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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로마 ‘루도비시 갈리아 전사’ 조각품의 울림 

죽음을 이해하는 순간 아름다운 세상을 확신하리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자결(自決)로서의 인간의 품과 격을 표출한 숭고한 걸작… 평소 정리를 통해 삶을 더 아름답고 능률적으로 만들어가야

▎루도비시 가문이 소유했던 12명의 로마 황제 두상(頭像). 자살하는 갈리아 전사는 12명의 황제가 들어선 복도 바로 옆에 들어서 있다.
지난해 잡지 <타임>의 ‘100(100 Most Influential People)’에 선정된 아시아인은 전부 16명이다. 중국인이 4명, 인도와 일본인은 각각 2명이다. 한국은 한 명도 없지만 북한의 김정은이 5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필자가 주목한 나라는 일본이다. 노벨문학상에 오르내리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2014년 이래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장한 곤도 마리에(近藤麻理惠)가 주인공이다. 중국에 비해 열세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특이하다. 타임 100은 크게 5가지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글로벌 스타(Titans), 선구자(Pioneers), 예술가(Artists), 지도자(Leaders) 시대의 표상(Icons)이다. 무라카미는 시대의 표상, 곤도는 예술가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인물들은 대부분 정치·경제 분야의 지도자 영역에 머물러 있다.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로 타임 100에 오른 여성도 있지만, 산업화·정보화·민주화에 관한 부분이 아시아권 인물의 주된 무대다. 시대의 표상이나 예술가 범주는 유럽이나 미국이 독점하는 영역이다. 아시아권은 정치·경제와 같은, 구조적·구도적 하드 분야에 집중한다. 일본인 2명은 소프트 분야에 특화해 있다.

무라카미의 경우 미국만이 아닌, 한국에서도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다. 억 단위의 선인세는 잘 알려져 있다. 필자가 주목한 일본인은 무라카미보다 미국에서 한순간에 ‘뜬’ 곤도다. 2014년 10월 출간한, <삶을 바꾸는 마법의 정리법(The Life-Changing Magic of Tidying Up)>이란 단행본으로 글로벌 셀러브리티에 오른 여성이다. 출간이래 1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1위 작가에 올라 있다. 타임 100에서 예술가나 작가로 통하지만, 사실 곤도의 정식 타이틀은 ‘정리대왕(Organizer in Chief)’쯤에 해당된다. 책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정리를 통해 삶을 한층 더 아름답고 능률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인물이다.

서방의 문화적 특징을 꿰뚫은 신선한 발상


▎죽어가는 갈리아 전사 조각은 15세기 때부터 이탈리아 예술계에서 주목받은 명작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집안에 쌓아두지 말고 버리면서 심플하게 살자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것들을 하루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건을 버릴 때는 그동안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동양적 가치관도 포함하고 있다. 더불어 옷을 접거나 정리하는 구체적인 테크닉도 알려준다.

곤도의 책은 한국에서도 출간됐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평범한 내용이자 논리일 듯하다. 그래서인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왜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첫째 서방세계가 갖고 있는 문화적 특징을 꿰뚫은 신선한 발상이자 내용이기 때문이다. 버릴 줄 모르고 사 모으기만 하는 것이 미국과 유럽인이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가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등장한 자동차를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 물건을 아끼고 전통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본받을 만하지만 책, 옷, 신발, 그릇, 가구 같은 것으로 확대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미국인의 집은 엄청 크고 넓다. 도시민이 아닌 보통 미국인의 경우 넓은 마당은 물론 창고, 수납장, 서랍이 넘치고 넘친다. 평생을 통틀어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쓸 물건들이 곳곳에 채워져 있다. 싸구려 중국 제품이 미국 소비시장을 장악하면서 물건의 수는 한층 더 늘어났다. 버리기보다 기부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 미국식 정리법이다. 이 같은 기존의 생활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주변을 깨끗하고 간단하게 만들자는 것이 곤도의 생각이다. 곤도의 발상은 물건 정리법을 넘어선, 삶을 대하는 심리적·철학적 차원의 문제로까지 발전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선(禪)에 기초한 달라이 라마 스타일의 세계관이라고나 할까?

둘째는 베이비부머 세대, 즉 현재 70대를 전후한 미국과 유럽인의 심리를 읽은 것이 인기의 주된 원인이다. 2차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는 곤도 책의 주된 수요자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다양하게 팔리지만, 곤도의 생각을 특히 철학적 영역으로 해석하는 소비층이 서방의 베이비부머 세대다. 이들은 집안을 깨끗하고 간단하게 만들자는 의미에서의 정리 법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곤도의 생각에 주목한다.

죽음이다. 아무리 낙관적인 성격이라 해도 나이가 차면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필요없는 물건은 물론, 필요한 물건조차 압축해서 정리하는 지혜와 심리를 통해, 죽음으로 연결되는 길을 한층 더 간단하게 만들어가자는 것이 노년층의 관심사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엄청난 물건을 그대로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날 경우 책임은 자식에게 돌아간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부모가 남긴 물건의 의미나 중요도를 전부 알기는 어렵다. 일괄해서 팔거나 버리는 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제한적이지만 그 같은 상황을 조금이라도 방지하자는 의도로 곤도의 정리법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곤도 마리에와 그의 책은 기획사가 발굴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결과물이다. 노래와 춤은 물론 미모, 몸매까지 갖춘 걸그룹을 찾아내 세계 시장에 내놓아 승부를 보듯이, 일본 출판기획사가 곤도라는 여성을 찾아내 정리법에 관한 책을 만들어 전 세계에 데뷔시켜 성공했다. 우연히 등장해 팔린 작가나 책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따라 만들어진 일본식 문화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곤도의 인기는 앞으로 한층 더 강해질 듯하다. 서방세계의 문화적 특징과 죽음을 앞에 둔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두 가지 배경을 기반으로 한 곤도의 후속타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과 자결은 다르다


▎1. <삶을 바꾸는 마법의 정리법>의 저자 곤도 마리에가 지인의 집에서 불필요한 물품을 정리해주고 있다. 2. 곤도 마리에의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돼 국내 독자들에게도 화제가 됐다. / 사진·중앙포토
현재 70대 일본의 단카이(団塊)세대에게 유행하는 ‘시카츠(死活)’에 관한 책이나 발상이 곤도를 통해 서방에 계속해서 전해질 것이다. 시카츠란 죽기 전에 행하는,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가는 활동이다. 자식에게 남기는 유서(遺書)에서부터 사후(死後) 전달될 주변 인물에 대한 편지 쓰기, 재산 기부, 소지품 정리, 인터넷 SNS 정리 같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포괄하는 삶의 정리·정돈법이 핵심이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신의 사진이나 얘기가 인터넷을 떠돌아다닌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같은 얘기는 20세기까지의 전설에 불과하다. 21세기의 인간은 죽은 뒤에도, 결코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세상을 지저분하게 만들 수 있다. 곤도가 예술가를 넘어서 철학가나 명상가로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환경 변화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치부 중 하나지만, 자살률이 OECD 34개국 가운데 1위라고 한다. 2003년 이래 지금까지 13년째 1위다. 2013년 한 해 동안 1만400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인구 10만 명당 29.1명이 자살한 셈이다. OECD 다른 나라는 어느 정도일까? 2위가 헝가리로 10만 명당 19.4명, 3위가 일본으로 18.7이다. 자살률 1위인 것만이 아니라, 자살률의 정도도 2위나 3위 나라에 비해 거의 갑절로 높다.

과거 자살대국이라고 하면 일본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그 같은 불명예를 한국이 가져왔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은 어느 틈엔가 어둡고 차가운 일본의 아바타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모든 한국인이 인지하고 있듯이, 자살은 막장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대변하는 증거에 해당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카락 하나도 아낀다는 유교 문화권에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자살망국론을 외쳐도 자살로 들어가는 개개인 입장에서 보면 마이동풍(馬耳東風)에 불과하다. 개개인이 갖는 고통이나 사연과는 무관한 일반론을 통해 바라본 대응방안이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보다 내 손톱 안에 박힌 가시가 한층 더 아픈 법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타인의 자살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나 해결방안이 필자에겐 없다. 다만, 자살을 말할 때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결(自決)에 관한 부분이다. 자살과 자결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한자의 의미로 놓고 보자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자살이지만, 목숨을 비롯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것을 자결이라 부른다. 집합 개념으로 보면 ‘자살<자결’이라 볼 수 있지만, ‘자살=자결’은 아니다.

필자가 판단하는 자살과 자결의 개념은 한자나 사전적 의미와 조금 다르다. 자살은 수동적 판단에 기초한 행위인데 비해 자결은 능동적 결단에 근거한 행위다. ‘자살<자결’이란 관점에서 보면, 죽음이 자결의 마침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죽음이 아닌,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이 자결의 결론이 될 수도 있다. 자살이 주변 상황에 쫓겨 이뤄진 것인데 비해, 자결은 외부의 환경보다 삶을 통해 지켜온 스스로의 원칙이나 가치, 철학에 근거한 결단에 해당된다.

가슴이 자살이라고 할 때, 자결은 머리다. 자살이 비교적 한순간에 이뤄지는 단말마적 결론인데 비해, 자결은 여러 각도의 준비와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세상을 상대로 한 것이 자살인데 비해, 스스로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 자결이다. 세상에 대한 반감과 자신 상실에 대한 답으로서의 자살이지만, 스스로의 세계관에 충실하면서 품격을 지키자는 의미에서의 확신에 찬 결론이 바로 자결이다.

삶의 마지막 모습은 삶의 또 다른 표현


▎갈리아 전사는 평온한 자세로 칼을 쇄골 사이로 밀어 넣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고, 주변에 대한 분노도 없다.
2009년 통계지만, 한 번쯤 자살을 고려했거나 시도한 한국인이 6.8%에 이른다고 한다. 수천 명의 임의조사를 통해 내려진 결과지만, 막장 스토리로 날밤을 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실제 수치는 한층 더 높을 듯하다. 자살이라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삶의 종착역으로서의 죽음을 머리에 그릴 경우 자살에 대한 관심은 한국인 대부분의 공통분모에 해당될 것이다.

막장과 수저론에 무심하지만, 50대의 필자 역시 언제부터인가 스스로의 죽음에 관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삶의 종착역은 결코 자살이 아닌, 자결에 근거한 사생관이다. 말장난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맞이할 미래의 죽음은 자결로서의 생의 마침표다. 세상을 상대로 한 죽음이 아니라, 필자 개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초한 삶의 종식이다. 내몰리거나 쫓기다가, 소주 몇 병이나 가스탄으로 결정될 ‘한 방에 훅 가는’ 죽음이 아니다. 삶의 환희를 알기에, 숨쉬는 인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 내리는 결론으로서의 자결이다.

곤도 마리에의 책이 서방세계에 어필한 이유 중 하나로 자결의 세계관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사회에 나타난 시카츠다. 삶의 종착역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하면서 하나씩 준비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죽음이 바로 자결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한순간에 들이닥치는 것이 자살이라고 하면, 미리 준비하고 이성으로 판단하면서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것이 자결에 해당된다.

따라서 시카츠는 자살이 아니라 자결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호례(好例)일 듯 하다. 죽음은 예외 없다. 시간상 문제일 뿐이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세상을 마감하느냐가 한층 더 중요하지 않을까? 죽는 데 찬밥 더운밥 가릴 것이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 같은 발상 자체가 이미 죽음만이 아닌 평소의 삶조차도 가볍게 여겨왔다는 의미로 와 닿는다. 끝내기만큼 쉬운 것도 없다. ‘어떻게’ 끝내는지를 보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다.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구 전체를 준다고 해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없다. 자신과의 대화이자 자신만의 가치에 근거한 결론이다.

삶의 모범답안으로서의 갈리아 전사


▎갈리아 전사가 들어선 전시룸은 하루 24시간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특별 조명이 조각 위를 비춘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루도비시 갈리아 전사(Ludovisi Gaul)>라는 타이틀의 조각상이 있다. 로마에 가면 반드시 찾는, 필자가 가장 아끼고 경외(敬畏)하는 걸작이다.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이 확연하게 와 닿는다. 현재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향하는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원칙이 무엇인지…. 루도비시 갈리아 전사(이하 루도비시)를 만나는 순간 그런 질문의 답들을 간단히 얻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오랫동안 자세히 살펴보면 내면까지 읽을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이라 해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19세기 프랑스 조각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것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신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들었다. 15세기 르네상스를 포함해 이후 대부분의 유럽인이 다룬 예술은 돈과 명예, 즉 세속의 문제로 연결된다. 성(聖)과 속(俗)과의 경계선은 조금만 주의해보면 누구나 쉽게 발견해 낼 수 있다. 돈과 명예를 염두에 둘 경우, 아무리 걸작이라고 해도 내면의 영혼과 무관하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루도비시는 인류가 만들어낸 ‘인간 조각상’ 가운데 영혼의 울림이 배인 최고 걸작이 아닐까 싶다. 루도비시는 ‘갈리아 전사의 자살(Galatian Suicide)’이란 이명(異名)을 갖고 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빗장뼈 즉 쇄골(鎖骨) 사이로 칼을 밀어 넣는 갈리아 전사가 주인공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을 포착해 표현한, 2m 높이의 입상(立像)이다. 왼쪽에는 눈이 풀린 채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여인이 갈리아 전사의 팔에 매달려 있다. 현재 로마 한복판에 있는 팔라조 알템프스(Palazzo Altemps)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막 숨이 넘어간 듯한 여인의 모습. 눈이 풀려 있고, 얇게 벌려진 입을 통해 고통과 고난의 최후를 실감할 수 있다.
로마 역사를 통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의 예술작품은 극히 드물다. 굳이 떠올린다면 독사를 가슴에 풀어 자살하는 클레오파트라 정도라 할까? 로마는 자살을 권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남자 평균수명 28세의 나라가 로마다. 그들에게 삶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오늘을 잡고 현재를 즐겨라’로 해석됐다. 보통 로마인에게 자살이나 죽음은 터부의 대상이다.

그러나 로마가 정신적 모델로 삼은 그리스는 다르다. 죽음이나 자살은 박카스신(神)의 와인과 동일선상에 있는, 인간 삶의 기본요소다. ‘그리스 비극’은 서방문학과 문화의 한 장르를 차지하고 있다. 문학, 희곡을 통해 죽음에 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다뤄진다.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결정하는 문화가 당연시된다. 로마의 경우 ‘로마의 비극’이란 문화·문학 장르가 따로 없다. 향락과 심포지엄(饗宴)이 로마문화의 전형(典型)이다.

그리스에서 탄생된 루도비시가 카르페 디엠의 로마로까지 이어진 것은 너무도 특이하다. 왜일까? 단순한 자살로서의 조각품이 아니라 자결로서 인간의 품과 격을 표출한 숭고한 걸작이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라 판단된다. 로마인들조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결하는 인간이 갖는 절대적 권위가 루도비시의 핵심이다. 포기하는 자살이 아니라 새로운 결의와 기상을 느끼게 만드는 자결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상징하는 걸작이 바로 루도비시다.

올해 초 로마에 간 김에 다시 루도비시를 찾았다. 1월의 로마는 늘 조용하다. 정오인데도 넓은 팔라조 알템프스 박물관을 찾은 사람은 10명이 채 안 된다. 박물관은 독점의 공간이다. 내면까지 읽고 싶다면 사람이 많은 시간이나 시기를 피해야 한다. 관람객이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박물관에 들를 이유가 없다. 루도비시는 박물관 2층에 있다. 넓은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들어서 있다. 주변에 몇몇 로마시대의 유물이 전시돼 있지만, 주인공은 루도비시다.

방안에 들어서 눈을 들어 대하는 순간 그대로 압도된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긴장감이 루도비시를 보는 순간 몸 전체로 파고 든다. 조각상 비너스나 헤라클레스를 접할 때 느껴지는 미(美), 파워, 신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현실로서의 경외감이 오감을 통해 와 닿는다.

정밀하게 표현된 대리석 조각은 무서워서, 괴로워서 포기하고 도망가는 죽음과는 무관하다. 이미 쇄골 사이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 칼끝의 고통조차 너무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평화로서의 자결이다. 왼팔에 의지한 젊은 여인의 모습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갈리아 전사의 몸과 얼굴에서는 그 어떤 어두운 그림자도 찾아낼 수 없다.

박물관측은 루도비시를 위해 특별한 조명장치를 설치해 두었다. 하루 24시간을 느낄 수 있는 새벽, 정오, 일몰, 심야의 분위기를 조명으로 표현해 대리석 피부 위에 비춘다. 30분마다 되풀이되는 모습으로, 루도비시가 연출해내는 다양한 모습을 절감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육필 ‘Da Capo’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젊은 갈리아 전사. 무릎을 꿇렸지만 표정과 자세에서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필자가 인상 깊게 보는 장면은 일몰 때의 모습이다. 붉은 석양이 대리석 전체에 서서히 비치는 시기다. 핏빛으로 물드는 루도비시의 모습을 통해 자결에 이른 갈리아 전사의 숭고한 의지가 느껴진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만한 힘도 없이 숨져가는 여인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그녀가 내뱉는 마지막 가녀린 숨결 소리가 열린 입을 통해 느껴진다. 갈리아 전사의 모습에는 포기하는 전무(全無)로서의 죽음이 아닌, 죽음 이후에 이어질 또 다른 세계로의 여정(Journey)이 표현돼 있다. 삶에 대한 강한 욕구처럼, 죽음 이후에 닥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한 열망과 열정이 갈리아 전사의 얼굴과 몸 전체에서 느껴진다.

갈리아 전사는 고대 로마를 괴롭힌 중부·동부 유럽의 맹주(盟主)다. 터키에서부터 현재의 프랑스로 이어지는 부분을 장악한 민족으로, BC 4세기에 유럽의 강자로 군림한다. 프랑스는 자신의 원류를 갈리아로 보고 있다. 워낙 무력에 강한 민족이기에 기원전 5세기부터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도 활약한다. 전쟁에 패하면서 로마의 속주(屬州)로 나선 것은 서기 64년이다. 이후 갈리아는 로마를 지키는 변방으로 흡수된다.

루도비시는 BC 230년에 벌어진, 갈리아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해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와 연합한, 그리스 폴리스의 왕 아탈로스 1세(Attalus I)가 갈리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승리자다. 따라서 조각상을 발주한 인물도 아탈로스 1세다. 적이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싸운 갈리아 전사의 용기를 찬미한다. 실천하기 어렵지만, 적을 찬미하는 만큼 자신의 품격과 권위도 올라갈 수 있다. 싸움에 나선 적을 살해해도 시신을 수합해 가족에게 넘기는 것이 그리스·로마의 전통이다.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이후 터키와 그리스 북부 내에서의 갈리아의 영향력은 급감한다. 원래 청동으로 만들어진 루도비시는 이후 2세기 로마에 의해 대리석으로 재창조된다. 루도비시란 이름은 16세기 실력자인 이탈리아 볼로냐의 명문, 루도비시가(家)에서 비롯된 것이다. 루도비시 대저택을 장식하던, 가장 중요한 조각상이 바로 갈리아 전사다.

모차르트 신자라면 잘 알겠지만, K626으로 통하는 ‘레퀴엠(Requiem)’은 1791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만든 미완성 장송곡이다. 숨지기 직전 익명의 귀족이 찾아와 주문한 곡으로, 작곡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쇠약해진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결정적 계기가 된다. 결국 모차르트 스스로를 위한 레퀴엠이 됐다는 사연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58년 브뤼셀에서 세계만국박람회가 열릴 때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 원본 마지막 부분의 악보가 전시됐다.

전시 중 유럽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한다. 레퀴엠 원본 마지막 악보의 끝부분이 몰래 찢겨진 채 발견된 것이다. 관람객 중 누군가 의도적으로 찢어서 훔쳐간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찢겨진 부분에는 단 두 마디의 이탈리아어가 적혀 있었다. ‘Da Capo’다. 음악 용어로 “다시 한 번 더 처음으로 돌아서 시작하자!”라는 의미다. ‘Da Capo’는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육필이다.

필자는 신의 아들이 예수, 신의 서자(庶子)가 모차르트라 믿고 있다. 225년 전에 작곡된 레퀴엠을 들어보자. 인간의 능력이 바이오, IT, 우주로 끝없이 퍼져나간다고 하지만, 모차르트의 레퀴엠 같은 곡은 두 번 다시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런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육필이 ‘Da Capo’, 즉 “다시 한 번 더 처음으로 돌아서 시작하자!”다. 모차르트 음악은 생로병사, 희로애락, 영고성쇠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음악에서도 포기에 관한 메시지는 없다. 죽음을 주제로 한 레퀴엠의 마지막 부분에서조차 ‘Da Capo’로 일관한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이에게 권하는 ‘세 가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왼쪽)가 살리에르의 재촉에 따라 ‘레퀴엠’을 작곡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작곡 도중에 탈진해 죽는다. / 사진·중앙포토
주제넘고 건방진 생각이지만, 로마의 루도비시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적의 반면교사(反面敎師)가 아닐까 싶다. 자살이 아닌 자결을 생각케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 한순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신성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영혼이 배인 걸작이다.

단언컨대 루도비시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사생관이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는 생물학적 차원 이상의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상황과 명분을 통해 인간에게 내려진 생명의 기원이 무시될 수 있을까? 나름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루도비시에 가면 그 같은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소주 몇 병 마시고 원망과 함께 끝내는 순간으로서, 포기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토로한 뒤 연탄가스와 함께 끝내는 식의 컬트(Cult) 스타일 최후도 아니다. 영원으로서 열망과 열정으로서의 삶의 종지부가 루도비시가 후대에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다.

재차 강조하지만 루도비시를 접하면서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러나 루도비시를 보면서 자결을 선택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자결은 결코 한순간에 끝나지 않는다. 주어진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면서 시간을 갖고 평생 영원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자결일지 모른다. 죽음을 상대로 한, 긴장 속의 영원한 게임이다. 루도비시를 보면 볼수록 삶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더해지는 것은 바로 그 같은 배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카르페 디엠의 로마인조차 존경한 조각상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찬미하는 박카스 신일지 모른다. 극과 극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도 종이 한 장 차이다.

신문·방송을 대하면, 갑(甲)과 금수저의 전횡(專橫)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21세기 한국인의 현실일 듯하다. 자살은 그 같은 고통을 잊게 해줄 손쉬운 마약일지 모른다. 사실, 자살을 쉽게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의 목숨이나 품격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의미가 된다. 아침 텔레비전의 막장 드라마가 매일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사람, 나아가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 가지를 권하고 싶다. 삶을 간단히 정리·정돈하는 곤도의 책이 첫째다.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란 평범한 진리를 1만원짜리 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이란 노래 구절에 빠질수록 왜 모차르트가 남긴 최후의 육필이 ‘Da Capo’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알렘프스 박물관의 루도비시다. 로마행이 멀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사후에 닥칠 끝없는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루도비시 바로 옆에는 의자도 네 개 정도 마련돼 있다. 찾아가 혼자 조용히 앉아 갈리아 전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편안하고도 자유로운 최후의 모습을 가슴 깊숙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과 사연 속에서 자결을 결행했는지, 나름대로의 답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이 아닌 자결로서의 죽음을 이해하는 순간 아름답고 살 만한 세상으로서의, ‘Da Capo’의 무대로서의 위대한 인생을 재차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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