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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테이지 인터뷰] 연극 '미저리'로 5년 만에 무대 서는 김성령 

“섬뜩한 악녀? 제 스타일 애니(연극 '미저리' 여자 주인공)는 달라요” 

중년 여성의 ‘워너비’에서 광기의 스토커로 파격 변신
영화와 색다른 스릴러… 9월 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공연


▎배우 김성령이 2014년 [미스 프랑스] 이후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올라 화제다.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을 황인뢰 연출이 무대화한 [미저리]다. / 사진:신인섭 기자
젊은 세대가 객석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극 공연장에 요즘 중장년층 관객이 부쩍 늘었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7월 13일 개막한 연극 [미저리] 얘기다. 지난 5월 티켓 오픈과 동시에 대형 뮤지컬 공연들을 제치고 인터파크 전체 공연 랭킹 1위를 차지한 [미저리]는 드라마 PD출신의 황인뢰 연출이 지휘봉을 잡고 영화처럼 스릴 넘치는 무대를 완성해 지난해 초연 때도 객석 점유율 90%가 넘는 큰 호응을 얻었다.

1년 3개월 만의 재연인 이번 공연은 극적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도록 업그레이드됐다. 캐스팅도 눈길을 끈다. 김상중·길해연 등 초연 배우 외에 안재욱·손정은 등 연극 무대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배우들의 존재감도 큰데, 그중 가장 이목을 끄는 건 여주인공 애니 윌크스 역의 김성령이다.

잘 알려진 대로 [미저리]는 스토킹을 주제로 한 스티븐 킹의 소설이 원작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을 향한 열성팬 ‘애니 윌크스’의 광적인 집착을 공포스럽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한 서스펜스 스릴러물이다. 1990년 로브 라이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이 영화로 사생팬의 대명사이자 광적인 집착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캐시 베이츠의 명연기는 모두의 뇌리에 박혀 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자 우아하고 세련된 중년 여성의 ‘워너비’로 사랑받아온 김성령과 캐시 베이츠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우울하고 섬뜩한 미스터리 여인 ‘애니 윌크스’는 싱크로율 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김성령은 영화 속 캐시 베이츠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새로운 [미저리]를 만들고 있다. 개막 전 만난 그녀가 “외모는 아무 의미 없다. 애니는 어떤 소설과 사람을 너무 좋아하게 된 보통 사람일 뿐”이라고 했던 말 그대로다.

이 작품에서 외모는 아무 의미 없어요


▎영화 [미저리](1990년)의 한 장면. 여주인공 애니 역의 캐시 베이츠는 전 세계 ‘사생팬’의 대명사가 됐다.
2014년 [역린] [표적] 등 2편의 영화가 동시 개봉되고 칸 영화제 레드카펫까지 밟은 이래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김성령은 사실 지난해 6월 방영된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 이후 활동이 뜸했다. “약간 슬럼프가 있었다”는 고백이다. “드라마가 예정보다 6개월 정도 늦게 방영이 되는 바람에 다른 드라마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됐어요. 본의 아니게 좀 쉬게 된 거죠. 때마침 황인뢰 연출님이 러브콜을 주셨고, [미저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열정을 깨우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황 연출님과는 인연이 깊죠. 제가 미스코리아가 되고 나서 처음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연기 데뷔를 한 뒤 첫 드라마 콜을 주신 게 황 연출님이거든요. 그때 ‘저는 영화배우’라면서 거절했었죠.(웃음) 그 후 [베스트극장]에도 불러주시고 매번 저를 생각해 주시는데,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미저리] 출연 결심에는 다양한 역할에 대한 도전 욕구도 작용했다. 하지만 “살짝 후회도 했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초연을 아주 재밌게 봤거든요. 연극인데 영화 같더군요. 아시다시피 제 나이가 되면 다양한 역할을 해볼 기회가 없잖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나 싶어 도전하게 됐어요. 초연에 나왔던 이지하 배우가 ‘쉽지 않은 작품’이라 했었는데, 그 말을 너무 실감했죠. 밤에 잠도 잘 못자요. 미장원에 갔더니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더군요. 충격 먹었죠. 원래 거의 없었거든요. 그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김성령이 연극 무대에 선 것은 5년 만이다. 2014년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 생뚱맞게 무대로 향해 원맨쇼에 가까운 노동집약적 연극 [미스 프랑스]에서 1인 3역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라움을 줬던 그녀다. 2005년 [아트]로 연극 데뷔를 한 이래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무대를 찾는 그녀는 연극과의 만남을 “운명 같다”고 표현했다.

“사실 [미스 프랑스] 이후 대본을 여러 번 받았어요. 하지만 연극은 다른 걸 동시에 할 수 있는 스케줄이 아니거든요. 근데 마치 연극을 하라고 시간이 비워질 때가 있어요. 이번에 잘 맞아떨어졌죠. 한번 결정하고 나니 들어오는 영화나 드라마도 맘에 들지 않더군요.”

간헐적으로 무대에 서고 있지만, 선택하는 작품마다 예사롭지 않다. [미스 프랑스]도 의미 없이 이어지는 엄청난 대사량을 속사포처럼 소화하면서 의상, 가발까지 정신없이 갈아입어야 했는데, [미저리]도 만만치 않다. 대사량도 보통 연극의 두세 배에 이르고, 두 시간 동안 상대역이 거의 누워만 있는 반면 계속 혼자서 돌아다니며 동선을 책임져야 한다.

“[미스 프랑스] 때는 몸이 힘들었지 기분 좋게 방방 뛰기만 하면 되니까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감정을 폭발시키고 소리 지르는 게 쉽지 않죠. 전에 해보지 않았던 부분이라 굉장히 도전이 돼요. 5년 세월이 지나면서 신체적으로 노화가 온 것도 있죠. 대사 잊을까봐 뇌영양제까지 먹고 있어요.(웃음) 그간 소극장 연극만 해봤는데, 이번엔 600석 규모 중극장이라 이 많은 관객분들을 어떻게 하면 다 만족시킬까 하는 부담감도 느끼고 있죠.”

감정 폭발시키는 연기는 처음


▎연극 [미저리] 포스터. [미저리] 무대에는 22년만에 연극에 도전하는 배우 안재욱도 등장한다. / 사진:그룹에이트
[미저리]의 대명사와도 같은 캐시 베이츠의 이미지는 ‘넘어야 할 벽’이다. 캐릭터를 만들 때도 굳이 영화 속 ‘애니 윌크스’를 닮아가려 하지 않았다. “처음엔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죠. 근데 결국 내 자신과 잘 버무려져 가더군요. 애니가 섬뜩하고 우울한 역할이라는데, 난 안 우울하거든요. 좋아하는 남자를 우리 집에 데려다 놨는데 너무 기쁘지 않을까요. 캐시 베이츠의 이미지는 저도 관객도 뛰어넘어야 할 벽인 것 같아요. 황인뢰 연출의 의도도 한국적 [미저리]는 너무 그럴 것 같은 이미지보다 안 그럴 것 같은 배우가 하는 게 좋겠다는 거예요. 브루스 윌리스가 나왔던 뉴욕 공연에서도 애니 역에 캐시 베이츠 같은 여배우가 아니었듯이, 앞으로도 다양한 배우들이 계속 새로운 [미저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겠죠. 더블캐스팅된 길해연 선배와 저도 완전달라요.”

작가 ‘폴 셸던’ 역엔 지난해 걸레 빤 구정물까지 마시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김상중과 22년 만에 연극에 출연한다는 안재욱의 합류로 기대를 모은다. “김상중 선배와도 인연이 많아요. 드라마 [추적자] 때도 부부로 나왔고, 아주 예전에도 드라마에서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역할로 나왔던 적이 있죠. 이상하게 자꾸 제가 선배를 좋아하는 역할을 맡게 되네요.(웃음) 관객들은 [추적자] 때를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지 않을까 싶구요. 폴이 진짜 구정물을 마시냐구요? 비밀인데요.(웃음) 사실 트릭이 있긴 한데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좀 마시게 되더라구요.(웃음)”

같은 배역이지만 김상중과 안재욱의 연기 스타일도 전혀 다르다고. “김상중 선배는 평소에 굉장히 진지하시죠. 연기도 진지하면서 코믹한 부분을 살리려 하시는데, 안재욱씨는 유머 감각이 넘치는 친구거든요. 김상중 선배와는 정반대로 원래 코믹한데 진지하게 연기하려고 하는 스타일이죠. 같은 말을 해도 재욱씨가 하면 너무 웃겨요. 첫 대사부터 고비죠. 웃음을 못 참아서 정말 큰일이에요.(웃음)”


▎김성령과 김상중은 2012년 드라마 [추적자] 이후 오랜만에 다시 만나 황금케미를 보여주고 있다. / 사진:그룹에이트
개인적으로 스릴러 취향이 아니고 밝은 해피엔딩을 좋아한다는 그녀는 [미저리]도 스릴러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애니도 처음부터 섬뜩한 스토커였던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음악을 좋아하면 가수도 좋아하게 되듯,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 같아요. 정상을 벗어난 집착이 맞지만, 그런 게 인간의 감정에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다 보니 제게는 스릴러 같지가 않아요. 그냥 좋아서 그런 건데. 가만히 생각해 봤죠. 왜 스릴러 같지 않을까. 뭔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면 자기 자신이 안 보이지 않나요. 자기 잘못도 모르게 되기에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애니가 돼버린 걸까요.”

사실 영화 [미저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애니 윌크스 같은 ‘사생팬’은 병적인 존재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덕후’라는 단어의 어감이 중립적이고 보편적으로 쓰이듯, 뭔가에 열광적으로 빠져드는 마니아적 심리나 행위가 강한 개성이나 취향으로 이해되곤 한다. 김성령도 주변에서 열렬한 팬덤을 흔하게 경험하고 있단다.

“제가 아는 한 미국인 친구는 K팝을 너무 좋아해서 한국에 와서 영어 선생님이 됐어요. 그 친구는 아이돌 그룹 ‘세븐틴’을 너무 좋아해서 멤버 도겸이 출연하는 뮤지컬 [엑스칼리버]를 매일 본다더군요.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에요. 제 중국 팬클럽도 굉장하죠. 제 생일 때 한국말로 녹음을 해서 선물도 보내고, 중국에 제 이름을 걸고 나무도 심었더군요. 중국에 촬영을 나가면 공항 패션 기사가 뜬 걸 보고 제 동선을 파악해 따라 오실 정도죠. 한번은 제가 묵는 호텔에 팬들이 적당한 방을 예약을 못하자 아예 스위트룸을 잡아버리신 거예요. 덕분에 제가 스위트룸에서 메이크업을 받았죠. 처음엔 저도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행사 끝나면 제가 밥도 사구요. 거의 20대 젊은 친구들이거든요.”

‘50’이란 숫자의 편견 탓인지 나이 실감


▎김성령·김상중· 안재욱·길해연· 손정은·고인배가 출연하는 연극 [미저리]는 7월 13일 개막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9월 15일까지 공연된다. / 사진:그룹에이트
김성령은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공인미녀이자 세월이 비껴가는 ‘안티에이징의 대명사’지만, 스스로를 수더분하고 털털한 여자로 포지셔닝한다. ‘평소엔 그냥 평범한 아줌마다’ ‘관리 안하는 것이 비결이다’라는 ‘망언’도 자주 한다. 믿기지 않아 ‘진짜냐’고 따져 물었다. “사실은 관리를 많이 한다고 봐야죠. 스타일리스트가 갖다 주는 옷을 잘 소화해야 하니 운동을 안 할 수 없어요. 워낙 부지런한 성격이라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지 않구요.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니 관절이 아파 요가교실에 가기 귀찮았지만 억지로 갔어요. 한번 빠지면 자꾸 빠지게 되니까요. 저의 생활 패턴을 지키기 위해서죠.”

40대 후반에 ‘중년 여성의 워너비’로 떠오른 그녀도 어느덧 쉰을 넘겼다. 50대라곤 믿을 수 없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로 나이 먹은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관절이 아프더라구요. 눈도 잘 안 떠지는데 ‘류마티스 관절염’ 이런 걸 검색해 봤죠. 다행히 증상이 다르더군요. 아직도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면 마음은 소녀인데, 신체 변화는 많이 느껴요. 흰머리도 부쩍 늘고 노안도 왔죠. 아직 애들이 사춘기인 덕에 갱년기도 모른 채 정신없이 지내고 있지만, 확실히 반환점을 돈 느낌은 있어요. 40대는 30대처럼 살았거든요. 몸도 마음도 30대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50’이란 숫자에 대한 마음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요.”

지난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베테랑이지만, 김성령은 공적인 자리에서 ‘정답’만 얘기하는 여배우들과는 달랐다. 모든 물음에 순수하고 솔직하게 답했다. 내친김에 콤플렉스도 있냐고 물었다. “너무 많아서 하나만 꼽기 어렵네요. 제가 사실 자학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제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성향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부정적인 걸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노력을 하게 되더군요. 제가 운동을 쉬지 않는 것도 집에 디스크 내력이 있어서예요. 운동을 쉬면 바로 디스크가 오거든요. 저희 집에서 저만 수술을 안 했죠. 엄마가 저에게 디스크를 주셔서 운동하게 했어요. 감사한 일이죠. 연기도 그래요. 늘 부족하다 생각하니까 연극까지 하게 됐어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리는 것 아닐까 싶어요.”


▎5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김성령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이 젊게 사는 비결’이라고 했다. / 사진:신인섭 기자
50대 여배우로서 다양한 역할의 기회가 없다는 것도 쿨하게 인정했다. 당장 내일 은퇴를 하게 되더라도 미련은 없단다. 30년 동안 배우 활동을 하면서 아침드라마부터 시트콤, 연극·오페라까지 해볼 건 다해봤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연기만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니까요. 인생이 기니까 다른 일에 대한 생각도 해볼 수 있고, 지금까지 배우만 했다면 다른 일을 병행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모든 문화 콘텐트가 젊은 세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쉽다고 했다. 중장년 세대를 겨냥한 콘텐트도 더욱 다양해져야 한다는 얘기다. “대학로만 해도 그래요. 걷다 보면 민망할 정도로 젊은 사람들만 돌아다니죠. 정작 돈 쓰는 건 중년인데 왜 모든 누릴 것은 20대에 맞춰야 하나요. 점점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는데 모든 게 젊은 사람한테 맞춰지는 건 모순인 것 같아요. 우리 중장년층이 좀 깨우쳐야죠. 한국 영화가 외국에서 상 받은 것도 주변인들은 모르더군요. 제게 동안 비결을 묻는데, 연극도 영화도 보러 다니는 게 젊게 사는 비결이에요. SNS도 좀 하면서 요즘 정보에도 민감하게 살고, 우리부터 생각이 열려야겠죠.”

- 유주현 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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