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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K컬처 톺아보기(17)] '악귀'로 확장된 김은희 작가의 세계 

죽이는 이야기에 온기와 통찰 더하다 

범죄에 오컬트 더한 독특한 장르에 청춘물 아이콘이 주연 맡아 화제
고시원 연쇄 자살사건 등 부조리한 사회 조명하는 날선 시선은 여전


▎김은희 작가의 SBS 금토 드라마 [악귀]는 범죄 스릴러에 오컬트 장르를 더한 작품으로 방영과 동시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 사진:SBSNOW
김은희 작가가 새 드라마 [악귀]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컬트 장르로, 대중의 반응이 뜨겁다. 범죄 스릴러의 대가로 매번 새로운 영역을 열어온 김은희 작가는 어떤 진화 과정을 겪었고, 그의 세계가 가진 무엇이 대중들을 열광하게 하는 것일까?

SBS 금토 드라마 [악귀]는 시작 전부터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은희 작가가 대본을 쓰고 김태리, 오정세가 캐스팅됐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정림 감독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로 “김은희와 김태리의 만남”을 꼽았다. 범죄 스릴러의 대가인 김은희가 쓰고 청춘물의 아이콘인 김태리가 연기를 하는 작품이 어떤 색깔을 낼 것일지 시청자들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범죄와 청춘을 떠올리게 하는 이 두 조합이 장르로 가져온 것이 ‘오컬트’다. 제목에 담겨 있듯이 이 작품은 ‘악귀’가 씐 산영(김태리)과 귀신 보는 해상(오정세)이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한국형 오컬트 미스터리’다.

어찌 보면 접점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살인사건 같은 범죄와 귀신의 접점은 우리네 ‘아랑 전설’ 같은 이른바 ‘원혼 서사’에서 자주 등장했다. [전설의 고향]에서 ‘나비의 한’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던 이 밀양 아랑 전설은, 억울하게 살해당한 사또의 딸 아랑에 얽힌 이야기다. 결국 귀신이 돼 나타난 아랑 때문에 새로 부임해 오는 사또들이 줄초상을 치르는데, 새로 온 사또 이상사가 원귀 아랑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범을 잡아 그 원한을 풀어주는 이야기다. 이처럼 원혼 서사에는 ‘살인’ 같은 범죄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등장한다. 또 그 진실을 풀어주는 이상사 같은 인물도 나온다.

[악귀]가 가진 범죄 스릴러와 오컬트의 접점도 마찬가지다. 산영과 해상은 어쩌다 갖게 된 초현실적인 능력으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상사 같은 인물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했던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은 한 학생의 원혼 이야기는 바로 이 ‘아랑 사또’의 서사와 유사하다.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나타난 원혼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어린 동생이 부모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온 걸 참지 못한 오빠가 그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원혼이었다. 즉 김은희 작가는 아랑 전설 같은 전통적 설화가 가진 범죄와 원혼의 서사구조를 가져와 현대적인 재해석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아랑 전설 등 ‘원혼 서사’ 뼈대


▎김은희 작가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을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발돋움했다. / 사진:넷플릭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산영이라는 청춘 캐릭터다. 산영은 악귀가 씐 인물로 원혼들을 보거나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이상사 같은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점점 커지는 악귀에 의해 잠식당할 수 있는 아랑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즉 외부인을 구원해주는 존재이면서 자신 또한 구원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것. 산영에게 빙의된 악귀는 깃든 자의 욕망을 들어주면서 점점 커지는데, 그 욕망은 때론 분노와 저주로 표출되기도 한다. 산영의 어머니에게 보이스피싱을 한 범죄자는 그래서 산영의 저주를 들어준 악귀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분노는 그 욕망을 들어주는 악귀에 의해 세상의 악을 처단하는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영의 안에 깃든 악귀는 점점 커진다.

세상의 악과 싸우면서 내 안의 악귀를 억눌러야 하는 산영의 처지는 이 범죄 스릴러에 오컬트를 더한 작품이 현재의 ‘청춘들’과 만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는 가득하고, 그래서 당장 저들을 처단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만 그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어쩌면 자신마저 파괴될 수 있다는 걸 [악귀]의 산영이라는 청춘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은희 작가가 범죄 스릴러에서 시작해 오컬트 장르로까지 확장해온 이 선택들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 김은희 작가의 초창기 범죄 스릴러인 [싸인], [유령] 같은 작품들은 리얼한 범죄의 세계를 담아내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받았지만, 전반적으로 차가운 느낌이 강했다. 범죄 현장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공포에 가까운 자극들이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세계에 인간적인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악귀]를 보면 김은 희 작가가 그간 어떤 변화와 진화를 겪었는지 느껴진다. 귀신과 범죄가 더해진 이 작품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온기, 그리고 통찰이 느껴지니 말이다.

예를 들어 [악귀]에서 고시원에서 발생한 연쇄 자살사건을 다룬 에피소드나 청년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 어르신들만 있는 백차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객귀’ 에피소드를 잘 들여다보면, 거기서 ‘청년들’이 맞닥뜨린 막막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하고도 날선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값비싼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사채업자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되지 않아 빚쟁이로 내몰리는 현실이 ‘고시원 연쇄 자살사건’의 이면에 담긴 이야기이고, 도시로 가야 살 수 있어 고향을 떠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객귀(길에서 죽은 귀신)’의 처지가 돼 고향으로 돌아오는 현실이 ‘백차골 사건’이 꼬집는 이야기다. [악귀]는 이처럼 자극적인 소재의 차원을 넘어 세상에 대한 통찰이 그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옛 문서 찾아보며 작품 연구해


▎김은희 작자는 앞서 [킹덤](왼쪽)에서 오컬트적 요소를 선보였으며, 이후 [지리산](오른쪽)을 통해 이러한 요소를 더욱 발전시켰다. / 사진:넷플릭스, tvN
초창기 다소 차갑게 느껴졌던 김은희 작가의 세계가 본격적인 변화를 시작한 건 [시그널]부터였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무전기라는 판타지가 더해진 이 작품이 그리려 한 세계는 미제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풀어보려는 강렬한 열망이 판타지로 발현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작중 인물들이 가진 피해자들에 대한 절절한 공감과 인간애 같은 따뜻한 감정이 특히 중요했다. [시그널]에 등장하는 박해영(이제훈), 차수현(김혜수), 그리고 이재한(조진웅) 같은 형사들이 더할 나위 없이 인간미를 가진 형사들로 그려진 건 그런 이유에서다.

[시그널]은 또한 김은희 작가가 그려온 범죄 스릴러의 세계가 판타지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물론 훨씬 이전에 만화 원작으로 썼던 작품이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은 훨씬 더 확장되고 성장한 김은희 작가의 공력이 더해져 전 세계가 열광하는 작품이 됐다. 특이하게도 두 부류의 좀비군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가난해 어쩔 수 없이 좀비가 된 서민 좀비군과, 부유하지만 여전히 권력과 혈통에 굶주린 권력자 좀비군을 통해 양극화된 세계를 정치적으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공포에 가까운 살벌한 스릴러를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색다른 느낌의 좀비들을 탄생시켰다.

[시그널]이 시도한 판타지가 [킹덤]이라는 보다 확장된 세계로 그 상상력을 연결한 것처럼, [킹덤]이 갖는 오컬트적 요소는 그 후 [지리산]을 거쳐 [악귀]로도 이어진다. 김은희 작가는 [킹덤]을 쓰면서 옛 문서들을 찾아 당대의 지리와 지방의 특징,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자잘한 사건들을 들여다봤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한국의 설화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리산]이 다룬 역사적인 공간에서 벌어졌던 사건·사고들도 그렇지만, [악귀]가 그리고 있는 ‘태자귀’ 서사나 객귀를 몰아내기 위해 하는 ‘허제비 놀이’ 같은 이야기도 김은희 작가가 가진 우리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킹덤', '시그널' 등 장르 넘나들어


▎김은희 작가의 tvN 드라마 [시그널]은 미제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풀어보려는 강렬한 열망이 판타지로 발현된 작품이다. / 사진:tvN
하나의 장르를 깊게 파다 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김은희 작가는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시종일관 추구해왔다. [무한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반 농담으로 사랑 이야기보다는 어떻게 사람이 죽을 수 있는가를 계속 찾아내고 들여다보는 일을 주로 해왔다고 했지만, 그 ‘죽이는 이야기’가 지향해온 건 결국 ‘삶의 이야기’였다. 피해자나 남은 가족들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현실의 부조리를 찾아냈고, 거기 담긴 대중의 정서들을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억울함이나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어떻게든 끌어안으려는 열망은 판타지로 확장되며 [시그널]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무전기 같은 장치를 만들었고, 이른바 ‘헬조선’으로 불리는 양극화된 현실의 문제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좀비물로 그려졌다.

또한 [킹덤] 같은 한국의 로컬 문화를 장르물과 결합해 글로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경험은, 이제 김은희 작가가 [악귀] 같은 ‘한국적인 소재나 서사’에 더더욱 관심을 갖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특히 장르의 결합에도 더욱 능숙해진 필력은 [악귀] 같은 작품에서 범죄와 오컬트를 넘나들며 시청자들의 예상을 깨는 전개를 가능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악귀의 짓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악귀보다 더 악독한 인간의 짓이라는 걸 밝히기도 하고, 정반대로 사람이 벌인 짓인 줄 알았더니 악귀가 한 짓이라는 식으로 반전을 만든다. 이러한 반전은 자연스럽게 악귀와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을 같은 위치로 세워 놓음으로써 그런 범죄자들을 비판하고, 나아가 악귀가 저지를 법한 강력 범죄가 탄생하게 되는 현실의 시스템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물론 [지리산]은 사건을 사고로 위장하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갖가지 이야기를 품은 지리산을 배경으로 풀어낸다는 괜찮은 기획에도 불구하고 기대만큼의 성취를 이뤄내지 못했다. 하지만 [악귀]를 보면 [지리산]의 이런 아쉬움은 오히려 자양분이 돼 보다 원숙해진 서사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범죄 스릴러로 시작해 판타지를 더하고 사극과 좀비물을 더한 퓨전을 실험하더니 이제 오컬트 장르까지 확장해온 김은희 작가의 세계.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 끊임없는 도전 때문이 아닐까. 그로 인해 우리는 매번 신박한 세계를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MBC 시청자 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백상 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SBS [열린TV 시청자 세상],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 등이 있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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