실이 아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최초의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를 입단시킨 당사자다. 그 과정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장, 소유주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영상에 나온 것처럼 그는 나이 어린 소프라노 조수미가 탐욕스러운 레코드사에 휘둘리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목에 큰 무리를 줄 수도 있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부르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며 충고하는 카라얀의 모습. 항용 쇼비니스트로 욕먹던 카라얀에 대한 평가와는 자못 다른 모습이다.

“모차르트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은 위험한 역할입니다. ‘밤의 여왕’을 맡은 소프라노는 단 두 개의 아리아만 부르면 되는데 1막에서 한 곡 부르고 2막 노래까지 1시간 반 동안의 시간 갭이 있어요. 1시간 반을 쉰 목소리로 2막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부른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입니다.

그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최고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사실은 더 힘든 일이죠. 지금도 불러보면 못할 것도 없지만 ‘밤의 여왕’역을 더 이상 맡지는 않습니다. 그 후로 잠도 잘 자고 살도 올랐어요. ‘밤의 여왕’ 역을 맡지 않은 이후로 건강이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가면 무도회>는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베르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카라얀과의 오디션 이후 조수미는 틈틈이 오스카 역을 연습해서 누구보다 완벽하게 그 역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지 카라얀은 늘 조수미를 찾았다.

“수미 조, 오늘 마에스트로의 기분은 어떤가?”


“연습이 없을 때면 거의 카라얀 옆에서 시간을 보냈지요. 무대의상, 분장 등 세세한 부분까지 카라얀은 조언했습니다. 음악적인 작은 기교, 연기 도중 몸을 돌리는 동작이나 손짓 등 무대 위의 연기법까지 열정적으로 가르쳤어요.

카라얀의 집은 찰츠부르크 시내가 아니라 아니프에 있었습니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곳인데도 카라얀은 아침저녁으로 한 차례씩 극장을 찾아왔습니다. 하반신이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말이죠. 마이크로폰으로 무대장치와 연출, 연기자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지시했습니다.”

카라얀은 마이크로폰으로 자주 조수미를 불렀다. 저 테너의 의상 어때? 까마득한 후배를 옆에 앉히고 음악이나 연출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조수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그러다 보니 질시 어린 타인의 눈총이 느껴지기도 했다. 함께 공연했던 플라시도 도밍고는 카라얀에게 의논할 일이 있으면 조수미를 먼저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오늘 마에스트로의 기분은 어떤가?”

“돌아가시기 전날은 토요일이었어요. 카라얀은 고통을 호소했죠. 어젯밤 잠을 못 잤다는 거예요. 가슴이 콱콱 막히는 것 같아 숨을 못 쉬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감색 트레이닝복 상의의 지퍼를 내려서 제가 다시 올려주기도 했어요. 감기 드신다고 말하며…. 일요일 애완견 재키와 함께 집 근처 호수에 수영을 갔다와 저녁에 TV를 틀었더니 온통 카라얀 특집인 거예요. 세 개의 방송사 모두에서요. 그날 정오에 운명했다는 겁니다. 앞집에 머물던 소프라노 조세핀 바스토우와 함께 현관 앞 계단에서 목놓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수미와 조세핀 바스토우는 공연 취소를 주장했지만 극장 측은 게오르규 솔티가 카라얀의 바통을 이어받아 공연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플라시도 도밍고를 비롯한 다른 출연진도 “마에스트로의 유지를 제대로 받드는 길은 공연을 훌륭하게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날 이후 최고의 연습을 거듭했죠.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 뒤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공이냐 아니냐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관객과 연주자들은 카라얀의 죽음에 압도당했어요. 3막 오페라의 막이 내렸을 때 극장 전체가 눈물과 한숨, 탄식 소리로 가득했죠. 찰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의 <가면무도회> 공연은 7월에 열렸지만 우리는 이미 1월에 녹음을 마쳤습니다. 저와 플라시도 도밍고, 조세핀 바스토우와 레오 누치가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녹음한 음반이죠.

카라얀은 먼저 녹음을 하고, 녹음한 것을 기준으로 그 프로덕션을 스테이지에 옮기는 구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앨범이 동시에 판매가 되는 마케팅까지 염두에 뒀어요. 6개월 사이에 마음에 안 드는 대목은 다시 녹음을 해서 완벽을 기하는 거죠. 저는 시종 오스카 역을 맡았는데 녹음할 때 카라얀은 템포를 굉장히 느리게 잡았어요. 원래 지휘자가 나이가 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요. 제 아리아 두 개도 템포가 느리게 되었다는 걸 알고 수정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이 나빠진 거죠.

마에스트로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수미, 노래 외에는 아무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돼. 옆 사람이 뭘 하든 무대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온 마음을 노래에 집중시켜야 해.’ 저는 그에게 받기만 했어요.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고 감동한다면 그 감동 속에는 거장 카라얀의 호흡과 손길이 담겨 있는 겁니다.”

돈 조반니처럼 미인을 좋아했던 솔티의 정열


카라얀의 뒤를 이어 <가면무도회>를 마무리 한 게오르그 솔티는 집시 스타일의 지휘자다. 솔티의 지휘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실망을 안기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카라얀과는 비교된다. 카라얀의 지휘가 날카롭고 외형미를 중시하는 반면, 솔티의 지휘는 듬직하고 감동이 느껴지는 편이다.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게오르그 솔티는 어마어마한 난관을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던 솔티는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도흐나니, 코다이, 바르톡 등에 사사했다. 피아노, 작곡, 지휘법을 공부한 솔티는 21살 때 부다페스트의 국립가 극장 전속 지휘자로 활약하는 재능을 발휘했다. 1937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참가, 토스카니니의 눈에 들어 출세의 길이 트일 즈음 나치의 헝가리 침공으로 솔티는 스위스로 망명길에 오른다.

“솔티는 영국 데카 레코드와 함께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녹음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1966년에 시카고 심포니의 지휘자로 취임해 말러를 비롯 바그너, 베토벤 등 수많은 기념비적인 명반을 남겼지요. 솔티는 1960년대 코벤트 가든 시절의 업적이 인정돼 영국 왕실로부터 sir(卿, 경)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자유분방한 스타일에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고, 마치 돈조반니처럼 예쁜 여자들을 좋아했던 열정의 인간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저와 모차르트 <마술피리>를 녹음하기 위해 이미 계약한 다른 음반사를 설득해 끝내 관철시킨 그의 절절한 노력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조수미가 만난 거장 중엔 지휘자 로린 마젤이 있다. 그는 마젤을 ‘양면적 인간’으로 평가했다. 평소 청바지를 즐겨 입는 소박함을 보여주지만 무대 위에서는 엄청난 실력으로 단원을 압도하는 무서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로린 마젤은 말 그대로 천재였어요. 영어·이태리어·독어·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했습니다. 저도 외국어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도 그는 정말 출중했습니다. 언어 구사에 있어 본고장 출신과 전혀 구별이 안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완벽한 기억력이란! 보통 세 시간짜리 오페라에는 성악 파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아노·바이올린·첼로·오보에·트럼펫 등 여러 악기가 각기 다른 시점에서 각기 다른 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 파트 전체를 몽땅 외운다는 건 보통사람으로서 꿈도 못 꿀 얘기입니다. 평생을 바쳐 외운다면 서너 개의 오페라를 외울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그가 지휘하는 거의 모든 오페라를 암보했어요.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화했죠.”

로린 마젤과는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모리스 라벨의 오페라 <소년과 마술>을 공연할 때 처음 만났다. 청바지 차림에 수수한 난방을 입고 집에서 잠시 산책 나온 사람처럼 손에 신문을 돌돌 말아 들고 나타났다. 연습하러 온 지휘자가 운동화 차림에 악보도 들고 있지 않았다.

“라벨의 곡은 고난도의 멜로디에 프랑스어로 발음을 정확히 해주어야 하는 난곡 중의 하나입니다. 다들 발음문제 때문에 애먹는 곡인데 저는 자신 있게 노래했지요. 첫 연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젤은 노래가 끝나자 ‘수미는 거의 절대음감을 갖고 있구먼’이라고 말하더군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제가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마에스트로, 저는 거의가 아니라 완벽한 절대음감을 갖고 있습니다.’ 로린 마젤은 당돌한 제 말에 화들짝 놀라며 잠시 놀란 토끼 눈을 뜨더니 ‘브라보’라고 외치는 거예요.”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성악가에게 굉장한 장점이다. 남들보다 음을 훨씬 더 빨리 익힐뿐더러 한 번 들은 곡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카메라에 찍힌 장면이 영원히 남듯, 노래를 한번 들으면 그 음이 필름 찍히듯 고스란히 머리에 새겨진다. 웬만한 대중가요나 가곡은 한번만 들어도 완벽하게 암기한다.

“하지만 나쁜 점도 있어요. 음에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그 음의 터치가 낮거나 높으면 노래하기가 어렵습니다. 정확한 소리밖에 낼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저는 그래서 대학 1학년 시창 시간 때마다 애를 먹었어요. 특히 애를 먹었던 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다장조(C major)에서 C음을 ‘도’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장조(G major)에서 G를 ‘도’로 부르고, 사장조 멜로디를 다장조 계음으로 부르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제 귀에는 솔은 솔로 들릴 뿐 도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솔을 도로 불러야 하니 계음이 온통 뒤죽박죽 돼버리고 마는 거죠.”

다니엘레 가티의 사과, “당신 해석이 옳았다”

조수미가 기억하는 지휘자 중엔 이탈리아 출신 다니엘레 가티가 있다. 33세의 나이로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발탁된 천재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숨겨놓은 자식이라는 설이 있을 만큼 아바도를 많이 닮았고, 지휘 모습까지 비슷하다. 이탈리아 오페라 해석에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아주 섬세한 곡 해석이 강점인데, ff(아주 강하게)부터 pp(아주 여리게)까지의 큰 변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그에 걸맞은 오케스트라의 독특한 색깔을 표현할 줄 안다.

“가티와는 코벤트 가든에서 <청교도>를 같이 공연했죠. 처음에는 서로의 해석이 달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는 제가 맡은 엘비라 역의 노래를 들으며 시시콜콜한 지적을 자주 했어요. 한마디로 자기 식으로 불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해석이 목소리에도 맞고 정확한 것 같아 연습 때도 기어이 제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리허설이 계속되는 그의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서로 말도 나누지 않은 채 냉랭하게 연습만 할 뿐이었죠.

큰 박수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제가 분장실에 막 들어가는데 가티가 저를 부르더니 ‘당신 해석이 옳았어요. 사과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크게 놀랐죠. 지휘자들과 곡의 해석을 두고 신경전을 펼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먼저 사과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요. 기꺼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죠. 다니엘 가티를 통해 제가 배운 것은 음악 하는 사람이 건방을 떨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지휘자에겐 엄청난 권한이 주어집니다. 카리스마도 필요하지만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리죠. 가티는 아리아 도중 중간에 박수가 나오면 그것을 제 잘못으로 생각했어요. 마치 제가 박수를 유도해서 공연 분위기를 망친다는 식의 생각, 제가 청중의 박수에 연연해 한다고 생각했죠. 주세페 시나폴리 같은 지휘자도 ‘디시플린(규율)’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관용’이야말로 지휘자의 진전한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수미의 기억에 지휘자 주빈 메타는 영락없는 인도 사람이다. 해외에 부유하는 인도인에 대한 애정이 절대적이다. 일면식도 없는 하층 인도인의 민원을 발벗고 해결하는 그의 처신을 조수미는 목격한 적이 있다. 조수미는 1992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모차르트 <마술피리> 공연 때 주빈 메타의 지휘로 ‘밤의 여왕’을 불렀다.

“주빈 메타는 대중과 잘 융합하는 성격을 지녔어요. 권위 따위는 ‘개나 줘버린다’는 사고방식을 견지하죠. ‘페페론치노’라는 인도식 고춧가루를 늘 들고 다니며, 술이든 스테이크든 이 향료를 술술 뿌려 먹고 마시죠. 매운 음식이 나오면 ‘이것 좀 먹어보라’며 듬뿍 덜어주고, 그 위에 페페론치노를 새빨갛게 뿌려줍니다.

사양할 수 없어서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라고 인사하지만 저는 매운 음식을 못 먹거든요. 식사 시간만 되면 마에스트로와 나 사이의 숨바꼭질이 시작됩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마에스트로의 눈에 안 띄려고 피해 다니고 마에스트로는 이리저리 ‘매운 맛 동지’를 찾아다닙니다. 그의 지휘는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맛이 있어요. 마력이 있는 지휘자입니다.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녹음할 때 저는 그가 지휘하는 모습에 얼이 빠진 적이 있어요. 사람을 끌어안을 때는 너무도 부드럽고, 음악적인 소신과 개성은 너무도 명료하고 완강하죠. 녹음할 때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리고 그의 손짓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노래안 해요?’라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순서도 놓치고 그의 지휘에 빠져 있었던 저를 발견했죠. 주빈 메타는 페페론치노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저의 마에스트로입니다.”

조수미의 ‘인생의 마에스트로’는 어머니다. 1983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한 조수미는 가츠에라는 일본인 친구를 만난다. 가츠에는 조수미가 보기에도 보통이 아닌 여자였다. 일본 도쿄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가츠에는 눈부신 외모에 이탈리아어에 능통했고, 도통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가츠에는 목소리가 아름다워 그가 노래하는 모습만 보면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것 같았어요. 가츠에의 피아트 자동차로 운전연습도 하고 함께 어울렸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질투심과 반발심이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죠. 출중한 실력에 남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가츠에를 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엄마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산타 체칠리아의 불면의 밤’을 호소했죠. 장장 세 장에 걸쳐 가츠에에 대한 저의 애증을 고백했어요.”

카라얀 무덤 ‘나무십자가’의 교훈

그 편지를 받은 조수미의 어머니는 “내 가슴에 불덩이가 치솟는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수미에게 쓴 어머니의 답장은 염려와 우려가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단호하고 관용이 넘치는 인생철학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의) 그 유명한 라이벌 관계를 수미 너도 잘 알고 있지? 두 사람은 당대 소프라노의 양대산맥이었다. 천사의 목소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리릭 소프라노였던 테발디에 비해 그 풍부한 성량으로 드라마틱에서 콜로라투라까지 넘나들던 칼라스 칼라스는 테발디를 완전히 무시해버렸다고들 하지. 두 사람의 노래를 모두 좋아하지만 두 사람의 태도만큼은 네가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노래는 아름다운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쓰다듬는 게 바로 노래인데, 노래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과 질투가 가득하다면 그 노래는 결국 거짓일 것이다. 엄마는 수미가 항상 아름다운 마음으로 노래하길 바랬다. 어떤 사람이든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가수라면 일등이 아니어도 좋고, 세계 정상이 아니어도 좋다.”

조수미는 지금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카라얀의 무덤을 찾는다. 작고 초라한 나무십자가만이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 그는 “살아서 모든 것을 가졌으니, 죽음만은 빈 손으로 소박하게 맞고 싶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무덤 앞 나무십자가를 보고 있노라면 카라얀이 출세와 돈에 눈이 먼 속인이라는 세간의 비난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카라얀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저 나무십자가가 상징하는 소박한 평화와 행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돌아가야 할 음악도 바로 그곳에 있을 겁니다. 나무십자가의 평화와 행복입니다.”

201304호 (201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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