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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창조학교⑦ 방송·영화 편집의 기술 - ‘예능’ 대세 1등공신은 누구? 출연자 아닌 연출자 

언제부터 쇼나 오락프로그램이 예능프로로 불리게 됐지? 롱런 <무한도전>의 인기 비결은 ‘망가’ 풍선글에서 차용한 ‘자막’의 힘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장면 수가 제각각이다. 내용이 급박하게 전개될 때는 장면 수가 급격히 준다. 한 페이지 가득히 오직 한 개의 장면인 경우도 있다. 텍스트도 거의 없다. 간단한 의성어,의태어일 경우가 많다. 독자의 마음도 급해져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세계 만화시장을 주름잡는 일본 망가의 편집방식이 텔레비전 시청자들과 영화 관객들의 정서까지 훔친다.

예능프로그램은 자막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재미를 창출한다. 시청자들 사이에 인기를 끄는 <무한도전> <꽃보다 청춘> 등 인기 예능프로그램의 한 장면.




시청자들 사이에 인기를 끄는 <비정상회담>의 한 장면.
한때 <명작스캔들>이라는 TV 교양프로그램에 MC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음악·미술의 명작들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있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PD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료 영상을 준비해왔다. 그 영상을 보고 스튜디오의 전문가들이 서로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취지도 좋았고, 내용도 아주 훌륭했다. 타 방송사 PD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주 훌륭한 프로그램이라며 해외에서 상도 받아왔다. 그러나 시청률을 매번 바닥이었다. 개편철만 되면 매번 프로그램 폐지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1년 조금 넘기고 <명작스캔들>은 폐지되었다.

스튜디오에 초청된 전문가들이 굳은 표정으로 어려운 단어만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영역을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면 밥줄이 끊긴다고 생각한다. 좀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전문가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돌팔이’ 소리 듣는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예술의 존엄을 훼손하는 <명작스캔들> 따위에는 출연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전문가’도 실제 있었다.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PD 중에 항상 즐거운 표정의 송영석 PD가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굳은 표정의 ‘교양국’ 소속의 교양스러운 PD들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그에게 전문가들의 멘트가 너무 지루하니, 화면 아래에 좀 재미있는 ‘자막’을 넣으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사람 참 좋은 송PD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 다음 녹화 후, 그는 화면 아래 온갖 흥미로운 자막을 집어넣었다. 실제로 자막이 들어간 방송은 이전보다 훨씬 재미있었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다음날 송PD는 교양국의 윗사람에게 호출당해 호되게 야단맞았다. ‘교양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했다’는 이유였다.

‘예능’과 ‘다큐’가 만나다

‘예능 하자는데 다큐한다!’ 도무지 농담이 통하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내 친구 신현만이 꼭 그런다. 매번 다큐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한겨레신문에서 오래 기자도 하고, 경제잡지 편집장도 하고, 지금은 아주 큰 회사 회장을 하는데도 여전히 다큐다. 뭐, 생긴 것 자체가 아주 다큐적이니 뭐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여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매번 다큐하려는 거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개판’된다. 아주 환장한다. 다큐하는 현만이는 매번 예능하려는 나를 무시하고, 예능하는 나는 매번 다큐하려는 현만이를 무시한다. 다른 친구들은 다큐와 예능이 뒤섞인 ‘리얼버라이어티’를 매번 즐긴다.

이런 식으로 언젠가부터 ‘예능’이라는 용어가 아주 익숙해졌다. ‘예능’이란 TV프로그램의 한 분야를 뜻한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지칭한다. 사실 2000년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능 프로그램’이란 아주 낯선 용어였다. 그 이전의 TV프로그램은 대충 ‘드라마’, ‘쇼’, ‘오락’, ‘시사교양’ 등으로 나뉘었다. ‘예능’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쇼’나 ‘오락’이란 용어 대신 ‘예능’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예능’은 원래 예술적 능력을 지칭하거나 연극·영화·음악 등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재미있는 TV프로그램’의 뜻으로만 쓰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능’은 상당히 헷갈리는 용어다. 도무지 기준이 애매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예능 프로그램’이고, 어디부터가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걸까?

‘자막’이다. TV의 자막 유무가 ‘예능 프로그램’과 여타 프로그램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송PD가 교양국의 윗사람에게 혼나고 온 것도 예능국의 전유물인 ‘자막’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교양국PD들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그 따위 유치한(?) 예능적 자막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는 줄 나는 전혀 몰랐다.

사실 기원을 따져보자면 자막은 철저히 ‘교양적’이다. 뉴스 등의 중요한 시사교양프로그램에서 청각장애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입된 보조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자막이 쇼·오락 프로그램에 마구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사교양’의 자막과는 그 형식과 내용이 전혀 달랐다. ‘시사교양’의 자막은 철저하게 등장인물의 말하는 내용과 100% 일치한다. 그러나 예능 프로그램에 새롭게 등장한 ‘자막’은 다르다. 등장인물이 말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 이외의 내용도 있다. 등장인물의 말하는 실제 대사가 아닌 내용이 더 많다.

10년 가까이 시청률 최고의 자리를 거의 놓치지 않고 있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한 장면에 나오는 자막을 살펴보자. 박명수와 유재석 사이의 대화다.

박명수_ (어금니 꽉) “다음 달이면 부인이 출산하시지요?”


자막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10년 가까이 승승장구하는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한 장면.
유재석_(무슨 소리) “다 다 다음 달입니다.”

박명수_ “그럼 다다음 달에 출산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해골그림)

(모함 개그 되치기)

유재석_ (못참아) “지금 여기서 바로 저분 고소할 수 없습니까?”

(초반 치열한 신경전)

시청률 쥐락펴락하는 ‘자막’의 기술

위 내용은 박명수와 유재석이 나누는 불과 12초에 불과한 대화에 나오는 자막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실제 대화는 여기에 나오는 자막의 절반에 불과하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설명과 그림, 그리고 다양한 시각효과가 더 많다. 사람들은 그 많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몰입한다. 외국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산만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막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박명수나 유재석일 경우도 있지만, 꼭 두 사람의 대화내용일 필요는 없다. 자막의 주인은 시청자일수도 있고, 장면을 편집하는 PD일수도 있다. 상황의 자세한 설명일 때도 있고, 의성어·의태어일 수도 있다. 요즘은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스(CG)까지 동원된다. 출연자의 얼굴에 땀이나, 눈물을 그려 넣기도하고, 눈의 색깔이 빨갛게 변하거나, 머리 뒤로 태풍이 불어오기도 한다. 이같이 화려한 자막으로 야기되는 시청자의 감각적 경험은 자막이 없을 때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

<무한도전>이 그토록 오랫동안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자막’의 기술에 있다. 자막의 기술은 PD의 영역이다. 물론 작가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영상의 편집과 맞물려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영역에 자막을 넣는 이는 PD다. 수십대의 카메라가 녹화해 놓은 화면을 오직 하나의 화면으로 편집해내야 하는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뛰어난 에디톨로지적 능력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 거다.

사실 영상과 음악의 편집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아주 익숙했다. 음악이 빠진 영상이 오히려 낯설다. 그러나 자막은 다르다. 이렇게 ‘난삽한(!)’ 예능 프로그램식 자막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영상과 음악만을 편집하는 시사교양의 PD와는 달리 예능 프로그램의 PD는 자막이라는 또 다른 편집수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차원의 재미를 창조할 수 있게된 것이다.

영상에 실제 나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공의 목소리를 창조해내는 것은 바흐친 소설미학의 ‘폴리포니(polyphony, 多聲性)’의 영상적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바흐친의 폴리포니란 음악에서 2성부 이상의 선율이 서로 대위법적으로 얽혀 들어가며 이제까지 없었던 음악적 감동을 창조해내는 것처럼, 소설 또한 무수한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서로 맞부딪히며 갈등과 화해의 화음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대사뿐만 아니라 화면이 정신없이 쏟아내는 자막을 정신없이 쫓아가야 한다. 수많은 목소리가 충돌하는 PD의 편집은 시청자로 하여금 TV안으로 빠져들어 몰입하게 만든다.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는 소설·음악·영상의 재미가 포괄적으로 편집된 총체적 경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나 독일의 TV에서 이런 식의 자막은 거의 볼 수 없다. 폴리포니의 목소리 자체가 몇 개 되질 않으니, 그리 흥미롭지 않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독일의 쇼프로그램을 보자면 엄청나게 지루하다. 오페라를 보다가, 무반주의 소프라노 아리아를 듣는 기분이다. 한국의 시청자가 독일의 시청자에 비해 훨씬 뛰어난 영상독해력과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문화소비에서 TV 의존도도 높아진다. 그렇다 보니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 연극·음악회·미술관 등과 같은 다른 문화영역은 거의 죽을 쑤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통한 ‘맞춤영상정보 서비스(VOD, video on demand)’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시간에 맞춰 TV앞에 앉아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스마트폰만 켜면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만 타면 죄다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쪼그리고 있는 거다. 전 국민이 거의 영상중독이다.

일본 망가식 화면 편집의 대유행

예능 프로그램식 자막 편집은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나타난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다. ‘예능(藝能)’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다. 일본에서는 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통틀어 ‘게노진(げいのうじん, 芸能人)’이라 부른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게노진의 숫자는 엄청나다.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수십 명씩인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이들 각자가 내는 목소리는 대위법적 폴리포니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다. 거의 소음 수준이다. 게다가 출연자들의 목소리만큼이나 다양한 자막이 화면 좌우상하를 날라다닌다. 자막의 크기나 색깔, 모양 또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자막은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이 이토록 ‘화려(?)’한 까닭은 자막의 기원이 일본만화, 즉 ‘망가(漫畵)’의 풍선글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만화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난무한다. 그러나 최근 몇 십 년 동안은 일본만화가 대세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젠 ‘망가’라는 일본식 고유명사가 글로벌한 일반명사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만들어지는 드라마·영화 중에는 일본 망가를 원작으로 하는 것들도 셀 수 없이 많다. 심지어는 할리우드 영화조차 이제 일본 망가를 베낀다.

사실 망가는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의 전통에 서 있기는 하지만, 근대적 망가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미국의 만화에 큰 빚을 지고 있다.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디즈니 만화,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미국식 만화가 주류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망가는 서구의 만화를 제치고 글로벌한 유행을 선도하는 새로운 문화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도대체 일본 망가는 뭐가 특별한 걸까?

많은 사람이 일본 만화 특유의 내용적 비장함이나 스토리 전개를 그 이유로 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망가의 특별함은 ‘화면(畫面)편집’에 있다. 원근법을 무시한 우키요에의 화면편집이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줬던 것처럼 일본 망가는 화면편집상의 특별함으로 세계의 만화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다.

일단, 미국만화의 화면편집은 아주 단순하다.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장면의 수가 거의 정해져 있다. 일단 한 페이지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사각형으로 일사불란하게 나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말풍선 속에 들어있는 텍스트의 글씨 크기도 거의 통일되어 있다. 텍스트의 양도 상당하다. 그림이 만화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말풍선 속의 텍스트가 중심인 듯하다. 정보처리의 부담이 책을 읽는 것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망가는 다르다.


텍스트가 주(主)가 되고, 그림은 종(從)이 되는 듯한 미국만화의 화면편집.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장면의 수는 획일적으로 나뉘어 있다.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장면의 수가 제각각이다. 페이지를 빨리 넘겨야 할 만큼 내용이 급박하게 전개될 때는 장면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한 페이지 가득 오직 한 개의 장면인 경우도 있다. 읽어야 할 텍스트도 거의 없다. 아주 간단한 의성어, 의태어일 경우가 많다. 독자의 마음도 급해져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도 덩달아 빨라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화면이 차분해진다. 망가 주인공들의 대화가 길어진다. 바로 이 같은 독특한 화면편집 방식으로 일본 망가는 독자들의 정서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미국만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서적 경험과 몰입을 가능케하는 화면편집 방식을 통해 일본 망가는 세계만화시장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만큼 독자의 마음도 다급해진다. 말풍선 안의 텍스트를 매번 꼼꼼하게 다 읽어야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미국만화에 비해 일본만화는 영화를 보듯, 그저 화면만 넘기면 된다.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일본 망가가 영상적 편집방식을 만화에 도입했다고 하면,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은 만화적 편집방식을 TV화면으로 끌어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상과 만화, 텍스트의 에디톨로지가 21세기 매체의 특징이다. 도무지 경계가 없다. 이는 만화나 예능 프로그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라 할지라도 감독의 편집이 조금만 처져도 아주 쉽게 망가진다. 요즘 로버트 드 니로가 그렇다. 예전의 그 폼나는 연기자가 아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3류다. 처지는 감독들이 그 훌륭한 연기자를 그렇게 망쳐놓는 거다. 말년의 말론 브란도 또한 그랬다. <대부>나 <지옥의 묵시록>에 나온 그가 아니었다. 이들에 비하면 알 파치노는 나름 잘 버티는 듯하다.

예전에는 누가 주연배우인가가 영화를 선택하는데 가장 중요했다. 감독이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감독이 누구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감독했다면 일단 믿고 본다. 감독의 역량이 영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임을 대중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소위 ‘작가주의’라고 불리는 영화를 싫어한다. 특히 영화평론가가 훌륭하다고 추천하는 작가주의 영화는 절대 안 본다. 허세 중에는 영화평론가의 허세가 가장 ‘쩐다’! 물론 내 생각이다. 내 경험상, 그들이 현란한 용어로 극찬한 영화는 대부분 형편없었다. 정말 지루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영화의 재미와는 상관없이 ‘작가주의’라는 개념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영화감독이 영화의 주체, 즉 영화의 창조자임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 창작의주체가 소설가이듯, 영화창작의 주인은 감독이다. 배우나 스토리 작가가 아니다. 감독이 영화의 실체를 구성하는 편집권을 전적으로 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에디톨로지다.

영화가 편집의 예술이 된 이유는 ‘몽타주(montage) 기법’ 때문이다. 서로 다른 맥락의 화면을 이어붙이는 방법을 뜻하는 몽타주 기법은 미술에서 나타난 ‘콜라주(collage) 기법’의 연장선에 서 있다. 인상파 이후 피카소·브라크 등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신문지·광고 포스터·엽서 등을 오려 붙이는 방법으로 새로운 표현가능성을 실험했다. 이어 몽타주 기법도 나타났다. 미술에서의 몽타주 기법은 서로 관계없는 여러 장면, 사진 등을 한 화면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시간의 흐름을 잡아내는 영화에 적용되면서 인류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영화가 발명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흐르는 시간을 화면에서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일어난 일을 오늘 화면에서 다시 볼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나게 감격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 스토리 없는 화면은 곧바로 지루해졌다.

영화제작자들은 하품을 연신 해대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각기 다른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면 새로운 정서적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때 각기 다른 카메라로 잡힌 화면의 편집은 각기 다른 사람의 시선의 편집을 의미한다. 세상을 보는 각기 다른 시선이 하나의 시간적 시퀀스로 이어져 편집될 때, 앞서 설명한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처럼 아주 흥미로운 ‘폴리포니’ 효과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영화에서는 몽타주 기법이라고 부른다.


일본 망가의 다이내믹한 화면 편집. 내용이 다급하게 전개될 때는 한 페이지에 거의 하나의 장면밖에 없다. 읽어야 할 내용도 거의 의태어· 의성어뿐이다

배우의 연기력까지 몽타주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소위 ‘쿨레쇼프 효과(Kuleschoveffect)’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실험으로 몽타주기법의 심리적 효과를 확인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유명한 배우인 모주힌(Mozhukhin)의 무표정한 얼굴이 찍힌 화면에 각기 다른 세 가지 화면을 이어 붙였다. 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또 하나는 관에 누워있는 여인, 마지막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였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그 뒤에 나온 화면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프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배고파하며 수프를 먹고 싶어하는 표정으로 느꼈다. 관에 누워있는 여인이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표정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표정으로 여겼다. 동일한 배우의 표정이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동일한 장면의 순서만 바꾸는 아주 간단한 몽타주 기법만으로도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도 있고,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웃는 얼굴이 보여준 다음, 칼을 든 사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겁에 질린 표정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 사람은 형편없이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순서를 바꾸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즉, 겁에 질린 표정이 먼저 나오고, 칼을 든 사람을 보여준 다음 웃는 얼굴을 보여주면 그 사람은 아주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을 통한 이미지 왜곡은 오늘날 보수와 진보가 양극단으로 갈려 대립하는 한국 상황에서 아주 자주 목격된다. 똑같이 ‘객관적’ 자료화면이지만 만든 사람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취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적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기 때문에 스티븐 시갈과 같은 형편없는 배우도 여전히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의 사진의 스티븐 시갈이 연기하는 각기 다른 느낌의 표정이다. 그러나 슬픈 표정이나 기쁜 표정이나 열 받은 표정이나 모두 똑같다. 그러나 이 사진 뒤에 어떤 장면을 편집하느냐에 따라 스티븐 시갈은 각기 다른 표정의 연기를 한 것으로 관객들은 받아들이게 된다.

몽타주기법의 핵심은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간중간이 떨어져 있는 원모양의 띠를 완벽하게 닫혀있는 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불완전한 정보 자체를 인간은 못 견뎌 하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그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를 고민하며 밤새 잠 못 이루는 것도 모두 이 같은 불완전한 정보를 완전하게 해석하려는 시도다.

몽타주 기법은 불연속적인 정보,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시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으로 제시된 장면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스티븐 시갈의 각기 다른 표정연기. 전혀 변함없는 스티븐 시갈의 표정이지만 그 후에 어떤 장면이 이어지는가에 따라 관객들은 전혀 다른 감정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몽타주 기법과 같은 방법론이 극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영화는 영화음악이라는 또 다른 편집수단을 가지고 있다. 화면과 음악의 에디톨로지라는 이야기다. 영화음악이 없었다면 영화는 오늘날처럼 주류 문화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폼 잡지 않아서다. 그렇지 않아도 삶이 힘든데,영화마저 날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편안한 이유는 그의 영화편집이 너무 단순하고 자연스러워서다. 도무지 관객을 자극하려는 욕심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전달된다.

홍상수 영화의 핵심은 매번 아주 명확하다. ‘밤낮으로 섹스하고 싶은 생각뿐이면서, 너무 그렇게 폼잡지 마라!’다. 사회적 맥락과 지위, 상황이 그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의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론이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가를 확인시켜준다. 남들도 나와 같다는 요상한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래서 홍상수는 진짜다.

화면, 음악, 가상 세계… 영화 편집의 끝은?

홍상수 영화를 ‘홍상수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의 영화음악이다. 홍상수의 초기 영화에 흘렀던 음악은 산만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매번 아주 단조로운 멜로디의 피아노 음악이 흐른다. 그의 영화에 제대로 어울린다. 아주 묘한 즐거움이 있는 피아노 소리다. 영화음악도 전적으로 감독의 편집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감독이 원하는 편집재료를 제공할 수 있는 영화음악감독의 역할은 주연배우의 연기력보다 중요하다.

최근 감동 받았던 영화를 한번 기억해보라. 그 영화에서 음악이 빠졌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받을수 있는 감동의 양을 절반 이하로 확 줄어든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거다. 화면이 커서가 아니다. 영화관을 꽉 채우는 영화음악 때문이다. 음악은 공간이 악기다. 어느 공간에서 연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이 된다. 사실 화면에서 진행되는 스토리에 몰두하느라 관객들은 배경음악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영화음악이 중요한 거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배경음악으로 완성된다. 바로 이 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 감독의 에디톨로지적 역량이다. 화면과 화면의 편집을 통한 몽타주기법, 그리고 화면과 음악의 편집을 통해 총체적 에디톨로지로서의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이제 가상현실과 영화, 게임 등이 편집되면 또 어떤 에디톨로지의 세계가 펼쳐질까 아주 궁금해진다. 그래서 아주 오래살고 싶은 거다.

201410호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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