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심층취재

Home>월간중앙>특종.심층취재

대한민국 올스톱시킨 세월호 참사의 재구성 - ‘우리는 304명의 생명을 살릴 10번의 기회를 놓쳤다’ 

수익 앞세운 악덕 기업가의 안전 불감증이 초래한 인재(人災) “책임에서 자유로운 어른 없어” 성찰하고 공동체 희망 찾아야 

사진 오상민 기자
‘4·16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을 올스톱시켰다.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6825t급 크루즈선인 ‘세월호’가 거짓말처럼 거꾸로 뒤집힌 채 침몰했다. 구조 172명·사망 284명·실종 20명(5월 15일 현재). 수학여행을 떠난 열일곱 살 생떼 같은 아이들이 250명이나 차디찬 바닷속에 갇혀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은 친구들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쏟았고, 모든 어버이들은 제 자식을 잃은 듯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침몰 이후 단 한 명의 목숨도 구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에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진도 팽목항은 지난 한 달 내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은 통곡의 바다였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같이 일터로 가기 바빴던 부모들은 정작 생떼 같은 자식들을 삼켜버린 바다를 향해 그저 가슴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조문객들은 2~3시간은 예사로 줄을 섰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그 줄을 기다리고 기다려 참배하고 추모했다.
잔인한 4월이었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安山)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으로 변했다. 분향소 앞에서 이어진 줄이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돌고 돌아서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늘어섰다. 분향을 위해 두세 시간은 예사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조문객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순서를 기다려서 참배하고 추모했다. 노란 리본과 검은 상복으로 뒤덮인 안산 시민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이 친구들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쏟았고, 모든 어버이들은 제 자식을 잃은 듯 가슴을 치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같이 했다.
‘승묵이네 마트’로 알려진 안산시 월피동 ‘삼일마트’. 어렵게 33만 원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해 제주도로 떠났던 슈퍼집 아들인 승묵(17) 군은 무사귀환을 애타게 바라던 이들이 붙여 놓은 노란 포스트잇의 물결도 무심하게 4월 25일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학교 앞 작디 작은 세탁소 편의점집 아들인 현탁(17) 군도 부모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서야 지난 5월 8일 차디찬 몸으로 죽어 나왔다. 현탁 군의 부모는 “생일날 수학여행을 간다”며 기뻐했던 아들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묻으며 깊은 울음만 토해냈다.

구조 기다리며 대기한 착한 아이들

그래도 안산은 차라리 나았다. 진도 팽목항은 지난 한달 내내 밤낮으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은 통곡의 바다였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새벽같이 일터로 가기 바빴던 부모들은 정작 생떼 같은 자식들을 삼켜버린 바다를 향해 그저 가슴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아이를 잃은 유가족 대표 김병권씨는 “도대체 누구를 믿고 이 나라에 살아야 하나. 배에 아이들을 수장해놓고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유가족들은 가족들을 외면한 방송사로, 청와대로 몰려가 “내 자식 살려내라”고 통곡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의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온 나라가 동병상련의 고통을 앓았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이 남긴 휴대전화에서 사태의 진실을 보여주는 동영상 몇 개를 복구해냈다. 침몰 직전까지도 구명 조끼를 입고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착한 아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해경이 왔어.” “속보가 떴어.” 아이들은 이렇게 서로를 독려하면서 기울어진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어른들의 구조를 차분히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웃으며 구조를 바랐던 아이가 보낸 영상에는 “살아서 만나자”는 절박한 염원이, “우리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진심으로 걱정됩니다”라는 가슴 아픈 음성이 담겨 있었다.

검경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통해 밝혀진 세월호 참사 원인은 복합적이다. 노후 선박의 불법 증축에 따른 원천적인 복원성 부족, 최대 적재량의 3배에 이르는 화물 과적, 화물의 결박 불량, 선박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 부족 등 여러 상황이 겹치고 겹쳐 있다. 세월호가 예상보다 빠르게 침몰한 것은 배가 기울어지면서 화물과 차량이 드나드는 통로 역할을 하는 선박의 램프(ramp) 부분으로 엄청난 물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화물 과적으로 몇 천만원의 화물 운송료 수입을 더 얻고자 했던 부실 해운사 기업주의 탐욕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 사고의 원인과 진행 과정을 되짚던 <월간중앙>은 대한민국이 304명의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기회가 길게는 3년 전부터, 짧게는 사고 직후까지 무려 열 번이나 있었다는 것을 찾아냈다. 대한민국의 숱한 안전관련 단체와 기관의 어른들이 그 기회들을 놓치고 또 놓쳤다. 고통스럽더라도 더 이상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잘못했던 그 열 개의 부끄러운 장면을 곱씹어보자.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살인혐의로 기소된 선장 이준석 씨는 1등항해사로 탑승했던 3년 전 여객선 사고 때도 승객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자격없는 선장과 악덕 해운사

1 하인리히 법칙을 잊지 않았더라면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해 살인죄로 기소된 이준석(69) 선장은 3년 전인 2011년 4월,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인 오하마나호가 5시간이나 표류하는 사고를 당할 때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것으로 밝혀졌다. 2011년 4월 6일 오후 7시께 수학여행 참가 고등학생 430여 명을 포함한 648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오하마나호는 출항 30분만에 기관고장으로 멈춰선 채 5시간을 표류했다. 해류에 의지해 바다를 떠돌다 해상에서 가까스로 긴급 수리를 마친 뒤에 인천으로 다시 회항했다. 1등항해사로 탑승했던 이씨는 당시 여객선 사고 때도 이번과 똑같은 대응으로 승객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당시 이씨를 비롯한 오하마나호 승무원들은 전기가 끊겨 배 전체가 암흑에 빠진 상황에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세월호 침몰 때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에게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만 했다. 그런데도 이씨는 사고 이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가 난 지 이틀 뒤인 4월 8일에 오하마나호의 선장을 맡아 여객선을 계속 운항했다. 3년 전 일어난 판박이 사고에 대한 청해진해운사의 미흡한 대처와 안일한 처신이 결국 이번 세월호 참사를 야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의 안전문제는 해운업계에서 1년 전부터 줄기차게 지적됐던 사안이었다. 청해진해운(대표 김한식, 구속)은 2013년 3월 15일 세월호를 인천-제주 항로에 첫 취항시킨 이후 상습적으로 화물을 과적했다. 해운 전문가들에 따르면, 세월호 선박 자체가 원래 복원력보다는 스피드 위주로 만들어진 여객선이라서 화물을 많이 실으면 복원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특히 세월호의 선수 쪽은 화물을 실으면 절대 안 되는 곳인데도 세월호는 운항 초기부터 조타실과 선수 사이에 컨테이너를 100개 이상 싣고 다녔다. 오죽하면 선사 관계자들 사이에서 세월호는 ‘무법 여객선’으로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화물과적을 단속해야 할 해양수산부와 해경은 연안을 운항하는 여객 선사들이 영세하다는 이유로 안전과 관련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다.

지난 5월 6일 해수부 해양안전심판원이 공개한 ‘2013년 해양사고 통계발표’ 자료에 따르면 매년 국내 여객선 100척 가운데 8척 꼴로 충돌·좌초·전복·화재·침몰·기관손상 등의 해양사고가 발생했다. 국내 여객선들이 좌초와 침몰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그런데도 해양수산부(장관 이주영)는 세월호와 같은 연안 여객선에 대한 안전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Heinrich)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의 보험회사 ‘트래블러스’에서 일하던 H.W. 하인리히는 약 5천 건의 산업재해를 분석한 결과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비율이 1대 29대 300의 비율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이 법칙을 근거로 경고성 징조를 무시하면 반드시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고 경고했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대형사고 발생 이전에 수많은 소규모 사고와 징후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을 참혹한 현실로 보여줬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우리가 놓친 첫 번째 기회다.


▎침몰한 세월호는 상습적인 화물과적과 평형수 부족에 따른 선박의 복원력 저하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2 해운사의 경영부실과 부실인력 채용

청해진해운의 대주주인 유병언(73) 전 세모그룹 회장은 올해 2월까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매달 1천만 원의 급여를 받았다. 연간 4천만 원의 상여금까지 챙겼다. 청해진해운은 유 전 회장 일가에게 돈이 빠져나가면서 경영난을 겪었다. 해운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세월호와 오하마나호에 화물을 상습적으로 과적해 수입을 늘리고 경력이 짧은 계약직 인력을 수시 채용해 인건비를 줄였다.

사고 당일 선장이었던 이준석 씨는 비정규직 ‘대타 선장’으로 월급은 270여 만원에 불과했다. 항해사와 기관사들 역시 월급이 200만 원도 되지 않았다. 세월호의 선박직 15명 중 10명이 해당 선박에 근무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비숙련 노동자였다. 심지어 세월호에서 둘째 직책인 1등항해사 중 한 명은 사고 발생일 하루 전인 15일에 입사한 신참이었다. 이들 계약직 선원 중에 6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난 이도 있었다. 화물 과적으로 배가 기운다는 것을 알고는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그만뒀다는 것이다.

세월호는 사고 당일에도 조타기 고장으로 배의 방향을 원하는 대로 되돌릴 수 없었다. 사고 직후 조타수 조모(55) 씨는 “조타기를 5도가량 돌렸는데 평상시보다 너무 많이 돌아갔다”고 말했다. 선체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제주도를 향해 남쪽으로 달리던 배는 이 때문에 북쪽으로 180도 방향을 바꿔 표류하다 침몰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사고 위험을 여러 차례 알렸다가 해운사측이 계속 묵살하자 올해 초에는 원래 선장인 신모(47) 씨와 선박직 선원들이 회사에 집단사표를 내기도 했다. 청해진해운 관계자에 따르면, 복원력이 부실한 세월호와 쌍둥이선인 오하마나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경영진과 선장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투표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세월호를 우선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매물로 내놓았다. 필리핀 바이어가 세월호를 사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매각 추진이 진행되던 와중에 세월호는 침몰했다. 만약 청해진해운이 문제덩어리였던 그 세월호 운항을 중단시켰다면 그날 어린 생명들의 집단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가 놓친 두 번째 기회다.

3 안전에 대한 규제완화와 증·개축만 없었다면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1월, 국토해양부는 규제완화 차원에서 해운법 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선령(船齡) 제한을 완화한다. 여객선의 선령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바꾼 것이다.

국토부는 당시 규제완화의 근거로 “선령과 해양사고는 직접적으로 무관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선령 제한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규제완화 조치로 “기업 비용이 연간 200억 원 절감될 것”이라는 이유도 달았다.

청해진해운은 규제완화 이후인 2012년 10월에 일본에서 18년간 운행한 세월호를 헐값에 인수했다. 청해진해운은 구입 후에 세월호의 선실을 두 개 층이나 증축해 승객 정원을 840명에서 956명으로 늘렸다. 길이가 146m, 폭이 22m의 대형 여객선이 6825t급 국내 최대 연안여객선으로 고쳐졌다.

세월호는 화물이 입출입하는 별도의 공간을 뜯어내고 배 뒤쪽 램프를 통해 화물과 차량이 드나들도록 개조됐다. 사고가 난 뒤에야 밝혀졌지만 이 램프가 문제였다. 뚫려 있는 램프로 바닷물이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자 여객선은 순식간에 침몰했다.

해양수산부의 위임을 받아 선박 제조와 개조를 검사하는 기관인 한국선급(KR)은 세월호의 증개축으로 배 무게가 187t 증가하자 최대 적재 화물량을 987t으로 낮추도록 했다. 그리고는 세월호의 평형수(밸러스트 워터)를 2023t으로 늘려 맞추는 것을 조건으로 개조를 승인했다. 한국선급의 전문가가 보기에도 세월호가 무리한 증·개축으로 배의 무게중심이 51㎝ 이상 올라가 복원력 하락이 우려됐다고 했다.

실제 세월호의 증·개축이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인 복원성 부족을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뒤늦게 5월 9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안전이라든가 소비자보호, 공정경쟁을 위해 꼭 필요한 좋은 규제는 반드시 유지하고 필요한 경우 더욱 강화해야 한다”며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 뒤늦은 조치였다.


▎유족들은 해상구조를 맡은 해경이 세월호 안에 들어가 승객들을 탈출시키지 못하고 갑판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만 끌어올리는데 급급했던 것에 크게 실망했다.



46개 중 1개만 펴진 구명벌

4 해경과 해운조합의 안전점검 부실이 부른 참사

세월호는 침몰사고가 나기 두 달 전인 지난 2월에 해양경찰의 특별 안전점검을 받았다. 검사 결과 비상훈련·안전시설·고박장비·구명장비 등 이번 참사에서 핵심 문제로 지적된 부분에서 모두 ‘양호’ 판정을 받았다. 거짓말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찰관 한 명이 주도해 불과 1시간여 만에 끝낸 형식적인 점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명장비에 대한 부실 안전점검은 뼈아팠다. 침몰 당시 배에 있던 구명벌 46개 가운데 제대로 펼쳐진 것은 단 1개뿐이었다. 구명벌 이음새 사이까지 덕지덕지 페인트가 칠해져 본드처럼 굳어 있는 바람에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는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구명벌은 한국선급이 수수료를 받고 민간업체에 위탁해 점검하는데, 세월호의 구명장비 점검 업체인 한국해양안전설비 차장 양모(37) 씨는 지난 2월 검사에서 전체 46개 구명벌 중 9개만 점검을 했다고 실토했다. 구명벌 1개를 편 뒤 다시 접는 데 운영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서류상으로 검사만 했다고 한다.

그는 비상탈출용 미끄럼틀인 슈트는 아예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세월호 안전점검 보고서에 구명벌(구명뗏목) 등 구명 설비와 관련해 ‘양호’라고 기재했다. 세월호와 같은 대형 선박의 경우 제대로 하려면 안전점검이 15일의 시간이 걸리지만 세월호는 이틀 만에 졸속으로 처리됐다.

그래도 해운조합의 운항관리자가 출항 전에 원칙대로 검사를 다했다면 세월호 침몰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가 출항하기 전 화물 적재와 구명장비 등의 상태를 점검해야 할 한국해운조합은 세월호에 대해 평소처럼 거짓으로 점검 보고서를 작성했다.

원래 운항관리자는 선장으로부터 출항 전에 화물 적재와 탑승 인원, 고박(화물 고정) 등을 점검해 작성한 ‘출항 전 안전점검 보고서’를 제출 받아 이를 직접 확인한 뒤 서명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날 이들은 점검 사항을 공란으로 둔 보고서를 제출받고는 배가 떠난 뒤에 선장이 전화로 통보한 내용 그대로 대신 작성해줬다. 해운사와 해수부 전직 관료들이 장악하고 있는 뿌리 깊은 유착이 결국 대참사를 부른 것이다.

세월호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세월호가 출항하던 시각인 4월 15일 저녁,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는 과적 여부를 살피고 안전을 점검할 해경이 한 명도 근무하지 않았다. 여객선의 운항통제권을 지닌 인천해경은 인항파출소 소속 경관을 1명씩 일일교대 방식으로 터미널에 근무시키고 있는데, 당시 근무자는 세월호 출항 30분 전에 퇴근했다. 당일 근무일지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아이들을 살리지 못한 책임은 명백히 어른들에게 있었다.

5 화물과적과 평형수 부족이 비극 초래하다

세월호는 겉만 여객선이었을 뿐 실제로는 화물선이나 다름없었다. 세월호는 상습적으로 과적 운항을 했다. 수익 때문이다. 화물 운임료는 8t 화물차 한 대에 70만 원, 트레일러는 140만 원이었는데, 세월호는 기준량보다 더 많은 화물을 실은 대가로 한 번 운항할 때마다 평균 4천만 원의 추가 수익을 올렸다.

이번 침몰사고 때도 세월호에는 권고 적재량보다 3배가 많은 3608t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배가 무거워지면서 무게중심이 위쪽으로 올라가게 됐고 결국 이것이 급속한 침몰로 이어졌다. 침몰 직전까지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냈던 세월호의 뱃머리는 원래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가 채워져야 할 공간이었다. 하지만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수사 결과, 평형수를 권고 기준의 4분의 1만 채운 것으로 드러났다.

왜 그랬을까? 흰색과 파란색 페인트 경계부분(흘수선)이 바다에 많이 잠기면 안 되기 때문에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를 화물의 무게만큼 밖으로 덜어낸 것이다. 합동수사본부는 세월호가 지난해 운항 이후 4월 16일까지 총 241회 운항(왕복) 중 139회를 과적해 벌어들인 29억6천만 원이 유 전 회장에게 건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승객의 안전보다 눈앞의 이익을 더 중시한 청해진해운은 바다 위의 움직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이 같은 화물 과적 때문에 사고 전날인 4월 15일에도 배가 이미 15도 기운 채 운항했다는 것이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사고 전날 세월호는 변산반도와 군산 앞바다를 지나던 중 갑자기 15도가량 기울었다가 바로 선 일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배 안의 쓰레기통과 탁자 위의 캔커피가 나뒹굴 정도였다. 그런데도 선장은 안내방송 한 번 없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운항을 계속했다. 그때부터 이미 세월호는 균형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의 1등항해사 강모 씨는 출항 당일인 15일 청해진해운 물류팀장과 이사에게 화물을 그만 실으라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신참인 그의 경고는 해운사나 선장에게 통하지 않았다. 만약 선장이 그때 배를 세우고 그 밑에 화물을 결박해놓은 위치를 확인했더라면, 그때 세월호가 인근 군산항으로 들어와 제대로 배를 정비했더라면 꽃다운 아이들이 희생되는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다.

6 화물결박 부실로 급속한 화물쏠림을 막지 못했다

KAIST 해양시스템공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5월9일 세월호 침몰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세월호 침몰 사고와 비슷한 환경에서 실험한 결과, 배에 실린 컨테이너와 차량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은 것이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분석됐다. 고박(선박 내 화물고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배가 기울자 화물이 한꺼번에 쏠려 침몰을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대형 여객선은 주로 항운노조에서 고박을 맡아서 하지만 세월호는 운영비를 아끼기 위해 인건비가 싼 업체에 고박을 맡겼다.

합동수사본부는 화물 자금장치를 제대로 연결하지 않아 세월호가 침몰하는 원인을 제공한 세월호 고박업체 우련통운직원들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조사 결과 세월호는 컨테이너의 모서리를 고정시키는 콘(cone)이라는 장치가 있는데 세월호에 있는 콘은 컨테이너와 규격이 맞지 않아 제대로 연결되지 않거나 일부만 끼워졌다고 한다. 일부는 로프로 구멍을 연결해 밧줄로 묶기만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은 부실한 고박은 결국 소중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를 나라의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출항 전에 안전교육만 받았더라면

7 비상시 승객 대피요령 및 안전교육은 없었다

선진국은 크루즈선 승객들에게 탑승 직전 일정시간 교육·훈련을 의무화하고 있다. 선원들도 정기적으로 안전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476명이나 되는 탑승객을 태운 세월호는 출항에 앞서 승객들에게 비상시 대처요령을 알려주는 안전교육을 생략했다. 평소에 선원들을 위한 정기적인 안전훈련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해사기구(IMO)의 관련 규정에는 침몰위기로 선장의 퇴선(退船, 탈출)지시가 떨어지면 여객선 승객 전원이 30분 안에 구명보트로 탈출하도록 하고 있다. 세월호는 침몰까지 그 두 배가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대피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침몰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했을까?

우선 선장은 배가 기우는 것을 인지한 즉시 비상벨을 울리고 급박한 위기상황이라는 것을 정확히 승객에게 알려야 한다. 1등항해사는 사고가 난 화물간으로 달려가 침수 여부를 무전기로 보고한다. 선내방송과 구명벌 투하는 2등항해사가 맡고, 3등항해사는 선장 옆에서 지시사항을 큰소리로 전파하는 게 임무다. 위기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기관장은 배 밑 기관실이 정위치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정위치를 지킨 선원은 아무도 없었다. 세월호 선원들은 사고 발생 후 ‘골든 타임’으로 불리는 1시간 동안 승객들의 탈출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연시켰다. 세월호 승무원은 29명 가운데 20명(68.9%)이 구조된 반면 수학여행길에 나선 단원고 2학년(325명)은 75명(23%)만 구조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만약 사전에 승객들에 대한 충분한 안전교육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해경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사고로 숨진 채 발견된 희생자 269명 중 235명이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망자 일부는 애초 실종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던 5층 승무원 전용 객실에서도 발견됐다. 침몰 직전까지도 탈출을 위해 선내 최상층 객실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에서 객실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객실에 물이 차서 잠기면 입고 있던 구명조끼가 오히려 물속에서 유영을 통해 물위로 떠오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구명조끼를 입었다면 무조건 갑판으로 대피해 탈출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세월호가 출항할 때 안전교육을 통해 이같은 정보를 승객과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면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학생들이 당시 사고 해역의 수온(약 10도)에서 물속에 뛰어들었다면 1~2시간 뒤에 저체온증이 생길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당시 세월호 주위에 어선 수십 척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더라도 구조가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무능한 해경과 부실한 정부

8 세월호 이상징후 발견 못한 무능한 해경관제센터

해양수산부가 세월호의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세월호는 4월16일 오전 8시48분37초께 갑자기 서남쪽으로 100도 이상 급선회했다. 이후 오전 8시52분13초께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세월호가 진도관제센터(VTS)의 관할구역에서 이런 이상 현상이 발견됐는데도 관제센터는 이 같은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해경은 이에 대해 “진도 해상에 떠 있는 배들만 500여 척 정도다. 전자 해도에 전부 점으로 보이는 이 배들을 일일이 다 모니터링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경이 476명이 탑승한 대형 여객선의 항로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수많은 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고두고 뼈아픈 대목이다.

9 승객 버려두고 탈출한 비정한 선장과 선원들

해운업계 사람들에 따르면, 노련한 선장은 배가 기울면 평형수부터 최대한 채운다고 한다. 기운 쪽의 평형수를 반대쪽으로 옮기면 어지간한 배는 30도 이상 기울어도 복원력이 회복된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호가 복원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지 이준석 선장은 배가 기울자 제 한 목숨 살기 위해 속옷 바람으로 탈출하기 바빴다.

사고가 나던 그 순간, 선장 이씨는 맹골수도와 같은 물살 센 바다를 지나면서도 초보인 3등항해사와 조타수에게 키를 맡긴 채 침실에서 쉬고 있었다. 이씨는 사고 당시 정상적인 판단력을 보이지 못하고 항해사의 질문에도 선장으로서 제대로 지시를 내리지 못할 정도로 공황상태를 보였다.

선원들 역시 오십보백보였다. 배가 침몰하는 긴급상황에서도 몇몇 간부급 선원은 선사 측인 청해진해운과 7차례나 연락하며 과적한 화물 양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왜 그랬을까? 침몰 원인이 무리한 과적으로 결론 날 경우 세월호 침몰은 회사 과실이 되고 청해진해운은 보험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승객들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해운사와 긴박하게 교신하며 증거를 조작했던 것이다.

세월호와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교신을 시작한 오전 8시56분부터 배가 완전히 전복된 오전 10시17분까지 선박직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저임금을 받으면서 장시간 노동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여러 배를 떠돌아다니는 계약직 선원들에게 선원의 신성한 의무를 강조하고 승객의 생명과 안전을 제일 먼저 생각하라는 요구는 무리였을까?

해경이 조타실의 선원들을 구하는 동안 배 뒤편의 승객들과 아이들은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가야 했다. 합동수사본부가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이 선장과 1등항해사 등에게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키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캡틴 자격이 없는 선장을 만난 죄 없는 승객들. 불행히도 이것이 304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번에도 대재난이 닥치자 허둥지둥하다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해내지 못했다. 유가족들에게 사과하는 정홍원 국무총리(가운데)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오른쪽).



우왕좌왕 ‘골든타임’ 놓친 무능한 해경

10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객실 안내방송

4월 16일 오전 9시37분, 배가 기울었지만 세월호 안에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는 방송 멘트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시각 조타실에서는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 조타수가 자신들의 탈출만 도모하고 있었다. 배가 이미 60도 이상 기울어져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내용의 방송은 30분간 무려 7차례에 걸쳐 반복됐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 구명조끼를 입고 신속하게 갑판 위 구명벌(구명뗏목) 주위로 모여야 살 수 있다. 배가 많이 기울면 벽이 바닥이나 천장으로 돌변해 제대로 서서 걸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갑판으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세월호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그 반대로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합동수사본부 조사에 따르면, 세월호 3층 방송실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 대기하라”고 방송했던 안내데스크 강모(33) 씨는 자신이 있던 3층 방송실에 물이 차기 전까지 승객들을 대피 또는 탈출시켜야 할지를 묻기 위해 30~40분 동안 여러 차례 선장과 항해사에게 무선교신을 시도했다고 한다. 같은 시간,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사망한 매니저 박지영(22) 씨도 무선교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조타실에 있던 이 선장과 2등항해사 김모(47) 씨, 3등항해사 박모(25) 씨 3명은 무전기를 갖고 있었는데도 이들의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 대기하라”는 방송만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다 방송실에 물이 차기 시작한 오전 10시쯤에야 승객들에게 배 밖으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배가 80∼90도 기울어져 탈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 승무원은 “강씨는 성실했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씨의 방송 때문에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게 몸에 밴 단원고 학생들은 차디찬 바닷속에서 죽어가야 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존 승무원들에 따르면 단원고 학생들은 “질서 있고 말 잘 듣는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세월호에서 배식을 담당했던 승무원은 “밥이나 반찬을 더 달라고 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배식 시간이 다른 때보다 30분이나 빨리 끝났다”고 말했다. 이런 단원고 학생들이었기에 위기의 순간에도 질서정연하게 선내방송 지시에 따랐다고 한다.

심지어 세월호 4층은 상대적으로 탈출이 쉬운 조타실이 객실 앞쪽에 있었지만, 배가 급격하게 기우는 상황에서도 그곳으로 달려간 학생과 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객실 옆 승무원실에 있던 필리핀 가수 부부는 조타실로 달려갔지만 ‘착한’ 단원고 학생들은 방송에서 지시한 대로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이렇듯 너무나 허무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304명의 귀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열 번의 귀중한 기회를 이렇듯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국가가 무엇인지, 정부가 무엇인지 새삼 돌이켜보게 했다. 이번 참사는 해양경찰이 재난사고에 대처하는 능력이 얼마나 부족하고 후진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침몰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해경 경비함은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승객들보다 선장과 선원들을 먼저 구조해 육상으로 인계했다. 구조의 기본 수칙이 몸에 배어 있었다면 배 뒤쪽으로 돌아가 안에 갇혀 있는 승객들을 먼저 구해야 하는데도 어선의 불법행위를 단속할 때처럼 습관적으로 우선 조타실부터 찾았다.

전문 인력과 장비 없이 출동한 해경 경비함은 119구조대가 자주 사용하는 구조용 로프나 사다리, 유압절단기 등 기본적인 장비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로 출동했다. 그래서 세월호 객실 안에 들어가 승객들을 탈출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목포해양경찰서장으로부터 오전 9시50분경에 승객들을 탈출시키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전문 구조경험이 없어서 선체에 진입해 탈출하라는 방송도 하지 못했다. 두고두고 해경이 비난을 감수해야 할 대목이다. 해경의 전문구조대인 122구조대가 도착한 오전 11시20분에는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긴 채 이미 침몰한 뒤였다. 배가 전복되자마자 30분 내에 구조해야 하는 ‘골든 타임’을 그렇게 놓친 것이다.

국내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는 예외 없이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일상적인 안전불감증→안전검사와 검증 부실→대참사→늑장대응이 반복되고 있다. 사고가 터지면 떠들썩하게 재난 컨트롤타워 부재를 문제의 원인으로 삼다가 요란한 처벌을 끝으로 사태를 마감하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일상적인 안전불감증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대형 재난을 당하는 지긋지긋한 ‘재난의 뫼비우스 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년 전에도 그랬다. 무려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도 규정을 초과해 화물을 실었다가 참사를 당했다. 사고 한 달 전 해운항만청 안전검사에선 고장 난 구명정이 합격판정을 받았다. 휴가 간 항해사 대신 갑판장이 키를 잡아 사고를 냈고, 승객 정원(221명)보다 많은 361명이 탑승해 수많은 생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서해훼리호 참사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여전히 ‘책임 회피’와 ‘사태 수습’에만 골몰한다.

5월 14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공개된 119 상황실과 해경간 통화 녹취록에는 4월 16일 오전 10시7분에 배가 완전히 침몰했다는 대화가 기록돼 있다. 119 상황실과 해경의 오전 10시37분 통화에서는 400명 이상이 구조되지 못하고 있다고 서로 이야기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당시 현장 상황과 달리 오전 11시에 중앙재해대책본부는 청와대에 “인명피해가 없다”고 보고했다. 부실한 보고와 책임 떠넘기기, 인명 구조보다 윗사람에 대한 심기경호와 의전을 먼저 챙기는 우리 정부의 후진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헌법 제 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에도 대재난이 닥치자 허둥지둥 요란만 떨다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해내지 못했다. “정부가 아이들을 죽게 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수많은 인재·참사 겪었지만 판박이 사고 되풀이

국민들은 이번 4·16 세월호 참사가 하나같이 원칙과 규정을 지키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또 분노했다. 사회 곳곳에서 “내탓이오”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세월호 참회 특별법’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언론인들도 성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상도 SBS아나운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어른은 크든 작든 간에 이 참혹한 사건에 책임이 있다. 어느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나만 옳다고 큰소리를 내는 것은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매우 힘든 일이 되겠지만, 끊임없이 내가, 우리가 각기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며 내 직업의 소명과 사회적 책임이 어떤 것인지를 아프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하지만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국민들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승객 탈출을 돕다 사망한 승무원 고 박지영 씨의 모친은 딸과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이 보내온 성금을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내 아이는 또 학생들을 구하다 죽었을 겁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형편이 더 어려운 실종자 가족들을 도와주세요.” 고통당한 이들이 오히려 슬픔을 딛고 당당하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은 우리가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201406호 (2014.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