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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 루카치 - ‘문제적 개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집단’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적 연대로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계급적 각성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게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사진은 2011년 서구에서 맹위를 떨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장면. / 사진·중앙포토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병약한 남자 카미유와 결혼한 테레즈 라캥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로랑을 만난 라캥은 그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결국 이들은 라캥의 남편인 카미유를 살해한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프랑스 문학의 거장인 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 소설 <테레즈 라캥>(1867)의 줄거리이다. 자연주의(Naturalism)를 대표하는 에밀 졸라의 이 소설은 자연주의를 연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대강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라캥과 로랑은 격렬한 육체적 욕정에 사로잡히는데, 이러한 애정행각을 담은 소설은 독자들에게 강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졸라는 이 소설이 독자들의 격정적이고도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 집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루카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예술이론가다.
그는 이 소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하여 행한 것뿐이다.” 이 말은 자연주의 소설의 경구가 되었으며, 졸라의 문학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이다. 졸라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욕정에 사로잡혀서 격렬한 관계를 맺는 과정을 마치 그저 돼지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돼지의 교미를 관찰하듯이 아무런 감정 없이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는 해부학자나 외과의사가 시신이나 환자의 수술부위에 대해서 어떤 감정도 개입하지 않고 그것을 관찰할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주의의 핵심이다. 현실을 아무런 감정의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자연주의다. 이렇게 보자면 자연주의는 당연히 사실주의(Realism)의 극단적인 경향으로 보일 것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예술이론가인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는 졸라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연주의를 비판하는 핵심이다. 그는 자연주의가 사실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졸라의 자연주의가 현실을 정직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의 한 형태라기보다는 사실주의와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 루카치에 따르면 심지어 자연주의란 현실을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왜곡시킨 부르주아지 세계관을 대표하는 것이다.

자연주의 소설 속에 ‘현실’은 없다


▎루카치는 현실을 아무런 주체의 개입 없이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자연주의’는 결국 현실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의식도 없다고 비판한다. 자연주의를 연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 / 사진제공·박영욱
루카치는 도대체 왜 자연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자연주의는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 즉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주체의 개입이 없이 묘사하고 기술하는 것을 뜻한다. 루카치가 보기에 자연주의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다. 현실을 아무런 주체의 개입이 없이 중립적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의식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 <테레즈 라캥>의 경우에 여주인공이 하층민 출신이라는 것이나 부르주아지 가정의 허구적 모습 등은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그저 라캥 및 로랑의 애욕과 몰락의 과정만을 두 인물에 현미경을 대고 관찰할 뿐이다. 한마디로 자연주의 소설 속에는 소외받고 억압받는 계급의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현실은 그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처럼 취급받는다. 착취와 억압이 발생하는 현실은 자연주의 소설의 세계 속에서는 실종되고 만다.

루카치에게 현실이란 자연주의 소설 속에 그려진 인간과 무관한 현실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 받는 한 노동자 ‘가’의 일상을 아무리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그의 일상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일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작업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이 평범한 일상의 모습 어느 곳에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억압이 드러나는가?

그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라는 특정한 관점이 들어갈 경우에만 가능하다. ‘가’는 사회 속의 한 개인이 아닌 노동자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에만 ‘가’의 일상 속에서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가 드러난다. 루카치가 보기에 주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고자 하는 자연주의적 관점이야말로 이미 착취와 억압의 흔적을 교묘하게 없애는 부르주아지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루카치에게 객관적 현실이란 외과의사처럼 세계를 그저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고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사회는 이미 특정한 계급에 의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모습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지배계급의 세계관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루카치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드러낸다는 것은 현실세계에 은폐된 본래의 모습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참된 모습은 지배계급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눈으로 볼 경우에 드러난다. 이 다른 시각이란 다름아닌 사회의 피지배계급의 시각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은 흔히 말하는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때 그 참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피지배계급의 시각에 접근할 때 그 참된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카치의 사상은 니체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와도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는 듯 하다. 니체의 ‘관점주의’에 내재한 핵심은 진리란 객관적이고 절대불변적인 것이 아니며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루카치의 사상은 니체의 관점주의와 명확히 구별된다. 니체가 모든 진리를 일종의 만들어진 허구로 보았다면 루카치는 어떤 특정한 관점에 서게 될 때 절대적인 진리가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볼 수 있는 관점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 받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이다. 세상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당파성’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전제하지 않는 시각은 이미 지배계급의 시각일 뿐이다.

계급적 당파성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필수조건


▎루카치는 현실 속에 은폐된 진짜 현실의 모습을 들추어서 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라고 보았다. 사진은 리얼리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진작가 고 임응식의 작품 ‘구직’. /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당파성에 대한 루카치의 생각은 어떤 점에서 보자면 엥겔스의 생각과 충돌하며 러시아의 구축주의자들의 생각과도 상충된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이란 곧 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한 과학적 세계관을 의미하며 이는 곧 자연변증법이라는 과학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한편 긴즈부르크, 엘 리시츠키, 지가 베르토프 등 러시아의 구축주의(構築主義, Constructivism) 작가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이란 곧 과학적 세계관으로서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관념도 철저하게 배제된 현실 그 자체를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파성을 강조한 루카치의 생각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은 당파성을 초월한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엥겔스나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생각과 상반된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루카치의 사실주의는 흔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루카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모든 예술적 시도를 퇴폐적인 부르주아지 예술로 간주하여 폐지한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과 공통된 부분이 많다. 물론 스탈린식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루카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사실주의 이론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루카치의 사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사회를 미화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되었던 스탈린식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을 자본주의 사회 자체를 분석하고 드러 내고자 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을 통해서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는 곧 소비에트 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현실적 모순을 은폐시키는 지배계급의 세계관으로서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지 세계관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루카치는 현실 속에 은폐된 진짜 현실의 모습을 들추어서 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리얼리즘, realism)’이라고 보았다. 원래 루카치는 공산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 이윽고 헝가리에 공산당을 창립한 벨라 쿤과 관계를 맺은 이후 갑작스럽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하여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로 자처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사상과 거의 같은 궤적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이전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손꼽히는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루카치는 여기서 소설이란 근대적인 문학 형식으로 규정한다.

근대 소설은 근대 사회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결국 문제적 개인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루카치의 저작 [소설의 이론] 독일어본 표지.
루카치는 스스로를 헤겔주의자로 자처한 만큼 헤겔의 철학을 자신의 이론에 적용했다. 헤겔적 유산 중 하나가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을 고대나 중세의 문학적 형식이 아닌 바로 근대적 문학의 형식으로 본 것이다. 그는 헤겔의 예술철학이 남긴 유산을 ‘미적 범주의 역사화’라는 말로서 집약한다. 미적 범주의 역사화란 말 그대로 미적인 범주들은 각각 역사적 산물로서 해당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미적 범주들은 조각·건축·회화·문학 등과 같은 예술의 장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나아가 문학 내에서도 서정시·서사시·소설·로망스 문학·희곡 등과 같은 장르 내의 장르를 의미할 수도 있다. 헤겔은 한 역사적 시대마다 특정한 장르가 대표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이러한 사실이 사회구조나 인간 지성의 필연적인 진화과정과 맞물려 있음을 강조했다.

루카치 역시 소설이란 미적 범주, 즉 장르가 전적으로 근대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최초의 소설로 간주되는 사뮤엘 리차드슨(Samuel Richardson, 1689 ~1761)의 <파멜라>(Pamela, 1742)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서간체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중세의 로망스 문학과 달리 매우 현실적으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 드러난 이야기들은 황당한 이야기가 아닌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서 진실성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매우 정교하고도 합리적인 체계에 의해서 소설 속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구축된 세계는 예전의 문학 장르와는 달리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세계다. 그리하여 소설가는 마치 자연과학자가 매우 체계적이고도 합리적으로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듯이 소설의 세계를 구 축한다. 과거의 문학 장르와 달리 독자들은 소설에 나타난 가상적 세계를 마치 현실의 세계로 착각하여 받아들인다.

바로 이 점에서 소설 속의 세계는 하나의 객관화되고 독립된 현실 세계가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전의 문학과 달리 소설이 지닌 합리적인 체계성 덕분이다. 로망스 문학과는 달리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축지법을 사용해서 먼 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하거나 입에서 불을 뿜는 용가리와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작가는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소설의 세계를 구축한다. 소설의 세계는 근대의 자연과학자들에게 세계가 마치 독립된 자연 질서를 지닌 자족적 세계로 나타나듯이 독자에게 독립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이는 근대 경제학자들이 발견한 시장경제의 법칙이 마치 현실 자체의 법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과도 상통한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이 왜 근대적인 미적 범주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구축된 소설 속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가 아니며 근대인들이 꿈꾸는 허위적인 세계일 뿐이다. 이는 시장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담 스미스가 꿈꾸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소설가들의 소설에는 항상 가장 완벽하게 구축된 소설 속의 완벽한 세계가 하나의 가상일 뿐임을 보여주는 모순된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균열은 바로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서 드러난다. 루카치는 이렇게 소설 속에 내재된 균열, 다시 말하면 근대 사회 자체의 균열을 드러내는 소설의 주인공을 ‘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결국 문제적 개인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문제적 개인은 합리적인 이성 이 지배하는 사회와 그것으로부터 일탈하는 일종의 신비적 힘, 즉 마성에 대한 매혹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 속에서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지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합리성을 넘어 ‘초인’이라는 마성에 지배된다. 이는 곧 근대사회의 합리적인 특성과 그것이 지닌 허구성의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루카치의 사실주의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문제적 개인이라는 정형화된 인물을 통해서 근대사회의 근원적 균열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부활 꿈꾼 낭만적 마르크시스트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임무를 맡은 주체라고 천명했다.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에 참여한 루카치. / 사진제공·박영욱
<소설의 이론>(1916)의 첫 구절은 수많은 사람에게 인용되었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을 지도 삼아 길을 찾아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라는 이 구절은 곧 자연이 인간에게 낯선 외부의 공간이 아닌 인간에게 포근한 공간임을 뜻한다.

사회와 자연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 아닌 인간과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사회는 인간에게 질곡이 아닌 요람과도 같은 공간이다. 개인과 사회가 하나의 유기적 통합을 이루는 상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신화와 서사시를 모든 사람이 외우고 이를 통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한 고대 사회는 그러한 유기적 통합을 이루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카치는 개인과 사회의 이러한 통합을 ‘총체성 (Totalität)’이라는 말로 요약하며,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이후에도 총체성은 그의 사상을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이 된다.

루카치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ßustsein, 1923)에 수록된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요체를 총체성의 복구로 규정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는 부르주아지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시민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시민이라는 개념은 사회화된 개인, 즉 사회와 개인의 통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치가 보기에 시민사회에서 개인과 사회의 통합은 항상 가상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이미 살펴본 대로 소설은 이러한 가상적 총체성을 묘사하고 있다. 근대 소설은 개인과 사회의 통합이라 는 총체성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근대 사회가 지향하는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이는 철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칸트 철학은 세계와 개인의 완전한 통합을 꿈꾸면서도 주관의 세계와 객관의 세계를 철저히 분리시켜 놓았다. 근대 사회가 그러하듯이 칸트의 철학 역시 객관의 세계에서 주관적인 요소를 철저하게 분리함으로써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의 통합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세계란 객관적인 세계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세계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소설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소설의 세계가 어떠한 인위적인 허구도 제거된 객관적인 현실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카치는 이러한 가상적 총체성을 현실적인 총체성으로 실현하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임무로 보았다. 루카치에 따르면 헤겔은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의 총체성이 허구적인 것임을 깨닫고 오로지 주관의 개입에 의해서만 현실적인 총체성이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헤겔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인 제약 때문에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이러한 총체성을 실현시킬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이다.

루카치는 그 유명한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이라는 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총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임무를 맡은 주체”라고 천 명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현실에 감춰진 진실은 오로지 피지배계급의 시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당연히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 탓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은 모든 생산물이 시장에서 교환을 위한 상품으로 생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품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가치증식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의 이윤은 근본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착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노동력의 가치대로 임금을 지불한다면 자본의 이윤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총체성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을 통해 실현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노동력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야 함을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상품이란 가치를 지녀야 하는데, 노동력의 가치는 자신의 노동력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목적은 노동자의 노동이 그 노동에 지불한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여 이윤을 얻는 데 있다. 그리하여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 된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노동자 자신이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루카치는 인격체인 노동자가 사물과 같은 상품으로 전락한 현상을 ‘사물화(Verdinglichung)’라고 부른다.

루카치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가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상품화, 즉 사물화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적 질서를 벗어나서 완전한 통합적 사회, 즉 총체성을 달성하는 데 절대적인 특권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상품의 분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상품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세포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카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언급 한 근대 소설의 주인공인 ‘문제적 개인’이라는 예외적 존재자가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보편적인 개인으로 확장되고 있 음을 추론할 수 있다. ‘문제적 개인’이 총체성을 지향하는 근대사회 혹은 근대소설의 가상과 그로부터 벗어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는 예외적 인물이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의 존재적 기반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가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나타내는 보편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이론>에서 근대 소설의 주인공은 결코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비극적 주인공이다. 소설의 결말은 오로지 비극일 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루카치에게 자본주의의 현실은 비극적 결말로 치닫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설 속의 ‘문제적 개인’과 달리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처지, 즉 자신이 모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계급적 각성을 통해 계급의식을 갖게 됨을 뜻한다. 그리하여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문제적 개인은 계급적 연대를 통해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 세상을 구원하게 될 임무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가 왜 낭만주의적이고도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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