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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역사상 모든 제국의 고향 

페르시아 혹은 이란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600년 전 동서를 최초로 석권한 대제국 아케메네스가 로마, 몽골의 원형… 다른 민족·언어·문화를 인정하면서 각자의 이익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철학’ 구현

▎키루스 황제 시절의 최고 계획도시로 알려진 페르세폴리스 입구를 재현한 그래픽.
이란이 글로벌 비즈니스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 9월 17일, 유엔 안보리 5개국과 독일이 이란과의 핵 합의안 도출에 성공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2006년부터 시작된 세계 각국으로부터의 경제·금융 제재도 곧 풀릴 전망이다. 미국이 조건부 해제를 내걸었지만, 전면 해제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유럽과 일본, 중국이 뛰어드는 판국에 미국만 뒤쳐질 수는 없다.

석유매장량 세계 4위를 자랑하는 나라가 이란이다. 제재 해제 이후 하루 600만 배럴의 석유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석유는 현금장사다. 한동안 막혔던 석유 판매가 이뤄지면서 곧바로 돈방석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경제 제재 이후 개발이 중단된 공항·항만·도로와 같은 국가 기간산업에서부터, 인터넷·모바일·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이 테헤란으로 연결될 것이다. 한국에도 적지 않은 기회라고 여겨진다.

전 세계의 러브콜을 받는 이란의 모습을 통해,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페르시아 대제국의 부활이 점쳐진다. 페르시아는 현재의 이란을 발판으로 한 나라다. ‘페르시아=이란’이라 보면 된다. 한국인에게 페르시아는 강남의 테헤란로, 배꼽춤 나아가 기하학적 문양의 주단(綢緞) 정도로 와 닿을 듯하다. 그러나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은 역시 할리우드발 영화 <300>이 아닐까? 황제 단 한 명만을 위한 노예국가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전사 300명에게 몰살당한다는 황당한 얘기가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페르시아는 수만 명의 오합지졸로 이뤄진, 미개하고도 어두운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 <300> 탓이기도 하겠지만, 페르시아에 대한 어두운 편견은 무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알게 모르게 서방세계의 입맛에 의해 그려진, 왜곡된 역사가 범인이다.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의 세계관은 유럽과 미국이 설정한 역사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유럽을 문명대국, 문화입국으로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문화와 국가가 활용될 뿐이다.

유럽의 세계관에 의해 일그러진 페르시아 역사


▎1. 아케메네스 대제국의 왕실 문양. 독수리 문양은 최고존엄의 상징이다. / 2. 기원전 5세기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도. 동쪽으로는 인도 북부, 서쪽으로는 이집트와 그리스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다.
유럽이 페르시아를 본격적으로 탐색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다. 당시 유럽이 가장 궁금해 했던 부분은 할렘(Harlem) 제도다. 왕에 소속된 여성 기쁨조로, 터키 술탄을 위한 할렘은 유럽인의 본능적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에는 무지와 반(反)문명과 같은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광의적으로 중국이나 일본도 포함되지만, 협의적으로는 이슬람권의 중동지역이 오리엔탈리즘의 배경이다. 노예와 매춘부의 전당으로서의 할렘이다. 오리엔탈에 대한 유럽의 문화적·문명적 우위를 구축시켜준 최적의 공간이 바로 할렘이다. <오달리스크(Odalisques)>라는 제목의 그림은 인상파의 대부(代父) 마네의 출세작이다. 벌거벗은 할렘의 여성을 묘사한 것으로,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독교의 편견과 오만이 깃든 그림이다.

이란이 가진 국가적·국민적 자존심은 서방 그 어느 나라에 못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종교적 열정이나 민족주의에 기초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형 심리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 자존심이다. 페르시아야말로 인류 문명 최초로 동과 서를 정복한 대제국이란 점이 그 같은 객관성의 근거다. 기원전 550년 전 키루스 대황제(Cyrus the Great)를 통해 탄생된 아케메네스 대제국(Achaemenid Empire)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현재의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인도 북부, 서로는 발칸반도와 그리스 일부, 남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인류 최초의 동서 통합 대제국이다.

학교에서 세계사를 열심히 배운 사람이라면 알렉산더 대왕의 고대 그리스야말로 동서를 연결한 최초의 대제국이라 말할 듯하다. 기원전 4세기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일으킨 그리스가 이집트, 페르시아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창조해냈다고 믿을 듯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알렉산더로 이어진 고대 그리스 역사를 서방문명의 원점으로 해석하는, 유럽 중심 사관에 세뇌당한 잘못된 세계관이다. 인류 최초의 동서 대제국은 알렉산더보다 200여 년 전에 태어난 키루스의 아케메네스다. 알렉산더에 의해 기원전 330년 멸망하기까지 무려 220년 동안 지속된 아케메네스 왕조가 인류 최초의 동서통합 대제국에 해당된다. 알렉산더는 정복자다. 이미 동과 서를 하나로 합친 아케메네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동서를 하나로 엮게 된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이미 만들어진 동서 대제국을 다시 한번 더 이어받은 인물에 그친다.

뉴욕 맨해튼에서 만난 페르시아의 그림자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주력부대인 궁사들. 활은 유목문화를 상징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처음의 발상이 관건이다. 동을 넘어, 문화와 언어가 다른 서까지 자신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발상과 실현 가능한 파워가 핵심이다. 이집트 문명이 기원전 3천 년부터 시작됐다고 하지만, 아프리카 지방을 벗어나 동쪽의 인도나 서쪽의 유럽까지 영토확장에 나선 적은 없다. 그 같은 ‘위험한’ 발상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발안하고 행동에 옮긴 인물이 바로 키루스다. 동서 대제국의 저작권은 알렉산더 대왕이 아니라, 키루스 대황제에게 있다.

키루스는 2600년 전의 역사만이 아닌, 21세기 미국 근현대사에서도 생존하고 있는 인류의 영웅이다. 아케메네스 대제국 창설자가 미국에 소개된 계기는 미국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에게 있다. 그랜트 사후(死後)에 세워진 그랜트 묘소가 바로 키루스를 미국 땅에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그랜트는 남북전쟁 당시 북군을 대표하는 장군으로, 링컨 암살 이후 혼란한 정국을 이끄는 과정에서 대통령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보다 장군이란 타이틀에 적합한 무장(武將)이다. 그랜트 묘소는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뉴욕 맨해튼에 있다. 맨해튼 북쪽 뉴욕 122번가의 서쪽 끝부분과 바로 옆의 허드슨강에 끼인 공원이 묏 자리다. 부인과 함께, 묘소에 들어선 관에 각각 안치돼 있다. 잠들지 않는 도시 맨해튼이라고 하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의 한적한 풍경이 그랜트 묘소 주변을 맴돈다. 뉴욕의 속살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은밀한 장소지만, 자동차를 몰고 가도 주변에 주차할 공간이 넘친다.

그랜트 묘소는 직사각형 단층건물과 그 위에 세워진 원통형 탑으로 구성돼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두 마리의 독수리 석상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신전을 연상케 하는, 중간 부분이 약간 부풀어오른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 6개가 1층 입구에 드리워져 있다. 1층 건물의 가로 세로 비율은 대략 3대 2 정도다. 황금비율로 알려진 아테네 신전의 건물과 비슷한 양식이다. 텔레비전 브라운관의 가로 세로 비율에서 보듯, 본능처럼 와 닿는 인류의 미적 감각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유산이자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랜트 묘소는 1층의 완벽한 구조와 달리, 1층과 그 위의 원통형 탑을 함께 조망해보면 뭔가 불편하고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1층 건물에 견줘 위의 탑 부분이 너무 크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형태의 건축물이다. 더불어 원통형 탑 끝부분에 걸쳐진 고깔형 원반도 이국적으로 와 닿는다.


▎1.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운 키루스 황제의 벽화. 200년 뒤에 태어난 알렉산더 대왕은 키루스의 복사판이라 보면 된다. / 2.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알렉산더 대왕. 동서통합을 이룬 영웅 2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랜트 묘소는 1888년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대의 건축가 ‘죤 둔켄(John H Duncan)’이 65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선된다. 당시 둔켄은 ‘마우솔레움 묘소(Tomb of Mausoleum)’가 그랜트 묘소의 모델이라고 밝힌다. 기원전 4세기 중엽 때 세워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에 속하는 45m 높이의 건축물이다. 현재 터키 남서쪽 해안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 지방에 있는 고대 무덤이다. 마우솔레움은 아케메네스 대제국의 변방 지방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묘소에는 그와 부인, 누이도 함께 안장돼 있다. 기원전 351년 전에 세워진 이래 16세기까지 존재해온 장수 건축물로, 각종 역사서를 통해 빈번히 등장한다. 묘소의 잔해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우솔레움은 영어의 ‘큰 무덤’을 의미하는 말이다. 역사서에 남겨진 유서 깊은 묘소이기에 아케메네스 지방관의 이름이 큰 무덤을 의미하는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키루스가 그랜트를 통해 미국에 들어왔다고 할 때 마우솔레움 묘소와의 접점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봤듯이 마우솔레움은 아케메네스, 즉 페르시아의 지방관이다. 키루스가 창조해낸 대제국의 영역 내에서 창조된 묘소에 해당된다. 유럽 역사학자들은 마우솔레움이 페르시아 영역권 내의 지방관이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권에서 살아간 사실상 독립국가의 수장이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페르시아,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메시아라고 부른 페르시아 황제


▎뉴욕 맨해튼에 자리 잡은 그랜트 대통령의 묘소.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묘소를 본떠 만들었다.
더불어 마우솔레움이 페르시아인이 아닌, 그리스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럴듯한 얘기지만, 필자 판단으로는 억지에 가까운 궤변이다. 마우솔레움 묘소를 고대 그리스 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서방 무덤의 기원으로 삼으려는 유럽 중심의 좁은 세계관에 불과하다. 필자는 고고학에 무지하고 무관하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터키 해안지역을 고대 그리스 단 하나의 문화권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페르시아와 공존하거나, 아예 페르시아 문화권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마우솔레움이 페르시아 지방관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스 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스를 서방 문화의 원류로 만드는 과정에서 마우솔레움도 그리스 역사로 도배하게 된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칭기즈칸이 일본 후손이라고 말한 제국주의 일본의 세계관 정도라 보면 된다.

마우솔레움 묘소는 키루스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건축물이다. 이유는 1951년 발견된 키루스 묘소에 있다. 현재의 이란 내륙도시 시라즈(Shiraz) 근처 파살가데(Pasargadae) 들판에 들어선 묘소다. 세로 50㎝ 크기의 계단 6개를 발판으로 한, 높이 3m 정도의 방 하나가 키루스 묘소의 전부다. 파살가데는 키루스가 동서를 통일한 뒤 건설한 인류 최초의 동서통합 수도다. 유네스코에 의해 2004년부터 세계문화유산에 기재된 곳으로, 키루스 당시에는 인구 3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도시로, 왕실과 부대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다.

필자는 아직 이란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가고 싶고, 가야 할 이유가 많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직도 못 갔다. 이란행에 매달리는 가장 큰 이유는 파살가데와 시라즈에 있다. 키루스의 흔적을 발견하고, 와인의 원형을 맛보기 위해서다. 강한 와인으로 유명한 시라즈는 파살가데 주변 도시 시라즈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를 통해 스페인, 이탈리아, 중부 유럽으로 넘어간 뒤 최근에는 남미와 미국까지 진출한 와인이다. 프랑스산 와인과 달리 누구나 쉽게 마시고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와인이기도 하다. 키루스의 묘소는 바로 그 같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유적이다.

유럽이 아닌 터키, 이란과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마우솔레움 묘소가 키루스 묘소를 본뜬 것이라 분석한다. 마우솔레움 묘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역사 속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기록물에 나타난 모습을 보면, 돌로 구성된 구조물의 형식이나, 계단을 만든 뒤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꼭대기에 모자를 씌운 모습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랜트 묘소의 구조와 닮은 것은 물론이다. 그랜트 묘소가 세워진 것은 1897년. 키루스 묘소가 발견된 것은 이후 54년 뒤다. 그랜트 묘소는 키루스 묘소에 대한 정보나 이해없이 마우솔레움 묘소를 원형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파라다이스는 키루스의 인공정원이 원형


▎키루스가 점령한 바빌론성의 입구에 걸린 벽화. 바빌론성은 규모와 미적 차원에서 인류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동서통합 대제국 아케메네스의 의미는 선민(選民)이라 불리는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서도 재음미될 수 있다. 구약 성서에도 나오지만, 키루스는 유대인으로부터 메시아(Messiah) 즉 구원자, 선지자로 불린 인물이다.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인물이 키루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신앙은 물론,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도와준 인물이 바로 키루스다. 핵 개발 문제와 관련해 전쟁도 불사할 듯한 기세지만, 원래 이란은 유대인을 핍박에서 구원한, 이스라엘의 은인에 해당된다.

키루스가 유대인의 귀국을 허락했다는 사실은 당시 페르시아 제국이 갖고 있는 문화·문명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좋은 예다. 동과 서를 통합한 페르시아의 힘은 강력한 군사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민족·언어·문화를 인정하면서 각자의 이익을 하나로 묶어 앞으로 나아가는 ‘통합의 철학’을 가진 곳이 바로 기원전 6세기의 페르시아였다.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올 당시의 선지자는 다니엘이다. 구약 성서에 나오지만, 바빌론 왕에 의해 사자 우리에 감금되지만 거꾸로 사자들을 감화시키고 살아나온 인물이다. 키루스는 유대인의 원수에 해당되는 바빌론을 정복한 인물이다. 당시의 전쟁은 주인과 노예를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척도였다. 유대인은 바빌론이든 페르시아든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선지자 다니엘은 새로운 주인 키루스를 위해 일한다. 키루스가 만든 거대한 도서관에서 문서를 정리하는 일이다. 당시의 도서관은 서로 다른 문자를 번역하고 편지를 쓰고, 장사 관련 문서를 만드는 문(文)에 관한 종합창고와 같은 존재였다. 키루스는 점령지의 사람들이 갖는 종교와 문화, 민족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정책을 편다. 바빌론의 경우 유대교를 무시하고 자신의 종교를 믿도록 강요했지만, 페르시아는 노예들이라 해도 각자의 종교를 가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키루스의 페르시아는 노예라 해도 임금을 주고 일을 시키는, ‘무임금 무노동’ 제도를 도입한 나라이기도 하다. 노예라고 해서 국가나 주인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제한적이지만, 결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자신의 삶을 일궈나갈 수 있다.


▎다리우스 1세를 찬미하는 페르시아 벽화의 문자. 아케메네스 제국은 동과 서의 모든 문제를 하나로 모아 정리한 동서통합 도서관의 역할도 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ナナミ)는 대제국 로마의 성공 배경을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적 세계관에 뒀다. 기독교라는 일신교와 로마 만을 고집하는 일원주의적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대제국이 망해갔다고 분석한다. 필자는 그 같은 세계관에 100% 동의한다. 21세기 글로벌 리더로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을 보면 로마의 성공 비법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무리 커지고 부자가 된다 해도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로마의 역사를 통해 재확인된다. 중국은 자신만이 세계의 중심일 뿐, 나머지는 세계의 중심을 위한 도구나 수단 정도로 해석할 뿐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분석한 대제국의 성공 비법은 사실 로마 독자의 통치이념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적 세계관은 로마보다 500년 전에 세워진 페르시아의 생각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로마는 키루스가 만든 페르시아 대제국의 복사판이라 볼 수 있다. 로마가 자랑하는 수리(水利) 시설도 원래 페르시아에서 온 것이다. 키루스는 수리시설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개발시킨 인물이다. 지하수를 이용해 도시 전체에 물을 흐르게 만들고, 사막에서도 식물을 기를 수 있도록 만든다. 로마는 페르시아의 수리시설을 확장 보완해서 이탈리아와 북부 아프리카로 확산시킨, 짝퉁의 나라에 그친다

13세기 몽골의 원형도 페르시아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궁궐 부조 장식품. 키루스는 아시리아를 지배한 뒤 문화와 신앙을 전승한다.
영어로 파라다이스(Paradise)는 천국을 의미한다. 구역 성서에서 사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가 거주하던 에덴동산이 바로 파라다이스다. 그러나 구약 성서에서 파라다이스란 말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538년부터다. 그 이전에는 정원, 공원이란 단어가 에덴동산의 별칭이었다. 기원전 538년은 키루스가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하고 동서를 연결하는 대도시 파살가데가 들어선 시기다. 당시 키루스가 도시를 만들면서 가장 공을 드린 부분은 정원이다.

파살가데 지역이 그러하듯 페르시아에는 물이 귀하다. 강이 없기에, 멀리서 물을 끌어들이는 장거리 수리시설을 만들어 파살가데에 공급한다. 수리시설에 관한 지식과 경험은 물을 귀하게 여기는 페르시아 유목민의 지혜에서 탄생된 것이다. 키루스는 도시로 끌어들인 물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일에 손을 댄다. 아름다운 자연을 사시사철 접할 수 있는 정원이 주인공이다. 키루스는 대황제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출해내는 정원사로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보듯 신이 창조해낸 최고의 아름다움은 에덴이라는 정원에 존재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자리에 모아둘 수 있는 능력이 신의 능력이다. 키루스는 그 같은 신의 능력에 준하는 힘을 스스로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도 구하기 어려운 물을 파살가데 한가운데에 공급해 1년 365일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당시 정원은 길이 100m 정도 크기였다고 한다. 주된 화초는 장미다. 영어의 파라다이스는 키루스가 파살가데에 만든 정원, 파이리데자(PairiDaeza)라는 페르시아어를 원형으로 한 것이다. 주변이란 뜻의 ‘파이리(Pairi)’와 담장이란 의미의 ‘데자(wall brick)’가 합쳐진 단어다.

키루스의 정원은 주변의 강한 바람과 모래를 막기위해 바깥쪽에 담을 치고 안쪽에 정원을 만들었다. 이슬람 정원의 대부분은 성벽이나 담으로 둘러싸인, 성안이나 집안에 들어서 있다. 그냥 바깥에 두는 식의 정원은 이후 유럽에서 나타난 변형된 모습이다. 스페인 남부 알람브라궁전 내의 이슬람 정원은 대표적인 본보기다. 서방에서 천국으로 해석된 파라다이스는 바로 키루스가 창조해낸 인공정원을 모태로 한 것에 불과하다. 파라다이스가 성서에 등장한 시기는 유대인이 키루스를 메시아라 부르던 시기와 일치한다. 키루스가 만든 정원을 보면서 신이 창조해낸 천국 에덴동산을 연상한 것이다. 물이 흐르는 정원을 통해 신의 영역을 인간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키루스며, 페르시아는 그 같은 독특한 문화를 전 세계에 보급한 초유의 대제국이다.

키루스의 페르시아는 현재의 이슬람 지역과 유럽만이 아닌 아시아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 나라다. 몽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몽골붐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박이나 빨리빨리 문화가 그러하듯 쉽게 끓고 쉽게 식는다. 당시 몽골 대제국을 얘기할 때,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 노하우에 관한 부분은 한국 지성인들의 주된 관심거리에 속한다. 한 사람 당 말을 다섯 마리나 끌고 다니면서 하루에 500㎞를 달린다는 엄청난 기동력은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종교·민족·언어 관계없이 세금만 내면 모두에게 기회를 줬다는 얘기에서부터 유럽에서 아시아로 연결되는 10일간 운송·통신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유목민 문화의 특징이자 장점이 몽골붐의 주된 화두로 등장했다. 물론 한민족이 몽골의 피와 함께 한다는 식의 얘기도 뒤따랐다.

이집트 공격 위해 200㎞ 운하를 건설


▎회교혁명 이전인 1971년 팔레비 국왕 시절 페르시아 창건 2500주년 기념 행사가 키루스 황제 묘소 앞에서 거행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몽골만의 특출한 능력과 통치방식은 몽골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다소 변형되고 진화는 이뤄졌겠지만 기원은 페르시아 대제국에 있다. 민족·종교·문화와 무관한 인재등용은 물론, 말을 통한 신속한 운송·통신 체계도 이미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에 존재한 것이다. 구글지도에 들어가 몽골 울란바토르와 이란 테헤란을 연결해보자. 거리 6056㎞에 자동차로 85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직접 시행해본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시속 40㎞ 정도의 말을 타고 24시간 줄기차게 달릴 경우 자동차를 타고 걸리는 시간보다 엄청나게 늦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유는 이란 북쪽으로 올라가 동으로 달릴 경우 곧바로 대평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달리기 어려운 길도 말을 통해 빨리 갈 수가 있다.

페르시아 대제국이 세워진 기원전 6세기는 물론 몽골 대제국이 들어선 13세기에도 말이 최고·최상의 운송·통신 수단이었다. 키루스를 이은 다리우스 대왕은 전차가 다닐 수 있는 ‘로열 로드(Royal Road)’를 인공적으로 건설했다. 말을 통해 3천㎞에 달하는 대제국이 1주일 망으로 좁혀진 것이다. 폭 6m의 로열 로드에는 휴식시설 111개소가 25㎞ 간격으로 만들어 24시간 운영됐다. 말과 사람이 쉬어가고 정보와 장사가 이뤄지던 기원전 6세기의 고속도로에 해당된다. 로마의 도로는 다리우스의 로열 로드를 본떠 만든 것이다.

로마는 말을 중심으로 한 기병군단이 아니다. 보병 중심의 군대인 로마에 비해, 말을 중심으로 한 기병군단을 통해 세계정복에 성공한 곳이 몽골이다. 몽골은 페르시아와 똑같은, 말을 통한 인터넷 통신망을 구축해 동서를 연결한다. 마르코 폴로는 그 같은 시설을 통해 베니스에서 육지를 통해 원나라로 들어간다. 페르시아와 몽골은 양이나 말과 함께 풀밭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이다. 평원을 통해 연결된 두 민족은 알게 모르게 서로의 장점과 특징을 배우고 익혔을 것이다. 몽골붐 당시 몽골만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불리던 모습들도 사실은 페르시아, 아니 지구 북반부의 유목민 모두가 공유하던 공통문화 중 하나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

한국에서의 몽골붐 당시 간과한 부분으로 운하에 관한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운하는 몽골이 중시한 운송 정보수단 중 하나다. 중국의 한족들이 꺼리는 얘기지만, 현대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은 원래 몽골의 원나라가 만든 수도 대도(大都)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몽골의 쿠빌라이가 1267년부터 26년 동안 만든 인공도시가 베이징이다. 당시 대도는 운하를 통해 바다로 연결됐다. 지금도 베이징 곳곳에 남아 있지만, 수문식 운하를 수없이 연결해서 동중국해와 베이징을 인공적으로 연결한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당시 운하의 모습에 대한 얘기를 자신의 여행기 곳곳에 남기고 있다. 베이징의 운하 얘기를 꺼낸 이유는 육지와 바다를 잇는 몽골 운송 시설의 기원도 페르시아를 모태로 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다리우스 대왕이 만든 홍해로 연결되는, 무려 200㎞에 달하는 운하가 모태다. 당시 이집트 공격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몽골이 만든 수문식 운하와 똑같다. 페르시아에 관한 공부는 몽골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필수 코스다.

무덤은 페르시아와 몽골과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 시켜주는 좋은 예다. 키루스 묘소와 칭기즈칸 묘소다. 칭기즈칸 무덤은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중국발 해외 토픽에 해당된다.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답게 엄청난 시설이 아무도 모르게 잠자고 있을 것이란 가정 아래 여기저기서 칭기즈칸 묘에 관한 그럴듯한 뉴스가 출연한다. 진시황 스타일의 세계관에 익숙한 한족이 만들어낸 엄청난 착각이자 환상에 불과하다.

극과 극을 보여줄 징기즈칸의 무덤과 진시황의 묘

묘소를 보자. 돌로 된 작은 방 하나가 전부다. 파라오를 매장한 피라미드과 같은 초대형 건축물이 아니다. 보석도 없고 함께 매장당한 노예도 없다. 비문이라고 있지만, 이집트 벽화 같은 분위기와 전혀 다르다. 묘소가 키루스의 것임을 알리는 간단한 문장만 있을 뿐 초대형 용비어천가와 무관하다. 초원에서 태어나 별로 뒤덮인 하늘로 돌아가는 유목민의 세계관이 키루스 묘소에 드리워져 있다.

초대형, 초고가로 특징지워지는 무덤은 농작물을 통해 살아가는 초식 인간들의 이상향에 해당된다. 동물과 함께 세상을 떠돌면서 살아가는 유목민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진시황이나 파라오 무덤과 같은 것은 칭기즈칸의 실체와 무관한, 인간적 욕심의 징표에 불과하다. 몽골 전체가 페르시아를 모태로 했듯이, 키루스 무덤을 보면 몽골대평원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지도 모를 칭기즈칸 무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키루스의 후손 이란이 세계무대에 재등장하고 있다. 테러국가라는 오명을 씻기까지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한국인의 피에 유목민의 유전자가 흐른다고 가정할 때, 몽골붐에 이어 이란붐도 나타날 듯하다. 2600년 전에 보여준 페르시아의 영광이 한국과 세계 곳곳에 재현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511호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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