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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3)] 고대 근동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농업이 파괴한 중동의 ‘낙원’ 

에덴동산 같던 옥토가 어떻게 소금밭이 됐을까 

고대 이라크 일대 비옥한 충적토로 수확량 높았지만 갈수록 지력 쇠해져
화전 농업으로 숲까지 사라지자 홍수로 농경지 잠기며 결국 소금밭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아시리아식 부조에 길가메시로 추정되는 남성의 형상이 조각돼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세계가 비옥하던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 엔릴은 아우성을 듣고 평의회에서 신들에게 말했다. ‘인류의 소란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어서 더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신들은 인류를 멸망시키는 데 동의했다. 폭풍우의 신인 엔릴이 선동자였고 사랑의 여신이자 하늘의 여왕인 이쉬타르를 포함한 다른 신들은 그에 따랐다. 그러나 지혜의 신인 에아는 꿈에서 우트나피쉬팀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내가 말하노니, 너의 집을 헐어서 배를 만들고, 모든 재산을 버리고 살 길을 찾아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의 종자를 배에 실어라.’”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 경 고대 중근동에서 문명을 발달시킨 수메르인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과 무척 닮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와 흡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노아의 방주 설화에서는 인류가 결국 구원받고 다시는 물로 멸망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지만, 수메르 신들은 대다수가 살아남은 인류에 대해 굉장히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두 이야기가 매우 비슷한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느 이야기가 먼저일까. 고고학자들은 여러 유적 등을 근거로 수메르 문명이 먼저였으며, 노아는 위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의 다른 버전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 최초의 대홍수 사건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수메르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농경으로 일어선 수메르 문명


▎이라크 알 무타나 주의 건조한 농지에 소금 잔여물이 쌓여 있다. 수메르 문명 때부터 이곳 일대는 대규모 관개 농업으로 소금밭이 됐다. / 사진:연합뉴스
인류의 문명은 농경과 함께 시작했다. 농경이 시작된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로 불리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이 감싸는 지역(지금의 이라크 일대)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문명이 시작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의 교차로로서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농업이 가능한 환경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지금이야 이라크라고 하면 사막과 석유가 떠오르지만, 과거에는 많이 달랐다.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5000~4000년경 이라크는 물고기, 집보다 큰 갈대, 대추야자가 풍부했으며 멧돼지와 물새가 사는 숲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이런 환경이었으니 농사도 가능했을 것이다.

농사를 짓기에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강 덕분에 만들어진 비옥한 충적토에서 경작하면 100배가량의 수확을 거뒀다고 한다. 덕분에 여분의 식량이 생겨났고, 이것은 사제, 군인 같은 비생산적 전문직종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그렇다고 농사가 아주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이다 보니 인류는 농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고 그에 따라 시행착오가 잦았다. 가장 큰 문제는 쉼 없이 토지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비료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윤작(輪作), 즉 돌려짓기를 해야 한다. 곡물은 질소를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일단 경작을 하게 되면 토지에서 질소가 많이 빠져나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가 질소를 회복할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질소가 소모된 토지에서는 농사를 지어도 작물이 거의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에 들어와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는 질소 비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중세시대 삼포식 농업처럼 토지를 몇 등분으로 나눠서 농경과 휴경을 반복시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기 농경민들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토지를 혹사했다. 기원전 5500년경 초기 신석기시대 거주지 중에 지금 많은 곳이 황폐해졌는데, 이때 쉬지 않고 농경을 거듭한 결과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그러다가 더는 토지에서 생산이 불가능해진 것을 깨달으면, 숲을 태워서 거기서 다시 농사를 지었다. 화전 농업이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사해 부근의 예리코(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는 ‘여리고성’으로 표기)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곳 일대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 광범위한 삼림 벌채와 침식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오늘날 불 수 있는 것처럼 이 일대가 반(半) 사막화돼 더는 농사가 불가능해질 때까지 이런 패턴이 계속 반복됐을 것이다.

당초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커다란 범람원 북쪽에 있던 인류는 농사가 가능한 땅을 찾아 아래로 내려왔다. 에덴동산에서 나올 때 천사들이 불타는 칼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했다는데, 인류학자 중 일부는 그것이 인류 최초의 농경지에서 숲에 불을 지르면서 농사를 계속 짓다가 떠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에덴동산, 인류 최초 농경지에 대한 추억일 수도


▎미국 LA 폴 게티 미술관에 있는 얀 브뤼헬의 그림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동물들(1613)’.
구약성서 [창세기] 2장 8-14절에는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동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가 기록돼 있다. 에덴에서 강이 발원(發源)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비손 강과 기혼 강과 힛데겔 강과 유브라데 강을 이루었다고 했다. 옛날부터 에덴동산의 실체에 대해 논란이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에덴동산의 구체적 위치를 찾기 위해 몇 가지 희미한 단서를 부여잡은 채 많은 노력을 했다.

예를 들어 ‘에덴’이라는 어원은 히브리어로 ‘기쁨’이지만 고대 수메르어 ‘에딘(edin)’은 개방된 들판을 의미한다. 수메르 농경문화에 주목하는 이들은 에덴동산을 인류가 최초로 농경을 시작해 풍요로웠던 지역에 대한 기억 또는 향수가 결합돼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또한 에덴동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 즉 네 강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에덴동산으로부터 발원했다는 네 강에서 힛데겔 강은 티그리스 강, 유브라데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가리킨다. 문제는 비손 강과 기혼 강이었다. 이 두 강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일부 학자들은 이 두 개의 강을 농경과 연결시켰다. 한국어나 영어에서는 강과 운하가 분명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나 히브리어에서는 나하르(Nahar)로 동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제외한 비손 강과 기혼 강은 이 일대의 거대한 농경지를 위해 건설된 운하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만들어졌다.

사실 넓은 평야 지대에서 농경을 하기 위해서는 관개 수로 시설 보급이 필수다. 한국도 삼국시대에 이미 벽골제 같은 거대 저수지를 만들었던 기록이 있듯이, 고대문명의 농경 지역에서는 운하가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다. 더군다나 메소포타미아처럼 넓고 다소 건조한 지역에서는 물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에 운하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부분이 있다. 바로 염분이다. 강은 바위와 땅을 훑고 지나가면서 소금을 씻어내 바다로 나른다. 그런데 강물을 마른 땅으로 끌어들이면 이것이 바다로 흘러나가지 않기 때문에 증발하면서 소금이 남게 된다. 다시 말해 물을 확보하기 위해 관개 수로(특히 지하수)를 이용했을 때 물이 증발하면 물에 녹아 있던 염류가 누적돼 토양에 나트륨이 쌓이게 되고, 이것은 토양의 독성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배수로와 오랜 휴경, 땅을 씻어 내리기에 충분한 강우가 없는 한 관개 수로는 미래의 소금밭을 만드는 도구로 돌변한다.

숲 사라진 강 상류에서 홍수 시작 돼


▎[길가메시 서사시]가 기록된 점토판의 모습. 대홍수와 방주의 건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어떤 분야든 선구자들은 리스크를 지게 되는 법이다. 초기 농경을 번성시켰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 문제로 직격탄을 맞았다.

처음 인류가 농경을 시작했을 때 지금의 이라크 남부는 관개 농업을 시작하기에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씨앗을 뿌리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100배의 수확으로 돌아왔다. 이집트나 중국에서 문자는 신성한 텍스트나 예언, 왕가의 성스러운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해 발명됐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는 회계를 위해 발명됐다는 점도 이 지역의 풍성한 생산량을 방증한다.

하지만 인구가 늘어나자 기존 농경만으로는 부족했다. 수확량을 배가시키기 위해 거대 수로도 건설해 대규모 농경을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농경 문명과 수로 시설의 선구자였던 수메르인들은 그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가져올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휴경 없이 농사로 지친 땅은 점점 지력이 쇠했고, 소금기가 쌓여갔다. 결국 황폐해진 밭을 포기하고 새로운 땅을 경작했지만, 개간이 가능한 땅은 점점 줄어들었다. 기원전 2000년경 당대 기록자들은 ‘땅이 하얗게 변했다’고 기록했다. 농작물의 흉작이 이어졌고 수확은 기존 생산량의 3분의 1로 낮아졌다.

결국 수메르인들은 밀을 포기하고 보리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보리가 소금에 한층 더 잘 견뎠기 때문이다. 기원전 2500년경 밀은 농작물의 15%에 불과했고, 기원전 2100년경에는 밀 경작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오늘날 이라크에서 관개 농업을 하는 토지는 절반가량이 염분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 다음은 이집트와 파키스탄인데, 모두 고대 문명이 번성한 지역들이다.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미래를 훔친 대가였던 셈이다.

농경으로 인구는 급증했지만, 이를 지탱하기 위해 농경을 지속한 대가는 컸다. 화전 농업으로 숲은 사라지고, 수로 건설로 인해 농경지는 소금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큰비가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숲이 사라진 평야에서 폭우는 홍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숲이 사라진 강의 상류에서 시작된 홍수는 흙모래와 자갈이 섞인 거대한 흐름으로 강 하류의 농경지를 뒤덮었을 것이다.

그동안 이룩한 농경지가 사라지고 자신과 하늘 사이에 물밖에 없는 것을 보게 된 고대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길가메시 서사시]에 따르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시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신들이 홍수를 일으켰다’고 한다. 수메르인들이 홍수로 잠긴 농경지를 바라보며 바로 그런 상상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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