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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8)] 동아시아 명예를 회복시킨 한반도 ‘주먹도끼’ 

인도 동쪽으로는 만들지 못했다는 잘못된 가설을 깨부수다 

그렇다고 가치 부풀리진 말아야, 문명에는 우열 아닌 차이 있을 뿐
편협한 국가주의나 맹목적 애국심은 제2의 ‘황자총통’ 사건 부른다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 주상절리. 이곳 인근에서 한 미군 병사에 의해 발견된 주먹도끼가 인도 동쪽으로는 주먹도끼를 만들지 못했다는 ‘모비우스 라인’을 도끼 찍듯 깨버렸다. 구석기인들은 한탄강과 임진강 일대 강자갈을 떼어내 ‘구석기 맥가이버 칼’로 불리는 주먹도끼를 만들었다. / 사진:이훈범
"아니, 이것은?”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 유원지에서 한국인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즐기던 주한 미공군 기상관측병 그렉 보웬 상병은 강가에서 주운 돌멩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강변에 널린 조약돌을 살피던 그의 눈에 띈 것은 강가에 널린 둥근 조약돌들과는 달리 모서리 여러 군데가 깨져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돌끼리 부딪쳐 깨진 흔적이 아니었다.

입대 전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직감적으로 그 돌이 인위적으로 가공한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데이트는 보물찾기로 바뀌었다. 보웬과 여자 친구는 주변을 뒤져 비슷한 모양으로 깨진 돌 여러 개를 찾아냈다. 보웬은 주운 돌을 당시 세계 고고학계 최고 권위자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보르드 교수에게 보냈다. 보르드 교수는 얼마 후 다시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에게 그것을 보내 사정을 알리고 조사를 권했다. 서울대 조사팀은 즉시 유물 발굴 작업에 착수했고, 전곡리 일대에서 6000여 점의 유물을 발견하게 된다.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이른바 ‘주먹도끼’가 한반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 순간이었다.

구석기 시대 지혜의 상징 주먹도끼


▎주먹도끼 발견 당시의 주한 미공군 그렉 보웬 상병. / 사진:전곡선사박물관
지난 호까지 금속활자와 한글, 그리고 세종대왕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시대를 훌쩍 건너 뛰다보니 어리둥절한 독자도 있겠다. 세계 최고(崔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금속활자의 중요성을 인식한 몇 안 되는 선각자로서 금속활자 제작과 인쇄기술의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한 세종대왕, 그리고 그러한 세종대왕이 자신의 목숨과 바꿨다고도 할 수 있는 회심의 역작 한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서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 우수성, 독창성만 봐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품이요, 우리가 오늘날에야 비로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류’의 원형이자 동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살피는 데는 항상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자칫 우리 것의 우수성을 강조하다가 불필요한 과장을 일삼고, 남의 것은 대수롭지 않게 폄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자세가 아니다. 그저 편협한 국가주의이자 알량한 쇼비니즘, 즉 맹목적 애국주의일 뿐이다. 흔히 일컫는 ‘국뽕’ 말이다. 그런 식으로 치장한다고 해서 우리 것이 더 우수해질 리 없다. 오히려 애꿎은 우리 국민만 공연히 부끄럽고 구차하게 만들 뿐이다.

금속활자와 한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쉬운 점, 안타까운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 위대한 자산들이 당시에는 자랑스럽게 세계로 수출되기는커녕, 국내에서조차 빛을 발하지 못하고 애물단지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과거에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보상이라도 하듯 그 가치를 부풀리는 것은 과거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반복한 것일 뿐이다.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어떤 문화건 그들 사이에 높고 낮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는 그 문화가 탄생한 자연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차이의 우열을 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를 연구하는 올바른 자세이며,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시야를 좀 더 넓혀보는 것도 좋을 듯해서 시간을 거슬러 오른 것이다. 짧게는 4~5만 년, 길게는 수십만 년 전 구석기 시대로 말이다.

다시 한탄강변으로 돌아가 보자. 보웬의 발견은 한반도 유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전체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대발견이었다. 동북아 일대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게 밝혀진 건 겨우 20세기 들어서다. 이전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구석기 인류가 살았다는 추측이 많았다. 그러다가 1918년 중국 저우커우뎬(周口店) 동굴 유적에서 ‘곧선사람(직립원인 homo erectus)’ 화석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동아시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후에도 아시아의 구석기 문화는 유럽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유럽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주먹도끼(handaxe)’와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찍개(chopping tool)’들만 발견됐기 때문이다.

주먹도끼는 돌의 양쪽 면을 떼어내 날카롭게 만든 도구다. 1859년 프랑스 북부 생타슐(St. Acheul)에서 처음 발견돼 ‘아슐리안 주먹도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에 비해 찍개는 주로 한쪽 면을 떼어낸 것으로, 양면 대칭성이나 정교함이 주먹도끼에 못 미친다.

고고학과 교수 모비우스의 가설을 깨다


▎2005년 내한 당시의 그렉 보웬과 부인 상미 보웬(이상미) 씨. / 사진:연합뉴스
이를 바탕으로 미국 하버드대 고고학과 교수인 핼럼 모비우스는 1948년 구석기 문화를 인도를 기준으로 주먹도끼와 찍개의 양대 문화권으로 구분하는 가설을 발표했다. 즉 인도 서쪽인 유럽·아프리카·서아시아를 아슐리안 문화권으로, 인도 동쪽인 동아시아와 아메리카는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에서만 존재했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그보다 열등한 형태인 찍개만 사용됐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이런 ‘모비우스 라인’이 정설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주먹도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비우스의 성급한 결론은 은연 중 동아시아 지역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으므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히말라야 동쪽에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이다. 알고 보니 주먹도끼는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서 흔한 도구였다. 거의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주먹도끼가 발견된다. 모비우스 가설이 자동 폐기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많은 양의 주먹도끼가 출토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 주먹도끼가 유럽 아슐리안 주먹도끼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여전히 남아있다. 아슐리안에 비해 동아시아 주먹도끼의 두께가 두껍고 처음 떼어낸 뒤 다듬는 과정이 없는 등 가공도가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재료의 차이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주먹도끼는 구석기 시대의 맥가이버 칼


▎주먹도끼는 돌의 양쪽 면을 떼어내 날카롭게 만든 도구다. 1859년 프랑스 북부 생타슐(St. Acheul)에서 처음 발견됐다. / 사진:Don’s maps
유럽의 주먹도끼는 주로 각암(角岩 chert) 또는 흔히 부싯돌로 불리는 수석(燧石 flint)으로 만들어졌다. 이들 석재는 충격을 받아 깨질 때 얇고 날카로운 조각으로 갈라지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주먹도끼는 물론 이후에도 칼·창·화살촉 등을 만드는 데 애용됐다. 그 같은 품질 좋은 수석이 벨기에, 영국 해안, 파리 분지, 폴란드 크라쿠프 지방 등 유럽 각지에서 대량 산출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의 경우 그 같은 석재가 부족해 강가 자갈의 측면을 떼어내 만든 주먹도끼가 대부분이다. 주로 변성암인 규암 또는 응회암, 화강암 등이어서 경도가 높다. 따라서 정교한 날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유럽 지역 주먹도끼에 비해 가공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먹도끼가 돌의 전면을 떼어내 만든 경우가 많은 유럽 주먹도끼와 달리, 뾰족한 끝부분과 양옆 가장자리만 떼어내 부분적으로 날을 세우고 손으로 쥐는 밑 부분은 그대로 놔두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또한 그래서 유럽의 경우 부드러운 나무나 뿔, 뼈 같은 연질 망치로 재가공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돌망치로 큰 떼기만 해서 날을 세우고 날을 가지런히 곧게 펴는 마무리 단계의 잔손질이 생략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가장 큰 차이라면 유럽·아프리카에서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이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이것 또한 앞서 예시한 이유 때문이겠지만) 대표적 유물이 되지 못했다는 정도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주먹도끼에 관심이 쏠리는 걸까. 그것은 인류가 최초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든 석기가 바로 주먹도끼이기 때문이다. 주먹도끼는 한 손에 쥐고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물론 가죽을 벗기고 구멍을 뚫으며, 두들기거나 찍고,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뿌리를 캐는 등 거의 모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였다. 흔히 주먹도끼를 ‘구석기시대의 맥가이버 칼’로 비유하는 게 그래서다.

배기동 전 국립박물관장은 “주먹도끼를 만들어낸 것은 인류의 도구 제작기법이 1차원에서 3차원으로 뛰어오른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가 진화한다는 것은 두뇌 용적이 커진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생각이 깊어지는 증거로 판단되며 따라서 주먹도끼의 존재는 곧 “구석기인들의 지혜의 상징”이라는 얘기다.

인류가 석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330만 년 전이다. 그런데 주먹도끼는 170만 년 전에야 비로소 사용됐다. 인류 도구사의 절반은 그저 돌멩이를 주워 쓰는 1차원적 도구만 존재하는 시기였던 셈이다. 그러다 인류가 주먹도끼를 만들 정도로 두뇌가 발달하고 나서야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 끝까지 이동하는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인류는 주먹도끼를 100만 년 이상 사용해왔다.

한반도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전곡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약 30만 년 전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주먹도끼가 가장 빠른 것도 아니고, 특별히 우아하거나 상대적으로 기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웬의 발견은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없다는 잘못된 가설을 바로잡은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지질학적 환경의 차이에 적응해 유럽과 아프리카의 주먹도끼보다는 좀 거칠고 투박하지만, 기능성에서는 떨어지지 않는 한반도식 주먹도끼를 만들어낸 먼 조상들의 지혜를 이해하면 그만인 것이다.

‘열등한 동아시아인’ 편견을 단숨에 극복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 유원지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 사진:전곡선사박물관
하지만, 전기 구석기 시대 최고의 히트상품이 한반도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을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이다. 일본은 1970년대 말까지도 가장 오래된 유물의 연대가 3만 년 전 것에 불과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현재는 여러모로 가장 앞선 선진국인데, 과거를 돌아보면 한국과 중국에 비해 후진적 문명이었다는 데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발견된 유물이 일본에 없을 리 없다는 강박관념이 일본 고고학계를 조급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사고가 나고 만다. 이른바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사건이 그것이다. 후지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2년부터 독학으로 고고학을 연구했다. 이듬해인 1973년 토호쿠 지방의 후루카와시(오늘날 오사키시)에서 기와 유물을 발견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1975년부터 직접 탐사팀을 조직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러다가 1981년 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견한다. 일본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물의 시기를 1만 년 앞당긴 것이다. 일본 열도가 흥분했음은 물론이다.

후지무라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후로도 계속 구석기 유물을 발굴해내며 일본의 구석기 연대를 속속 앞당겼다. 후지무라가 땅만 파면 구석기 유물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딸려 나온다고 해서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1990년대 말에는 70만 년 전 구석기를 발굴해 영웅이 된다. 한국의 구석기 연대와 같아진 것이다.

교과서에 그의 업적이 실리고, 토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소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드디어 2000년 후지무라는 아사히신문을 통해 자신이 80만 년 전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한 달도 못 가 마이니치신문에 “후지무라의 발굴은 날조”라는 특종이 실린다. 후지무라가 미리 만들어 놓은 가짜 유물을 유적지에 묻어놓은 다음, 얼마 후 그곳을 찾아 발굴하는 쇼를 벌였다는 것이었다. 한 달 전 제보를 받은 마이니치 특별취재팀이 설치해놓은 몰래 카메라에 후지무라가 가짜 유물을 묻은 뒤 발로 흙을 다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찍혔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후지무라는 시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 날조 사건


▎1918년 중국에서 ‘곧선사람(베이징원인)’ 화석이 발견되면서 최초 잉글랜드인으로 여겼던 ‘필트다운인’ 표본이 인류의 진화 과정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사진은 곧선사람 두개골 복원도. / 사진:위키백과
조사팀이 정밀 조사를 한 결과 후지무라가 1970년 이후 발굴한 유적 180곳의 90%에 해당하는 162곳에서 나온 유적에서 조작된 흔적이 발견됐다. 나머지 18곳의 유물도 조작 흔적만 없을 뿐 가짜일 가능성이 높아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일본 열도가 패닉에 빠졌다. 후지무라의 발굴 유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해제됐고, 나머지 유물들도 모두 폐기 처분됐으며, 오직 조작 증거물로서 필요한 것들만 창고에 보관되고 있을 뿐이다. 교과서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이 삭제됐음은 물론이며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영구 제명됐다.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은 명예욕에 눈이 먼 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구조적인 병폐가 도사리고 있었다. 후지무라의 발굴 작업이 처음부터 빈틈이 많고 엉성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물은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가의 구석기 유물과 너무도 달랐다. 인근 지역끼리 서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후지무라의 것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뗀석기를 만드는 방식에서 확연히 차이를 가진 도구였다. 또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면 필연적으로 떼어내기 전 원래의 큰 돌인 몸돌과 떼어낸 석기를 가공하며 생기는 돌조각인 격지가 주변에 함께 발견되기 마련인데, 후지무라의 경우는 몸돌과 격지 없이 오직 유물만 있었다. 게다가 발굴된 석기의 재질도 주변 석재와 달랐고 수십㎞나 떨어진 지역에서 따로 발견된 석기들의 아귀가 정확히 들어맞은 경우까지 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막 흙 속에서 발굴한 석기에 마른 흙이 붙어있다거나 구석기 유물에서 쇠로 돌을 조각할 때 생기는 철선상흔이 발견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정적으로 후지무라가 아니면 다른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아무리 같은 곳을 뒤져도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듯 후지무라의 발굴은 의혹투성이였으나 맹목적 애국심이라는 집단사고가 눈을 가렸다.

일말의 양심 있는 학자들이 후지무라의 유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일본 정부와 주류 학계는 그런 학자들을 오히려 비판하며 매국노 취급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후지무라의 업적에 의구심을 품는 것 자체가 백안시됐다. 후지무라의 사기극이 벌어지는 20년 동안 후지무라에 의혹을 제기한 논문은 고작 두 편에 불과했다.

이런 유물 조작 사건이 비단 일본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작 사건은 영국의 ‘필트다운인 사건(Piltdown hoax)’일 것이다. 1912년 영국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찰스 도슨과 지질학자 아서 우드워드는 잉글랜드 남부의 옛 서식스주 필트다운에서 50만 년 전 고대 인류의 두개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두개골 파편은 뇌의 용적은 크면서도 유인원 같은 아래턱뼈를 가진 기묘한 것이었다. 당시 고고학자들은 유인원과 인간의 진화적 연관성을 증명하는 ‘중간 고리’를 찾고 있었는데, 이른바 ‘필트다운인’이 그것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필트다운인은 가장 오래된 인류라는 뜻과 발견자 도슨의 이름을 합쳐 에오안트로푸스 도스니(Eoanthropus dawsoni)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고고학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후 1920년대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에 속하는 여러 원인들과 중국에서 ‘곧선사람’ 화석이 발견되면서 필트다운인 표본이 인류의 진화 과정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인류가 직립 보행을 하면서부터 두뇌가 커졌다는 사실이 입증됐지만, 필트다운인은 두뇌가 커진 뒤 직립보행을 하는 반대 순서를 밟은 것이다. 이에 불소연대측정법을 비롯한 각종 과학적 분석이 이어졌고, 결국 1949년 필트다운인 두개골은 가짜임이 판명됐다. 중세 인류의 두개골에 500년 전 오랑우탄의 턱뼈를 끼워 맞춘 것이었다. 필트다운인 사건은 아직도 조작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도슨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인물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힘을 얻고 있는데, 그 혐의자 중에는 [셜록 홈즈]의 저자인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까지 끼어있다.

영국에서 발견된 ‘필트다운인’도 조작된 사건


▎1949년 필트다운인 두개골은 가짜임이 판명됐다. 중세 인류의 두개골에 500년 전 오랑우탄의 턱뼈를 끼워 맞춘 것이었다. 사진은 필트다운인 두개골 복원도. / 사진:위키백과
이 사건 역시 일본의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건의 발단이 맹목적 애국심 또는 지나친 국가주의의 그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에는 고생 인류의 화석과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돼 고고학적 관심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그러한 화석 발견이 전무했다. 1856년 독일에서 네안데르탈인, 1868년 프랑스에서 크로마뇽인의 유골이 발견됐지만 영국에서는 고생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없어 영국인들의 자존심이 크게 상하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때에 나온 도슨의 발견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을 단번에 뛰어넘어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과였기에, 영국의 과학자들이 주위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을 애써 무시하고 스스로 눈을 감은 것이다. 발견 당시부터 인간의 두개골에 원숭이의 턱뼈를 붙인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무시됐다. 그렇게 40년 가까이 필트다운인은 영국 학계에서 “최초의 잉글랜드인”으로 불렸고, 관련된 논문도 250편이나 발표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본이나 영국을 비웃을 만큼 언제나 떳떳한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 역시 웃지 못할 조작 사건이 있었다. 1992년 ‘별황자 총통 사건’이다. 그해 8월 18일 해군사관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충무공 해저유물 발굴단이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도 수역에서 총통 하나를 인양했다.

총통에는 ‘만력 병신년(1596) 6월 일 제조하여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 造上 別黃字銃筒)’, ‘귀함의 황자는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귀함은 기록만 있을 뿐 실물은 전하지 않던 거북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어서 국내 역사학계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그 해가 임진왜란 400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국민들의 관심도 더욱 지대했다.

문화재청은 총통이 인양된 지 17일 만에 그것을 ‘국보 제274호 귀함별황자총통’으로 지정했다. 아무리 언론이 앞장선 여론의 부추김이 있었다지만 빨라도 너무 빠른 조치였다. 국보 황자총통은 해사 박물관에 소장됐으며 총통에 새겨진 문구 ‘일사적선 필수장(一射敵船 必水葬)’은 해군의 모토가 됐다. 별황자총통이 위조된 것이라는 사실은 4년 뒤 수산업자의 뇌물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에 의해 우연한 기회에 드러났다. 당시 현역 해군 대령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수산업자, 골동품상의 합작품으로 이들이 미리 제조한 총통을 바다에 빠뜨려놓고 다시 건져 올린 것이다.

편협한 국가주의, 알량한 쇼비니즘 경계해야

사실 우리 역시 발굴 당시부터 의문이 다수 제기됐었다. 400년 동안 바다에 잠겨있던 총통치고는 표면의 부식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새겨진 명문이 너무도 선명했다. 게다가 명문 자체도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던 단어가 쓰였다.

함(艦)이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판옥선처럼 선(船)을 썼고, 함을 쓴 것은 일본식 한자를 차용한 최근의 일이다. 적선(敵船)이란 말 또한 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군을 도적 취급했기에 적선(賊船)으로 썼다. 사(射)의 경우도 화살을 쏠 때를 말하며 화약무기를 쏠 때는 방(放)을 썼다.

이처럼 금방 눈에 띌 수 있는 조작이 빗나간 국가주의와 눈 먼 쇼비니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는 대망신이고 신뢰 추락이다. 그러한 국가주의와 쇼비니즘은 단순히 유물을 조작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늘 내포하고 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독일의 나치즘에 의해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주장한 우생학으로 발전하고, 나아가 유대인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치닫고 만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주변국들의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후지무라의 어설픈 사기극에 열광하는 국가주의의 망령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가 한류를 내세울 때 늘 염두에 둬야 할 교훈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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