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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K컬처 톺아보기(18)] K예능, 다시 격변기에 서다 

‘국민 예능’은 옛말, ‘취향 예능’이 대세 

방송사에서 스튜디오로, 예능 PD들의 엑소더스 눈에 띄게 늘어나
대세 예능에 인플루언서 다수 출연, ‘유튜브 확장판’ 성격 강해져


▎기안84와 덱스, 빠니보틀이 출연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2]는 마치 유튜브 여행 콘텐트를 보는 것만 같은 리얼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 사진:MBC
예능 프로그램 트렌드가 급변하고 있다. 한때 지상파에서 케이블과 종편으로 옮겨가던 트렌드의 중심은 이제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웹 예능,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예능으로 바뀌었다. 예능업계 전반에 변화가 생겼다. 과연 이 흐름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최근 몇 년간 지상파 예능에서 주목할 만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구시대(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쇼 시대)의 유산이 지금껏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살짝 버전을 바꿔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MBC [놀면 뭐하니>가 잠시 ‘부캐 콘셉트’를 가져와 새로움을 만들었지만, 김태호 PD가 MBC를 퇴사하면서 프로그램은 유재석과 하하, 정준하가 캐릭터쇼를 하던 [무한도전] 시절로 회귀했다. 최근 정준하와 신봉선이 빠지고 PD까지 교체해 새롭게 [놀면 뭐하니]를 세웠지만, 아직 이렇다 할 의미있는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KBS [1박2일]은 2007년부터 무려 시즌4가 이어졌고 PD만 9명이 세워졌다. 이 장수 프로그램은 지금도 8% 정도의 시청률이 나오지만, 트렌드에서 비켜난 지 오래다. SBS라고 다를 바 없다. [런닝맨]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방영 중이고, [미운우리새끼] 역시 2016년부터 방영되며 장수하는 중이다. 물론 이들 지상파 3사에서도 새로 론칭해 시선을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들이 없던 건 아니다. 예를 들어 2013년부터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팬덤을 갖고 트렌드에 맞춰 변화를 거듭해온 MBC [나 혼자 산다]가 그렇고, 최근 여성 스포츠 소재의 붐을 만든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 예능 프로그램의 파급력이 과거의 메가 히트 프로그램들인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트렌드에 민감한 예능 PD들 뉴미디어로 대이동


▎MBC [놀면 뭐하니?]가 잠시 ‘부캐 콘셉트’를 가져와 새로움을 만들었지만, 김태호 PD가 MBC를 퇴사하면서 프로그램은 캐릭터쇼를 하던 [무한도전] 시절로 회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MBC
이렇게 된 건 2013년 즈음 tvN과 JTBC가 각각 케이블과 종편을 대표하는 채널로서 공격적인 제작을 하면서, 지상파의 인력들이 대거 이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력 이동을 상징하는 인물은 나영석 PD다. 그는 2013년 CJ로 옮겨와 tvN에서 [꽃보다 할배]부터 [삼시세끼], [윤식당] 등등 메가 히트작들을 연거푸 제작하며 채널의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또 JTBC도 여운혁, 임정아, 성치경, 조승욱, 이동희, 윤현준 같은 PD를 대거 끌어들였다. 당시만 해도 예능의 중심이 지상파에서 tvN과 JTBC로 상당 부분 옮겨가는 추세였다. 무엇보다 이 채널의 예능들은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느낌이 강했다. 지금껏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어떨까? 당시를 상징하던 나영석 PD도 CJ를 나왔다. MBC를 지탱해왔던 김태호 PD 역시 MBC를 떠났다. 그때의 예능을 이끌었던 PD들은 대부분 회사를 나와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모두 향한 곳은 스튜디오다. 나영석 PD는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 그리고 이명한 PD도 합류한 ‘에그이즈커밍’으로 옮겼고, 김태호 PD는 ‘테오’라는 스튜디오를 차렸다. 여운혁 PD는 ‘미스틱스토리’로 옮겼고, 윤현준 PD는 스튜디오 ‘슬램’이라는 JTBC 스튜디오 산하 제작 레이블의 대표가 됐다. JTBC에서 [효리네 민박] 같은 히트 프로그램을 만든 정효민 PD는 tvN에서 [집밥 백선생] 시즌1을 연출했던 고민구 PD가 공동대표로 있는 스튜디오 ‘모닥’ 소속이 됐다. 방송사에서 스튜디오로 가는 것이 현재 예능 PD들의 주된 흐름이다.

이는 미디어 환경 변화 때문이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모바일과 웹을 기반으로 하는 콘텐트 소비가 일반화되면서 기존 지상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종편까지 모두 레거시 미디어화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무엇보다 트렌드에 민감한 예능 PD는 그래서 과거 레거시 미디어에서 해왔던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뉴미디어에 적응하는 콘텐트도 제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스튜디오로 옮겨와 레거시 미디어는 물론이고 뉴미디어 채널의 콘텐트까지 다양하게 제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스튜디오로 옮겨온 예능 PD의 방식은 그래서 과거 방송사 소속일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때는 자신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색깔이 방송사의 색깔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프로그램을 방영할 플랫폼에 따라 그 색깔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김태호 PD가 MBC를 나와 제작한 [지구마불 세계여행] 같은 프로그램은 ENA라는 신생 채널에 어울릴 법한 도전적인 선택이 담겼다. 부루마블 판에서 주사위를 던져 세계여행을 가는 콘셉트에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 같은 스타 여행 유튜버들이 출연자로 나섰다. 하지만 최근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댄스가수 유랑단]은 상당 부분 레거시 미디어적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이 콘셉트 자체가 MBC [놀면 뭐하니?]에서 파생돼 나온 것이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여러 플랫폼에 맞는 콘텐트를 전방위적으로 제작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피식대학]이 예능작품상을 받았다. 웹 예능이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이는 웹 예능이 그만큼 대중적 저변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플랫폼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흐름은 나영석 PD에게 더 극명하게 보인다. 최근 제작한 [서진이네] 같은 프로그램은 tvN표 여행 예능의 성격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OTT를 염두에 둔 글로벌을 더해 넣었다. 방탄소년단 뷔와 마블의 부름을 받았던 박서준, 그리고 [기생충]의 최우식을 출연진으로 꾸린 점만 봐도 글로벌 시장에 대한 야망이 느껴진다. [뿅뿅지구오락실]도 tvN표 게임 예능을 가져왔지만, 여기에도 인플루언서인 이은지, 영지, 미미, 안유진으로 출연진을 꾸림으로써 최근 유튜브 예능의 성격들이 더해졌다. 심지어 나영석 PD는 최근 유튜브에 [나영석의 나불나불]이라는 채널을 열고 라이브 방송까지 시도하고 있다. 말 그대로 여러 플랫폼에 맞는 콘텐트를 전방위적으로 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마디로 이제는 하나의 색깔을 가진 프로그램만을 고집하던 시대가 아니라 다양한 색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로 들어왔고, 거기에 맞는 플랫폼과의 매칭이 중요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OTT는 예능 PD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 떠올랐다.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둘 수 있는 데다, 그간 레거시 미디어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소재나 수위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넷플릭스는 가장 뜨거운 채널이 됐다. [범인은 바로 너] 같은 게임 예능에서부터 시작해, [솔로지옥] 같은 연애 리얼리티가 글로벌 성공을 거뒀고, 최근에는 [피지컬:100] 같은 예능도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얻고 있다. 티빙 역시 [환승연애]가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웨이브도 연애 리얼리티의 바람을 타고 그간 레거시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못했던 성소수자들의 연애 리얼리티까지 선보였다. 물론 아직 신드롬급 글로벌 K예능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OTT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러한 격변기에 레거시 미디어는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을까?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보면 그 변화에 대한 몸부림이 느껴진다. 애초 지상파와는 결이 다른 색깔로, 때로는 논란마저 불러일으켰던 기안84가 중심에 선 이 ‘극사실주의 여행 예능’은 최근 스타 유튜버들의 ‘찐 여행’을 지상파 버전으로 담아냈다. [나 혼자 산다] 같은 연예인 리얼리티의 형식이지만, 마치 유튜브 여행 콘텐트를 보는 것만 같은 리얼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시즌2에서는 인도를 여행지로 선택하고 덱스와 빠니보틀이 함께함으로써 이런 색깔들은 더 진해졌다. 물론 시청률은 평균 5%대에 머물러 있지만, 지상파와 웹 예능의 균형 잡힌 콜라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가 레거시 미디어의 도전적인 선택이라면, 최근 tvN에서 계속되는 연예인 해외여행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다소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 시절에 제작돼 대박은 아니어도 적당히 괜찮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불러일으켰던 [바퀴달린 집]부터 [텐트 밖은 유럽]에 이어 최근 시작한 [형따라 마야로] 같은 해외여행 예능들이 그것이다. 이런 흐름은 최근 미국 엔터테인먼트 전문 매체인 버라이어티지에서 ‘리얼리티 TV 임팩트 리포트’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남승용 CJ ENM 예능교양사업 본부장이 이끌었다. SBS 예능 본부장으로 있다 2019년에 CJ ENM으로 온 남승용 본부장은 가성비 좋은 tvN 예능 콘텐트를 계속 내놓으며 확고한 입지를 마련했다. 현재 같은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서는 한때 예능 혁신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던 tvN도 다소 보수적이며 고정적인 시청층을 겨냥하는 안정적인 프로그램들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건 실제로 현재 같은 격변기에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저마다 원하는 걸 챙겨보는 취향 예능으로 변화


▎tvN [뿅뿅 지구오락실]은 22년 차 PD 나영석이 2030 출연자들의 당당함에 쩔쩔매는 모습으로 화제가 됐다. / 사진:tvN
김태호 PD는 “이제 국민 예능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모두가 챙겨 보는 콘텐트가 아닌, 취향대로 보는 콘텐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예능작품상을 [피식대학]이, 또 남자예능상을 [짐종국]으로 주목받은 김종국이 받은 건 이제 웹 예능이 그만큼 대중적 저변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또한 김태호 PD가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보는 국민 예능이 아니라, 저마다 원하는 걸 챙겨보는 취향 예능이 트렌드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예능 콘텐트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과거처럼 시청률이나 화제성 잣대만으로는 할 수 없게 됐다. 또 얼마나 혁신적인가가 지표로 내세워지기도 어렵게 됐다. 혁신적이거나 보수적인 다양한 플랫폼들이 있고 그런 플랫폼들을 취향대로 선택해 소비하는 게 현재의 콘텐트 소비방식이다. 그러니 이제 평가는 그 플랫폼의 성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 성격에 맞게 얼마나 효과적인 선택을 했는가가 달라진 시대에 맞는 예능의 평가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MBC 시청자 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백상 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SBS [열린TV 시청자 세상],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 등이 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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