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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지구촌 인문기행 | 새연재] 투우와 열정의 도시 스페인 ‘론다’에 빠진 거장, 헤밍웨이 

“나는 론다에서 투우사가 싸우는 것처럼 글쓰기를 열망한다” 

영혼을 뒤흔드는 맹렬한 펀치를 찾아 헤매던 헤밍웨이가 강한 애정을 보인 곳
산책로에는 어김없이 턱수염을 단 거구, 헤밍웨이 얼굴 안내판이 관광객 반겨


▎헤밍웨이는 “모든 것 중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은 투우장에서의 격렬한 죽음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해외로 쏟아져 나가는 여행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여행을 즐기는 호모 모투스(Homo Motus, 라틴어로 ‘움직이는 인간’)가 인류의 ‘붙박이 트렌드’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여행은 ‘자발적 고생’, 즉 ‘사서 하는 고생’이다. 여행은 심신이 함께 겪는 것이다. 단지 대상을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겪어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산고(産苦)처럼, 때로는 충만한 희열처럼. 아니 사랑처럼! 미지의, 새로운 세계의 자연과 그에 깃들어 사는 인간과 문화를 찾아 나서는 일은 모험이요 도전이다. 그래서 ‘Travel’(트래블)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어머니가 출산할 때 겪는 산고의 고생이나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 ‘Travail’(트라베일)에서 유래됐다 하지 않는가!

올해 초봄, 그간 억눌렸던 여행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들른 곳은 다시 유럽이다. 한 달 여정으로 남부 유럽을 좀 찬찬히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부유럽 하면 우선 남서쪽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 세계 관광객을 빨대처럼 빨아들이는 ‘태양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떠오른다. 피 튀기는 투우사의 붉은 망토와 혼을 빼는 플라멩코, 끝없이 펼쳐지는 녹회색 올리브나무 구릉이 떠올려지는 나라다. 스페인 중에서도 남쪽 지방을 따라 지중해를 끼고 달리면서 주욱 줄지어 늘어서 있는 멋진 풍광들과 그 뒷이야기만 따라가도 금방 가슴이 뭉클해지는 곳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한 곳, 스페인의 고도(古都) ‘론다’ 하면 ‘인간은 생명불식의 존재’임을 온 육신과 정신을 다해 입증이라도 하듯 격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사람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정말 흥미진진한 글을 쓰려면 수많은 강펀치를 맞아봐야 한다”며 전 생애에 걸쳐 세상 곳곳을 떠돌며 미친 듯이 살아냈던 사람. 남의 나라 전쟁터도 불사한 그는 바로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ningway·1899~1961)다. 영혼을 뒤흔드는 맹렬한 펀치를 찾아 헤매던 그가 수시로 드나들며 강한 애정과 열정을 보인 곳 또한 스페인이며 그중 ‘산간마을 요새’ 론다이다.

스페인의 고도 론다, 산간마을 요새


▎스페인 투우 발상지로 가장 오래된 론다 투우장 입구. 투우사 동상이 있다. / 사진:고혜련
인천공항에서 약 15시간을 날아 바르셀로나공항에 도착한 이후 버스로 14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달리면 론다에 도착한다. 마드리드에서는 기차로 4시간 거리. 물론 일반 여행객들은 패키지 여행상품을 이용해 바르셀로나 도착 후 시계방향으로 남부의 몬세라트~발렌시아~그라나다~론다 등의 과정을 며칠씩 거쳐 가게 되지만 말이다. 그만큼 멀고 큰 나라면서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나라다.

소위 글이나 그림 등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인생 편력에 사랑과 유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등장한다. 작품으로 독자들의 영혼을 전율하게 하려면 공감대가 필요하고 그 공감대 형성에 도전, 열정, 신선함과 설렘, 충격을 안겨주는 데 사랑과 모험을 동반한 여행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출생지이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미국 중부 일리노이주를 벗어나 19세 이후 다른 나라들을 떠돌던 헤밍웨이가 ‘내 나라 미국 다음으로 가장 사랑했던 나라’라고 일갈했던 스페인. 그중 그를 길게, 또는 수시로 붙잡아 맨 곳이 바로 남부 안달루시아의 도시, 론다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알려진 그라나다에서 기차로 2시간여 거리인 이 도시는 대단한 풍광과 함께 ‘론다를 사랑한 헤밍웨이’라는 안내문으로 관광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과연 그가 훑고 다닌 그 많은 지구촌 도시들 중에 도대체 이 도시의 어떤 마력이 ‘대담하고 남성적이며 자극적인’ 삶을 원했던 그를 유인했을까 해서 절로 궁금해졌다.

내가 25년 전 그리고 다시 7년 전, 또 6개월 전 들렀을 때 그곳에서 죽은 헤밍웨이가 맹활약하는 역할은 해가 갈수록 대단해졌다. 론다 정부는 1996년 헤밍웨이를 론다의 ‘양아들’로 명명했고, 2015년 그의 조각상을 설치해 그를 론다의 가족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을 조국으로 둔 그가 스페인의 양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흠모했던 독자들에겐 그가 걸었던 이곳의 산책길도 달라 보이고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 역정과 음성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61년을 살아낸 일생 동안 사방팔방, 동분서주하며 북미 대륙과 유럽, 아프리카, 쿠바 등 곳곳을 잠시도 쉬지 않고 역마살이 들린 듯 헤집고 다닌 그인데 말이다. 까탈스럽고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한 그에게 선택당하려면 장소 역시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까지 든다.

협곡엔 절벽 같은 바위들이 쭉쭉 도열


▎산간마을 론다의 요새에 있는 계곡 풍경과 그 위 산책길을 관광객들이 걷고 있다. / 사진:고혜련
물론 웅장한 산맥의 너울이 도시를 감싼다는 의미에서 온 지명이 ‘론다’라니, 그 가운데 까마득히 높은 바위 협곡 위에 서 있는 산동네는 보는 이의 마음을 당장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도시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는 120m 깊이의 엘 타호(El Tajo) 협곡 사이로는 거친 강물이 흐르고 그 위로 절벽 같은 바위들이 쭉쭉 도열해 있어 아찔한 맛과 으스스한 긴장감을 더해준다. 다분히 위협적이다. 협곡에 놓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누에보 다리, 그 절벽 위로 나 있는 기막힌 풍광을 조망하게 하는 ‘헤밍웨이 산책로’는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기원전 6세기 철기민족인 켈트족이 해발 720m 언덕의 협곡 위에 마을을 건설한 이후 위험천만해 보이는 위치로 인해 주요 군사요새로 쓰였던 곳이란다. 깊고 음습한 저 아래 아찔한 협곡 바닥의 지하는 옛날 무어왕의 별장이 있었던 곳으로, 작은 정원과 지하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서늘한 별미를 선사한다. 스페인 내전 때 포로를 협곡 아래로 던져 버렸다는 뒷얘기도 들리는 탓인가 보다. 하지만 회색 화강암 절벽 위 산간마을은 뜨거운 태양열을 의식해서인지 모두 하얀색 외벽에 주황색 기와를 얹은 모습이 밝고 화려한 기분을 준다. 더구나 그 위로 핏빛 노을이 드리워지면 이제 어두운 옛일은 다 잊고 다만 “이 아름다운 현재를 즐겨라”는 ‘카르페 디엠’이 주문처럼 다가온다. 절벽 위 전망대에서 맞은편의 드넓은 습지와 평야, 그 건너 줄지은 산맥 등을 조망할 수 있어 광활·웅혼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곳이다. 게다가 그라나다에서 광활한 지중해변을 끼고 달리다 다시 론다로 접어드는 길가 들판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광은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외진 곳’에서 머물고 싶다는 미련을 갖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 순수한 자연에의 열망과 감수성이 남달랐을 작가 헤밍웨이가 한동안 이곳에 꽂혀 작품활동에 몰입했을 거라는 추측도 하게 된다. 산책로에는 어김없이 턱수염을 단 거구, 헤밍웨이 얼굴 안내판이 관광객을 반긴다. 그는 이곳 체류 시, 현재는 노란색 칠을 한 절벽 끝 어느 한 집을 빌려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20~30세 때 수시로 드나든 곳이라니 주거지 또한 일정했겠냐마는 아찔한 풍광의 이곳 모습은 그의 성정과 잘 들어맞는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찌 됐든 헤밍웨이를 졸지에 미국문학의 대표 작가이면서 세계인이 사랑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걸작 [무기여 잘 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스페인·이탈리아에서 경험하고 또는 집필한 결과물이기도 하니 다른 어느 곳보다 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대상일 수가 있다. 10대 학창시절 신문 제작반에서 활약했고 지역신문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던 그는 고교 졸업 후인 1918년(19세), 제1차 세계대전 중 자원해 군부대 수송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해 1929년 30세에 발표한 것이 [무기여 잘 있거라]로, 그의 존재를 확고하게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의 첫 작품은 27세 때 완성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방황하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투우장에서의 격렬한 죽음


▎우장 근처 공원에 있는 헤밍웨이 조각상. / 사진:고혜련
사람이 죽고 죽이는 전쟁터는 그의 머리와 가슴을 흔드는 치명적인 한 방을 먹이는 게 분명한 모양이다. 헤밍웨이 자신도 ‘미국에서 경험해 볼 수 없는 인간의 쇼를 맛보기 위해서’ 스스로 1차 세계대전에 자원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혁명 중인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해 한 지역 언론사의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는 종군 특파원(1936~1939)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향한다.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하는 기사들을 써낸 헤밍웨이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글이 다름 아닌 그 유명한 반전(反戰)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배경이 전쟁일 뿐 사실은 로맨스 연애소설이라는 평도 하고 있다.

그의 족적을 좇다 보면, 육신의 환경과 경험을 바꿔주고 영혼을 진동케 하는 설렘을 선사하는 모험 여행이 한 사람의 인생을 예기치 않은 다른 길로 안내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도 여행길에 오르기 전 헤밍웨이와 론다와의 ‘이상한 관계’를 더 이해하기 위한 또 한 방이 필요해 자료를 뒤졌다. 그리고 그럴 만한, 우선적인 이유를 찾아내 쾌재를 부르게 됐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면서.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삶과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투우장 안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탐구할 수 있는 스페인으로 가기를 많이 원했다. 나는 가장 단순한 표현을 글쓰기에서 추구하고 배우려 한다. 모든 것 중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본질적인 것은 투우장에서의 격렬한 죽음이다”라는 말을 들여다 보면 그는 군더더기 없는 글쓰기와 투우를 동일한 좌표에 두고 있었다.

그는 29세 여름, 스페인에서 [오후의 죽음]을 구상하면서 투우에 관한 글을 쓰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투우를 글로 다룬다는 것은 스스로 ‘굉장히 비극적인 취미’라 했다고 전해진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해할 만한 말이다. 장황한 췌사, 군더더기는 글의 힘을 빼버린다. 슬프다고 자꾸 울어대면 그 슬픔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그럴 때 입을 꾹 다물고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슬픔에 더 빠뜨리게 하니 말이다.

헤밍웨이, 4~5년 동안 무려 1천 회 투우 관람


▎1927년 투우장에서의 헤밍웨이. 그는 스페인에 머무른 4~5년 동안 무려 1000회의 투우 관람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헤밍웨이가 이곳에 머문 이유 중의 하나가 투우에 빠진 탓이라고 한다. 그는 ‘격렬한 죽음’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순간을 글쓰기와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었던 걸까? 62세로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1961년까지 20세기의 기라성 같은 작가를 대표하는 그의 작품과 모습, 행동을 접하면 ‘극기’ ‘허무주의’ ‘건조·간결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문체’ ‘강인한 남성상’이란 수식어가 뒤따른다. 게다가 투우를 통해 평소 추구하던 ‘남성성’과 ‘인간 필멸성’을 발견하고 그에 가치를 부여한 때문일까. 한 기록에 의하면 모두 4~5년 이상 되는 이곳의 세월 동안 그가 무려 1천 회의 투우 관람을 했다고 해 애호가를 넘어 중독·광신 단계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은 물론 언론인으로 스페인 투우 시즌을 취재할 겸 이곳에 자주 머물렀단다. 근대 투우의 발상지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됐으며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론다의 ‘플라사 데 토로스 투우장’ 앞에는 투우사들의 동상과 그들과 대결한 성난 투우들의 동상이 시선을 잡아끈다. 론다 시내 투우장 근처 공원에 있는 그의 조각상 역시 그가 추구했던 투우사적인 격렬한 삶과 작가로서의 치열한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론다에서 어떤 투우사가 싸우는 것처럼 글쓰기를 열망한다. 진실하고 제한된 소재로, 단순하고 고전적이며 비극적으로.” 실제로 론다 출신의 한 투우사 부자(父子)는 헤밍웨이의 첫 장편 소설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마지막 작품 격인 [위험한 여름]들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이다.

고향인 미국에 돌아온 그는 40대 중반에 다시 쿠바에 거처를 정하고 소설 [노인과 바다]의 집필에 매달렸고, 1952년 출판 후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두 차례 비행기 사고를 당해 남은 생애 대부분을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사냥과 같은 격렬한 취미에 몰두하고 급기야는 정신착란까지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노인과 바다]로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이후 중압감 때문인지 그 다음 작품은 내놓지 못한 채 심한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여행을 이유로 노벨상 시상식에 불참하면서 서면으로 대신한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상태에서조차 고독한 삶입니다. 작가는 혼자서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훌륭한 작가려면 영원한 고독, 또는 영원한 고독이 주는 결핍과 매일매일 부딪혀야 합니다”라며 당시 자신의 심정을 전하고 있다.

“글도 인생도 수십, 수백 번 고쳐쓰는 것”


▎스페인 전통음식인 하몽 판매상점. 염장발효시킨 돼지 뒷다리가 얼핏 보면 마치 바이올린을 걸어놓은 듯하다. / 사진:고혜련
막바지에는 “아, 이젠 글이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라고 절규하면서 1961년 여름, 병원 퇴원 후 6일 만에 엽총을 입에 문 채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 세상을 경악하게 한다.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발 기사가 전 세계로 쏟아졌다. 남다른 삶을 살았던 그 역시 그럴 듯한 후속작 없이 자신이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못 견뎌한 것일까? 최고의 작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유랑하는 사생활은 거칠고 불안했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투우사의 핏빛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극적인 강펀치를 맞을 수 있는 곳이면 전쟁터든 투우장이든 사냥터든 거친 바다든 막무가내로 뛰어들었던 과거 전력이 그를 입증한다.

또한 세계 곳곳 어디든 날아가 격정적으로 살아내면서 22세에 첫 결혼 후 39년간 네 명의 배우자와 얽히기까지 그 삶은 지극히 소란·불안하고 평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를 포함해 가족 5명(아버지와 형, 누나, 손녀)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운의 가족사에 대해 우울증과 자살은 집안 유전이라는 말도 허공을 맴돈다.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로부터 권위적이고 기백있는 ‘마초’ ‘파파’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작가로서의 성공과는 달리 불운했던 삶이 그의 존재 이유를 앗아간 것이다. 이런 요란한 유랑과 사랑, 몰입의 작품 활동과 고뇌·고독 등이 작가로서의 삶의 원동력인 동시에 마감재였던 것이다. 이런 사연을 안고 그의 동상 앞에 서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평범한 질문에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글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모든 것은 수십, 수백 번 고쳐쓰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극기와 허무주의, 강인한 남성상을 보여주려 했던 그가 론다의 산책길에서 우리에게 주는 말이다. 그가 떠난 지 60년, 그의 족적과 체취가 어린 지구촌 곳곳에선 그를 되살려 만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러면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고 외쳤던 그처럼 우리는 늘 혼란스럽지만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나날이 마주하며 스스로 고삐를 조이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장소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라고. 광대무변한 자연 속에 한 인간의 생로병사가 흡사 한 줄기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하는 새로운 시간들은 옹졸한 편견을 잠재우고 보다 겸허·성숙해지려는 노력을 부르리라.

※ 고혜련 - 칼럼니스트. 자연과 함께하기, 온 세상 여행하기가 요즘 주요 관심사다. 중앙일보 등 국내 외 주요 일간지에서 기자·문화부장·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운명], [힘내! 이제 다시 시작이야] 등 7권의 저서가 있다. 이화여대를 거쳐 미국 뉴저지주립대, 영국 런던대에서 국제정치·저널리즘을 전공했다. 현재 출판사 (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로 일한다.

202307호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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