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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강석경의 ‘저 절로 가는 사람’⑨ | 몽골평원과 대자연의 계시 - 더 없이 완전한 풍경, 초원 위에서 만난 해탈 

양 한 마리와 밀가루 한 포대면 4식구가 1년을 산다는 유목민… 자유인의 삶 만끽하며 불성(佛性) 체화하는 범부의 일상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초원에서 초로의 몽골 여인 수랭이 일생의 사명인 듯 소젖을 짜고 있다.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기도하는 농부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성스러움이 있다. / 사진·강석경
울란바토르는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토’라는 된발음이 들어가서인지 내게는 지명이 그 뜻처럼 혁명의 바람을 품고 있는 듯하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울란바토르에 가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특히 나처럼 아름다운 지명에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라고 자서전에 썼다. 네루다가 울란바토르에 간 것을 1950년대로 기억한다. 소련식 건물이 세워지던 사회주의 정권시절인데 그때도 울란바토르가 그리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지명’이라는 시인의 환상을 깨트리지 않을 정도로?

가이드북 <론리 플레넷>에 소개된 대로 몽골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공화국이 되기 전까지 20세기 내내 외부세계와 단절돼 있었다. 나 같은 한국인에겐 어릴 때부터 들어온 몽고반점, 몽고간장 등의 이름으로 몽골이 기억에 새겨져 있다. 한국 아기들은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가지고 태어난다. 대부분의 동아시아인과 미국 원주민, 폴리네시아인 등이 같은 현상을 가지고 있다는데, 몽골계 인종이 지닌 특징이라 한다. 황색 인종을 왜 몽골로이드라고 부르는 걸까.

유년의 기억으로 몽골이란 이름이 내 무의식에 끈처럼 연결되었나 보다. 한몽 수교 이후로 몽골이란 이름을 들으면 머리가 상상으로 부풀었다. 2002년에 몽골서 흉노고분군을 발굴했던 한 고고학도는 몽골에 오라고 나를 불렀다. 정말 좋은 기회였으나 사정이 생겨서 기회를 놓아야 했다. 그때 언젠가 꼭 몽골을 가리라 했는데 이제야 여기 첫발을 디뎠다.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다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신청하여 지원을 받았다.

내가 울란바토르에 와서 처음 본 것은 대부분의 여행자처럼 칭기즈칸 동상이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이고 다음은 간단사원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옛 이름이 큰 사원이란 뜻의 ‘니쓰렐 후레’라니 불교국가였던 몽골에서 사원은 교육·문화를 포함한 국민들 삶의 중심이었던 것 같다.

음악처럼 희미하게 들리는 라마의 만트라


▎간단사원은 몽골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원으로 울란바토르 사람들의 종교와 밀접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10개의 법당에서 약 900여 명의 승려가 수행 중이다. / 사진·강석경
국영 백화점에서 한 정류장만 걸어가면 오른편 위쪽으로 간단사원 가는 길이 나오니 역시 도시의 중심에 속한다. 인도가 있는 양쪽 건물은 낮고 수수하며, 도로 한 가운데 화단이 있어 절로 가는 길답게 여유로웠다. 눈에 다가서는 초록 기와지붕은 내림마루의 팔작지붕인데 몽골과 불교권의 아시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축형태라 친근감을 갖게 했다.

비둘기 떼를 뚫고 관광지처럼 상주하는 사진사 옆을 스쳐가니 양편으로 낯익은 몽골 스투파가 서 있었다. 중심에 있는 관음전의 흰 건물로 들어서니 많은 신도와 거대한 관음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 개의 팔을 가진 관음대불은 티베트계 불상이다. 높이 26m에 이르는 그 대작(大作)은 불자들의 시주로 현대에 만들어졌다. 긴 염주를 걸친 관음의 손에 비둘기가 앉아 있다.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니 위에서 라마의 만트라가 음악처럼 희미하게 들려 왔다. 수미단의 촛대에선 불꽃이 타오르고 한 신도는 달라이라마의 청년기 사진이 놓인 왼편 불단에 이마를 대고 경배했다. 사람들을 따라 나도 마니를 돌리며 법당 뒤로 가니 벽면의 유리 장식장 안에 수많은 라마상이 층층이 모셔져 있었다. 한국 절에서는 500나한상을 볼 수 있지만 갖가지 색깔의 가운을 걸치고 좌정한 채 벽면에 들어찬 라마상은 현란하고 이국적이었다.

신도들은 여기저기서 기도를 올리는데, 법당 안 어디든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시줏돈도 놓고 싶은 곳에 올려놓았다. 간단사원의 직원인 듯한 두 사람은 다니며 단에 놓인 시줏돈을 거두어 들였다. 한국 절과 분위기가 달라 천천히 둘러보다가 입구 쪽으로 나서니 시끄러웠다. 여직원이 추레한 행색의 한 여자를 문밖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중년여자는 쫓겨나면서도 계속 소리치고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 사납게 발길질했다.

추측건대 여자는 법당 여기저기에 놓인 시줏돈을 훔친 것 같았다. 그래서 직원들이 돈을 거둬들인 모양이다. 관음전 앞을 오가며 주먹 쥔 팔을 내뻗고 미친 듯이 떠드는 여자의 모습은 자못 당당했다.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은 가난한 내가 당신의 시줏돈을 가져가길 원해”라고 말하는 것일까? 맹렬한 주먹질은 내가 어릴때 시골 머슴아들이 곧잘 하던 ‘엿먹으라!’는 욕이었다. 오래전 잊고 있었던 욕.

모두가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한 젊은 여성이 관음상을 향해 두 손 모아 극진히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여 관음이 아니라 악마라도 귀 기울여 들어줄 것 같았다. 먼지까지도 정화시킬 것 같은 여자의 기도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감화시켰다. 종교 그 자체 같은 진실의 힘이었다. 관음전 문을 경계로 동시에 펼쳐지는 성과 속의 그림. 간단사원에서도 인간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읽은 불교사에 의하면 몽골 땅에는 기원전 3세기 경 불교가 들어왔다.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때 티베트불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됐지만 칭기즈칸의 아들 우구데이칸이 수도를 세우고 쿠빌라이칸이 수도를 대도(베이징)로 옮기기 전까지 40여 년간 번성했던 카라코름(하르호름) 유적에서도 불상들이 발굴되었다. 같은 유목민인 티베트의 불교와 몽골 고유의 샤머니즘이 융합되어 발전된 라마불교는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종교도 역사의 바퀴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20세기 스탈린 정권에 의해 사회주의로 변모한 몽골인민공화국은 1937∼39년 사이에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고 라마불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이때 770여 개의 사원이 11개로 줄었고, 체포되고 총살된 승려가 3만여 명에 달했다.

이데올로기의 독이 너무 강했을까. 현재 250여 개의 사원이 재건되고 승려도 늘면서 불교가 되살아난다지만 간단사원에서 본 독경하는 라마들의 모습은 무척 산만했다. 예경 시간에 신도들이 참관하여 라마에게 직접 시주하는데, 두리번거리고 한눈을 파는 라마에게 수도자의 맑은 기상을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울란바토르에 온지 일주일이 되자 박물관도 거의 보고 흥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통역 안내를 맡은 코디네이터에게 이틀간 키릴 문자를 배웠지만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진도는 더 나가지 않았다.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노래를 좋아한다면 내 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가라오케에라도 가련만 한국에서도 내 발로 노래방이라곤 가본 일이 없다. 울란바토르에 와서 제일 많이 본 것은 한 건물 건너 붙어있는 ‘KARAOKE’ 상호다. 수많은 가라오케를 헤아리면 울란바토르는 한국 도시들을 당당히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라오케 왕국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것 같다.

나는 초원이나 고비사막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다. 올 초부터 일에 떠밀려 몽골에 관한 정보도 거의 없이 <론리 플레넷>만 달랑 들고 왔다. 여기 와서 들은 여행방법은 간단했다. 세계여행자가 많이 가는 중심가의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투어에 끼라는 것. 그리하여 드디어 일주일간 고비사막 투어에 다녀올 수 있었다.

동방박사처럼 빛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갑옷처럼 가시를 두른 고슴도치를 보았다. 미어캣처럼 두 발을 들고 서서 망을 보는 습성이 같은 작은 동물도 보았다. 쥐보다는 크고 토끼보다는 작은 녀석도 신기했다. 혹이 두 개인 낙타도 타보고 밤마다 은하수 아래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헤아리고, 새벽에 일어나 게르 밖으로 나서면 텅 빈 사막이 원초의 땅처럼 펼쳐지는 감동을 맛보았다. 고비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니 아파트와 매연이 가득한 도시가 괴물 같았다. 다시 떠나야 하는 것은 확실했다. 전에 한 강연에서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은 깨닫기 위해서라고.

울란바토르도 서울처럼 국적불명의 도시다. 하긴 중심가에 이국적인 복장의 마르코 폴로 동상이 한 손에 책을 들고 서 있으니 쿠빌라이칸 시대의 국제도시를 재현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카페 암스테르담의 2층 테라스에서 거리의 인파를 바라보니 한 남자가 두 손으로 무언가 받쳐 들고 걸어갔다. 양탄자 같은 받침 위에 동상 모형이 놓여있는데 2만 원부터 500원까지 지폐에 박혀 있는 칭기즈칸의 초상이다. 칭기즈칸 모형을 내려다보는 나를 발견하고 남자는 사진을 찍으라는 듯 그것을 번쩍 들어올렸다. 몽골의 태양이 눈앞에 있으니 여기는 분명 몽골이다.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은귀거리가 흔들리면서 머리까지 흔들렸다.

이 가벼운 흔들림, 그것은 내가 의도한 대로 살아있다는 생동감이 아니라 머릿속이 빈 듯한 공동(空洞)의 울림이었다. 영혼이 마르는 소리였다. 영혼이 마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이 무미한 도시를 어서 떠나 동방박사처럼 빛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문득 ‘게르 투 게르’가 생각났다. 세 달간 머물 나라로 떠나면서 나는 비행기 안에서야 가이드북을 처음으로 펼쳤다. 앞부분을 들쳐보다가 ‘게르투 게르’란 활자와 박스기사에 눈이 갔다. ‘혁신적인 개념의 게르 체험 프로그램’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기사다. 유목민의 집에서 거주하며 몽골문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는…. 이렇게 하여 ‘게르 투 게르’는 돌파구가 되었다.

먹어야 할 것만 먹는 군더더기 없는 식사


▎울란바토르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거리에 있는 샨사르의 게르. 동편으로는 둔덕같이 낮은 야산이 솟아 있고 반대쪽으로는 야트막한 흙산이 초원을 감싸고 있다. / 사진·강석경
울란바토르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뒤 샨사르에 도착, ‘게르 투 게르’서 보내준 차로 길 아닌 초원으로 들어서니 이제야 제 길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트였다. 30∼40분 울퉁불퉁 흔들리며 달리다가 군데군데 몇 채의 게르를 지나자 낡은 차는 초록 지붕의 목조 가옥 앞에 멈추어 섰다. 유목민은 다게르에서 사는 줄 알았더니 뜻밖이었다. 부속건물 같은 작은 게르 한 채 가 가까이 있기는 했다. 게르가 있는 동편으로는 둔덕 같이 낮은 야산이 솟아 있고 반대쪽으로는 야트막한 흙산이 초원을 감싸고 있었다. 집 뒤로 멀리 한 채의 게르와 말 우리가 있을 뿐 이 집 앞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더 이상 민가도 길도 없을 듯했다.

안경을 쓴 여주인이 손님을 맞는데 건강하고 활달해 보이는 모습이 유목민이라기보다 한국 아파트의 이웃처럼 세련되고 친숙한 인상이었다. 문으로 실내에 들어서니 주황색 바탕에 문양이 있는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반닫이가 한가운데에 놓여 있고 그 위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과 탕가 엽서들을 유리 액자 속에 넣어두었다. 옆의 반닫이 위엔 거울과 약간의 화장품, 딸인 듯한 젊은 여성의 독사진이 놓여 있었다. 한국의 의과 대학에 유학 중인 예비 의사라고 했다. 결혼한 맏딸과 직장 다니는 아들은 울란바토르에 살고 예쁜 막내딸도 부모 곁을 떠나 있었다. 가구 위에 불단과 가족사진이 놓인 광경은 고비사막에서 본 유목민의 게르 내부와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게르가 아니라 거실 겸 방인 이곳에 머물렀다. 부엌엔 할머니가 침상을 놓고 살았다. 처음엔 전통 게르가 아니라 실망했지만 한편 창이 있는 밝은 실내와 의자, 탁자가 있는 집에 머물게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게르에는 천장이 뚫려있지만 창이 없어 아무래도 어둡고 갑갑하다. 게르엔 당연히 책상도 없다. 누구든 익숙한 것을 애호하는 법이다.

집 앞에 태양열 장치가 되어 있어 이 집도 휴대폰을 충전시키고, 날이 저물자 희미한 불이나마 전등을 켰다. 오지에 사는 유목민들도 태양열을 이용해 TV를 보며 세상과 소통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니 다행이다. 책을 보기엔 어두워 울란바토르서 사온 손전지를 켜고 몽골에 관한 책을 들쳐보고 있으니 바깥주인인 남편 작드더르즈 씨가 돌아왔다. 마르고 키가 큰 남자는 순박하고 선량해 보여서 한눈에 호감이 갔다. 그는 손님에게 반가움을 표하느라 몽골어로 말을 걸며 유목민의 비상식량인 튀긴 빵을 수테차에 적셔 먹었다.

그것이 저녁식사였다. 먹어야 할 것만 먹는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식사를 보니 상이 미어져라 차려놓고 버리는 한정식의 낭비가 반생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 한 마리와 밀가루 한 포대면 4식구가 1년을 산다는 유목민들. 어슴푸레한 빛 아래서 하루의 양식에 감사하며 식사하는 그의 모습이 성실하게 살아온 자의 초상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6시40분. 문 밖으로 나가 소떼가 있는 곳으로 가니 어느새 부부가 나와서 소젖을 짜고 있었다. 낡은 델을 작업복으로 입고 소 젖을 짜는데, 내가 해보려 하니 자리를 내주었다. 낮은 의자에 앉아 소 젖꼭지를 찾아 엄지와 검지로 잡으니 미지근한 살의 촉감이 낯설었다. 소젖 짜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두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젖을 훑어 내리면 우유가 나오지만 서툴러 손가락에 힘을 주니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5분 정도 시도했던가. 그것도 일이라고 팔이 아팠고 인내심 없는 도시인은 일어서고 말았다.

물총으로 쏘는 것 같이 나오는 우유가 양동이에 차면 안주인 찬드 수랭은 양동이 두 개를 들고 집으로가 부엌 화로에 불을 땐다. 화로 옆에는 늘 말린 쇠똥이 쌓여있었다. 소는 모든 것을 내준다더니 쇠똥도 연료가 된다. 온 초원에 쇠똥무더기가 널려있지만 쇠똥을 말리는 것도 일이라 어제 저녁엔 안주인과 함께 말린 쇠똥을 부엌에 가져다 놓았다.

화로에 놓인 큰 팬 안에서 우유가 끓어오르니 수랭이 국자로 떠서 다시 쏟아 붓고 뜨고 붓는 작업을 반복했다. 거실 한쪽에 몇 개의 양동이가 한데 놓여있는데 ‘으름’은 우유를 끓이면 위에 노랗게 또는 기름을 걷은 것으로 일종의 버터다. 타락(요구르트)은 발효된 우유가 덩어리진 것으로 우유를 끓일 때 한 국자씩 넣어 우유를 적당한 온도로 데우면서 다시 덩어리지게 하여 그것을 주머니에 쏟아붓는다. 하루 정도 걸어놓으면 물이 완전히 빠지면서 덩어리가 되고 그것을 다시 무거운 나무로 눌러 반나절 뒤 꺼내면 ‘뱌슬락’이라고 불리는 무가염의 천연 치즈가 된다. 고비투어를 할 때 달란자가드 시장에서 유목민이 만든 염소치즈를 먹은 적이 있다. 소금조차 넣지 않아 심심했으나 치장된 가공품에 길들여진 혀에도 천연의 맛이 오롯이 감기는 것 같았다.

천지에 무사를 비는 몽골인의 기도


▎타락은 발효된 우유가 덩어리진 것이다. 그것을 다시 무거운 나무로 눌러 반나절 뒤에 뒤 꺼내면 ‘뱌슬락’이라고 불리는 무기염의 천연 치즈가 된다. / 사진·강석경
수랭은 아침에 끓인 첫 우유를 붓다의 불단에 올렸다. 두 손 모아 경배하고 이어 국자에 우유를 담아 밖으로 나갔다. 아침 해를 향해 초원에 서더니 선서하듯 왼손을 들어올리고 입속말로 기도를 시작했다. 천지에 무사를 비는 기도이리라. 하늘의 천신 탱게르, 대지의 지모신 에트겡에흐께 하루도 빠짐없이 구하는 자비와 축복, 오늘은 맑으나 내일은 천둥이 칠지도 모르는데 사랑하는 가족과 가축들을 보살펴 주십사고….

기도가 끝나자 오른손에 들고 있던 국자의 우유를 허공에 뿌렸다. 신성한 우유를 바치며 만물을 달래는 것이다. 몽골인의 샤머니즘은 자연에 대한 경배라 자연이 곧 절이었다. 길을 가다가 외딴곳에 세워진 푸른 천이 감긴 오보는 이정표 역할도 하는데, 그 아래 쌓인 돌무더기는 모두의 염원이 담겨있어 십자가나 어떤 종교의 표식보다 감동을 주었다.

수랭은 점심으로 보즈(찐만두)를 만든다고 부엌에서 할머니와 반죽을 밀었다. 송편을 만들 때 반죽을 떼어내 듯 적당한 양을 칼로 잘라 손으로 폈다. 그 안에 다진 양고기를 넣어 만두를 빚는데 모양이 예뻤다. 살림꾼들은 모든 걸 잘한다. 수랭이 나보고도 만두를 빚으라 했지만 휴대폰으로 사진만 찍었다. 만두 빚는 손을 찍다가 나는 수랭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펴보았다. 손마디는 울퉁불퉁하고 손가락도 휘어져 있었다. 관절염 같았다. “도우터, 메디신” 하는 걸 보니 딸이 약을 보내준다는 말이었다.

다음날 수랭은 나를 샘에 데려갔다. ‘베이비 카우’에게 가자길래 함께 빈 물통을 들고 나섰다. 20여 분 따라가니 나무가 있는 숲에 송아지들이 모여 있고, 작은 건물도 나왔다. 그 속에 들어가니 우물이었다. 정부에서 만들어준 지하수인 듯했다. 물이 있으면 어디서든 산다. 수랭은 두레박으로 우물을 길러 밖으로 난 수통에 물을 쏟아부었다. 송아지들이 모여들어 물을 마시니 동물에게 물을 먹이는 장치였다. 수랭은 빈 물통 2개에 물을 담아 두 손에 들고 하나는 나와 함께 들자고 내밀었다. 왼편에 선 나는 오른팔로 거들었는데 아픈 팔이었다. 몽골 오기 전 팔이 아파서 MRI를 찍으니 목디스크가 진행 중이었고 어깨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다.

종일 일하는 사람에게 차마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고 도와주는 것도 맞다. 그런데 닛산 지프와 오토바이가 있는데 손가락 관절염이 있는 사람이 왜 이걸 들고 가지? ‘머신(machine)’이란 단어를 환기시키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멀리서 오토바이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작드더르즈 씨였다. 나는 반색하고 두 사람을 물통과 함께 보낸 뒤 빈손으로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유목민이야말로 문명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차가 필요한 사람은 도시인이 아니라 길 없는 초원에 길을 내는 개척자유목민이다. 몽골의 모든 유목민이 차를 가졌으면 좋겠다. 버려진 초원에 게르를 세워 인간의 온기를 심고, 외딴 유목 생활과 몽골의 정체성을 지키는 대가로 세상의 편리를 누렸으면 좋겠다.

여기 머무는 1주일 동안 샤워를 포기하고 있었지만 사흘째에 머리를 감으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수랭이 머리를 감으라고 이날 길러온 물을 대야에 붓고 샴푸를 주었다. 나도 물을 길어오는 데 일조했으니 물을 쓰는 호사를 해도 되겠다. 수랭은 머리를 감고 남은 물로 빨래도 했다. 더위에 머리라도 감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어제처럼 저녁을 사양하고 밖으로 나서니 소떼 가운데서 안주인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니 묶어 둔 송아지를 풀어서 어미젖을 먹이고 젖이 돌면 다시 묶어두곤 젖을 짰다. 처음엔 아침에만 소젖을 짜는 줄 알았지만 해질 무렵에도 작업하고 하루 두 번은 우유를 받았다. 여자는 젊은 날부터 천직인 듯 소젖을 짜며 손가락이 휘는 관절염을 얻었으리라. 남편 작드더르즈 씨는 가까이서 쇠똥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마른 똥은 가볍지만 무더기로 싸놓은 젖은 쇠똥은 나무삽으로 들기에도 무거웠다.

그들을 보니 유목민에게 부부란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무쌍한 대자연에 순응하며 자식과 동물을 기르고 고락을 함께 하니 하늘의 명이 아니겠는가. 어스름이 깔리는 초원에서 초로의 여인이 사명인 듯 소젖 짜는 광경은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기도하는 농부보다 더 성스러웠다.

몽골의 허허벌판에선 명예도 권력도 무용


▎말을 타고 양과 염소를 모는 유목민 작드더르즈 씨.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남성의 야성적 매력이 넘친다. / 사진·강석경
9월에도 낮엔 무덥지만 밤이 되면 열린 창으로 바람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인지 모른다. 8월에도 눈이 내린 곳이 있다던데. 일찍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살그머니 문밖으로 나서니 밤하늘에 별들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낮에는 태양에게 겸손하게 자리를 내주었지만 만물이 꿈꾸는 밤은 그들의 차지였다. 외우고 외워도 소용없는 별자리는 더 이상 찾지 않고, 나는 홀로 밤의 세계에 초대된 듯 황홀하게 은하수를 들이마셨다. 자신의 소우주에 자족하여 몽골의 밤하늘을 누비지 못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리라.

새벽에 한차례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아침엔 날이 개었다. 하늘은 흐리고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벌판엔 서리가 내렸다. 비에 떨었는지 송아지가 유난히 울었다. 수랭은 델을 껴입고 한결같이 소젖을 짜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소젖을 짜려고 다시 시도했다. 소 뒷다리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아 늘어진 젖꼭지를 두 손가락으로 짜려니 소가 자꾸 자세를 바꾸었다. 나의 서투름에 초짜임을 알아차렸는지 소가 갑자기 걸음을 떼더니 천연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노 밀크”, 겸연 쩍어하는 내게 수랭은 소젖이 더 이상 없는 거라고 무마시켰다. 노동에 관한 한 나는 밀크 한 방울도 보탤 수 없는 무용한 사람임을 자인했다.


▎몸에 좋은 온갖 천연물을 먹는 몽골 유목민의 아이들은 거의가 우량아이고, 평생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건강한 체질을 유지한다. / 사진·강석경
다음날 우리는 나무를 가지러 야산에 갔다. 먼 길은 아니지만 차를 타고 가니 작드더르즈 씨가 미리 와서 모아놓은 땔감이 쌓여 있었다. 유목민의 생활은 게르부터 친환경적이다. 자연에서도 버릴 것이 없었다. 쇠똥도 잔가지도 모두 연료로 쓴다. 차 화물칸에 나무를 던져 넣고 나도 땔감을 주워 모았다. ‘게르 투 게르’에 선 외국인들이 유목민 생활을 알도록 함께 일하라거나 다른 유목민 집을 방문할 때 데려가도록 요청하는 듯했다. 수랭은 내게 염소와 양떼를 멀리 데려가라고 츄츄 소리를 내며 막대기로 모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전날은 유목민의 게르 두 곳에 데려갔다.

거기서 처음으로 발효된 말젖 아이락을 마셨다. 알코올이 포함돼 있어 먹지 않으려 했으나 유목민이 권하면 거절하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약간 시큼하지만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두 살짜리 아이는 아버지가 주는 아이락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몸에 좋은 온갖 천연유제품을 먹으니 유목민 아이들은 거의가 우량아고 몽골여자들도 체격이 좋다. 다른 게르에선 마침 찌고 있던 양머리도 대접받았다. 양고기 중에서도 머리는 최고의 대접이라고 했다. 나는 주인이 준 손칼로 유목민이 하는 대로 삶은 양고기를 잘라먹었다. 어제는 목마른 양에게 물을 갖다 주고 콧등을 쓰다듬은 손으로…. 내가 양이래도 어쩔 수 없다.

오후가 되니 날씨가 조금 풀렸다. 점심은 수테차에 빵을 적셔 간단히 먹었는데 부지런한 수랭은 어느새 효쇼르(튀김만두)를 빚어 3시경 간식으로 주었다. 해질 무렵엔 나를 차에 태우고 양을 몰러 간 남편을 찾아가자고 했다. 차로 10여 분도 못 가서 수백 마리의 양과 염소 떼를 만났다. 한 남자가 뒤에서 말을 타고 양떼를 몰며 오고 있었다. 말을 탄 모습이 근사해서 이웃 유목민인가 했더니 작드더르즈 씨였다. 그가 모자를 써서 잘 알아보지 못했다. 또 말을 타고 양을 모니 오토바이를 탈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전날 방문한 유목민은 세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갓 20대가 된 둘째 아들이 전통복장 델에 긴 장대를 쥐고 말을 탄 채 들판으로 양을 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늠름하여 내가 젊은 여자라면 반했을 것 같았다. 나도 유목민으로 태어났더라면 저 자연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리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떤가. 몽골의 허허벌판에선 명예도 권력도 무용하다.

광막한 자연 속의 해탈


▎몽골 평원의 게르를 방문하는 손님에게 대접하는 양머리 찜. 양고기 중에서도 머리는 가장 맛 있는 부위로 최고의 대접으로 간주된다. / 사진·강석경
그날 오후 7시가 넘어 작드더르즈 씨는 나를 차에 태워 여러 곳을 보여주었다. 구불구불 산길을 넘어 차를 세우니 양우리와 창고 같은 작은 건물이 안쪽에 있었다. ‘윈터 캠프’ 유목민들은 양이나 염소의 목초지를 따라 철마다 거처를 옮겨 다닌다. 내가 머물고 있는 그들의 여름집에서 20여 분 걸어가면 야산 아래 양우리와 창고가 있는데 봄가을에 머무는 스프링캠프였다.

산 위의 이곳은 추운 겨울에 양을 돌보며 지낼 곳이다. 작드더르즈 씨가 창고 문을 여니 해체된 게르가 놓여 있었다. 초원에서 유목민들은 다른 사람이 터를 잡은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 게르를 세워 살 수 있다.

지역의 자연환경 파수꾼이기도 한 작드더르즈 씨가 그날 내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특별한 것이었다. 산을 넘어 다시 평원을 달리니 고원이 멀리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둔덕처럼 솟았으나 평평한 정상에는 하얀 표석이 한 점 꽂혀 있었다. “템플!” 작드더르즈 씨가 손으로 하얀 표석을 가리키며 고원에 난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신성한 무엇에 다가서는 듯하여 침묵했다. 정상에 차를 세우니 그제야 스투파가 확연히 나타났다. 탑만 있는 무인의 절이었다. 성역의 표시로 스투파 주위에 철책을 쳐놓았고, 뒤로 오보도 두 개 세워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정적만 고여 있고 짙푸른 하늘 아래 흰 탑만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이 고원에 탑이 오롯이 서 있다니…. 하늘 아래 경배하리라. 고원이 멀리서 보일 때부터 나는 무언의 소리를 듣고 마음속으로 겸허하게 오체투지 했다.

호수로 가려고 작드더르즈 씨를 따라 숲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말 네 마리가 나뭇잎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옅은 갈색의 몸채에 까만 갈기를 가진 말이 내 앞으로 걸어오는데 나는 자리에 가만 멈춰섰다. 말들은 패밀리처럼 모두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신화 속의 주인공 같았다. 나는 외계인으로 동화의 세계에 잘못 들어선 듯했고, 자연의 주인인 그들을 위해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어느새 하늘에 노을이 깔려 문득 고원을 향해 돌아서니 고원 아래로 수십 마리의 말떼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평온한 귀가였다. 광막한 자연 속에 두 사람만 빼곤 인간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온통 말과 새 천지였다. 더없이 완전한 풍경이었다. 낙원이 거기 있었다. 고원 위에서 스투파도 자연의 주인들을 내려다보는데, 해탈이 거기 있었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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