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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전문기자 박정호가 만난 세상] ‘한국문화의 원형’ 한옥 사진 30년 이동춘 작가 

“한옥은 우리 시대의 손편지, 그 얼마나 그윽한가?” 

박정호 월간중앙 기획위원
[한옥·보다·읽다] 영문판, 사진집 [덤벙주초 위에 세운 집] 등 3종 동시 펴내
“자연을 빼닮은 고택에 어린 옛사람들의 숨결, 그 멋과 정신을 남기고 싶었다”


▎한옥 사진작가 이동춘 씨가 창덕궁 낙선재를 찾았다. 낙선재는 궁궐 안에 세운 왕가의 살림집이다. 한옥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장맛비가 잠시 멈춘 날, 서울 창덕궁으로 나들이를 갔다. 이동춘(63) 사진작가와 함께다. 창덕궁 정전 인정전(仁政殿)을 지나쳐 동남쪽 낙선재(樂善齋)를 찾았다. 평일 오전이라 경내는 여유로웠다.

반면 이 작가의 눈은 쉴 틈이 없었다. 그간 수없이 드나든 곳이지만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는지,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태세였다. 낙선재 정문 장락문(長樂門)을 지나니 바로 누마루가 보인다. 누마루 밑 벽에는 얼음 조각이 깨진 것 같은 빙렬문(氷裂紋)이 새겨져 있다.

이 작가의 설명이다. “벽 안쪽에 있는 아궁이에서 불똥이 튀어서 누마루에 화마가 덮치지 않도록 하는, 즉 화재로부터 집을 보호하려는 상징적 문양입니다.” 건물 난간, 창호 하나하나에도 구름·박쥐·포도·매화 등 장수와 다산을 소망하는 다양한 무늬가 조각돼 있다.

“궁궐 사진 촬영은 제한이 많아요. 보통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정도 허용됩니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빛의 대비가 강해 사진 찍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붕도 바닥도 형태가 날아가기 일쑤죠. 난간이나 창호에 있는 장식을 찍으려면 빛이 사선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라야 디테일이 살아나거든요. 그냥 찍으면 뭉개지고 맙니다.”

한옥에 관한 모든 것 망라


낙선재는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의 서재 겸 침전(寢殿)이었다. 바로 옆에는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와 할머니 순원왕후를 위해 각각 세운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가 있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演慶堂)과 함께 궁궐 안에 있는 대표적인 사대부 집으로 꼽힌다. 왕족들의 살림집으로, 조선 후기 농익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동춘은 지난 30여 년 한옥을 찍느라 전국을 누볐다. 그가 그간의 작업을 정리한 세 권의 책을 동시에 냈다. 3년 전 한옥연구가 홍형옥 교수와 함께 낸 [한옥·보다·읽다]의 영문판과 사진집 [덤벙주초 위에 세운 집, 한옥]과 [궁궐 속의 한옥, 연경당과 낙선재]다. 출판시장이 쪼그라든 요즘, 한옥을 주제로 한 듬직한 책 3권을 낸 용기가 대담하다. 일부 크라우드 펀딩을 포함해 있는 돈 없는 돈 그러모아 제작비를 충당한 기개가 놀랍다. 돈키호테의 돌진마저 떠오른다.

사진집은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한옥 사진작가로서 그간 쌓인 한을 풀었다. 책을 안 읽는 시대에 왜 번역료까지 부담하며 종이책을 내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럴 때 이렇게 답한다. ‘오늘 아침 먹었다고 내일 아침 안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옥은 내게 매일 먹는 쌀이자 밥이다. 이제 정성 가득한 밥상을, 격식 갖춘 정찬을 차린 것 같다.”

음식으로 치면 한정식인가?

“한옥을 총망라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글과 사진이 함께한 한옥 안내서, 양반집 한옥과 궁궐 한옥을 각각 다룬 사진집이 한 세트처럼 어울린다. 한옥 사진의 일단락을 지은 셈이다. 그간 누적된 아쉬움을 털어냈다.”

무슨 아쉬움을 말하나?

“1987년 [월간 행복이가득한집] 사진부 창간 멤버로 들어와 종종 한옥 사진을 찍었는데, 당시 사장님으로부터 자주 혼났다. 대체 한옥 사진 같지 않다는 거였다. 패션·요리·인테리어 등등 뭐든 정신없이 찍을 때였다. 항상 시간이 빠듯했다. 이제는 다르다. 한옥은 누구보다 잘 찍을 수 있다. 잡지사 사장님에게도 ‘저 이만큼 컸다’며 자랑할 수 있다(웃음).”

영문판 입문서가 눈에 띈다.

“10여 차례 해외 전시도 열었는데, 한옥을 소개할 마땅한 책자가 없었다. 전시 팸플릿으론 외국 관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었다. 번역자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번역을 세 번이나 해야 했다. 요즘 K-팝이니 K-컬처니 요란하지만 정작 한국 전통문화의 원형을 보여주려는 노력은 미진하다. 한옥의 구조와 특성, 그곳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숨결을 담은 한옥 교과서 같은 책이다.”

‘덤벙주초’와 ‘그랭이질’의 미학


▎경북 안동의 만휴정. 조선 전기의 문신 김계행이 1501년에 지었다. 현판에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라 적혀 있다. 우리 집에 보물은 없으나,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이라는 뜻이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사진집 제목의 ‘덤벙주초’가 낯설다.

“한옥은 자연을 닮았다. 건물 기초인 주초석(모퉁이 돌)도 집 주변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을 구해다가 썼다. 돌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써서 ‘덤벙주초’라고 부른다. 이 돌 모양에 맞춰 나무를 깎아 세웠다.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돌과 나무가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맞물리는 것이 한옥의 특성이다.”

창덕궁 속의 한옥과 다르지 않나?

“별도의 사진집으로 묶은 이유이기도 하다. 궁궐 한옥은 정교하게 다듬은 숙석(熟石)을 주춧돌로 썼다. 왕가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연미가 덜한 반면 완성도는 높다. 일반 한옥과 궁궐 한옥을 비교하고 싶었다. 궁궐 한옥은 가장 화려한 한옥이다. 낙선재 권역은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이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이동춘 작가는 장돌뱅이를 자처한다. 소위 한옥 찾아 삼만리,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경주·포항·문경·상주·예천·강릉·해남·강진 등 전국을 쫓아다녔다.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기록·전수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컸다. 특히 2005년부터 안동 일대 사대부 문화를 집중적으로 낚아챘다. 2018년에는 아예 안동에 작은 아파트를 월세로 얻었다. 가족과 떨어져 생활 터전을 안동으로 옮긴 것이다.

전통은 대부분 낡은 것으로 여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고(故) 이어령 선생님과 함께 [한국인의 손, 한국인의 마음]이란 화보집을 냈다. 기역 가위와 갓, 니은 낫과 논, 디귿 됫박과 다듬잇돌 등 한국 문화의 숨결을 담은 책이었다. 우리 민속문화재에 녹아 있는 장인의 마음에 흠뻑 빠졌다. 이후 전통의 멋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한옥에 전념하게 된 계기라면?

“2005년 안동의 종가문화에 매료됐다. 군자마을이라 불리는 안동 군자리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의 별채인 후조당(後彫堂)에 반했다. 그전에도 한옥을 찍었지만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40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디 한 군데 기울어짐 없이 당당한 자태였다. 자연스럽게 늘어진 대들보, 대청마루의 반질반질한 손때 등등, 퓨전 한옥과는 완전히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바로 이거다, 눈이 번쩍 뜨였다. 사실 그전만 해도 안동을 싫어했다.”

뜻밖이다. 왜 싫어했나?

“잡지기자 시절 안동에 내려가면 일단 어르신들의 사투리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심심하면 족보를 따지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부모님 모두 북한에서 월남하셨고, 저도 서울 태생이라 족보는 딴 세상 같았다. 그러다 후조당과 마주쳤다. 1974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 위기에 있던 건물을 옮겨온 것이었는데, 어떤 영화 세트장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묻어나왔다. ‘오래 묵은 오늘’이란 단어를 실감했다.”

남자처럼 행세하며 안동 종가 취재


▎경북 안동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인 후조당. 건물 너머 자연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인생의 전환점쯤 되겠다.

“그렇다. 후조당 어르신께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승낙은 받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에 찍으려면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함께 생활해야 했다. 마치 가족처럼 지내야 했다. 3년쯤 지나니 동네 사람들도 거의 다 알게 됐다.”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빗자루, 쓰레받기 등 청소도구를 챙겨서 종가(宗家)의 문을 두드렸다. 마을에서 식당이 멀어 직접 밥솥을 들고 다니며 끼니를 해결했다. 시시때때로 떡도 해서 돌렸다. 그간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며 거리를 좁혀갔다. 툇마루, 대청, 처마, 지붕, 부엌, 사랑방, 안방 등등 안동의 속살, 안동의 사계를 담다 보니 20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 집 족보는 몰라도 안동 종가의 족보는 어느 정도 꿰게 됐다.”

여자라서 더 힘들었겠다.

“다른 건 다 돼도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제삿날 출입이 봉쇄됐다. 조선이 사라진 지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이게 무슨 초현실적인 풍경인가 싶었다. 달나라에 가는 시대 맞나, 믿기지 않았다. 3년쯤 지나서야 겨우 허락을 받았다. 머리를 짧게 하고 남장 차림도 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종가 행사가 열리면 먼저 연락이 온다.”

여장부급이다. 불편하진 않았나?

“늘 사진과 함께하다 보니 짧은 머리, 간단한 복장이 편했다. 딸이 둘 있는데 애들이 어릴 적에 출장에서 돌아오면 ‘아부지 잘 다녀오셨어요’라며 맞이하곤 했다. ‘우리 집엔 엄마는 없고 아빠만 둘이다’라고 했다.”

남편의 불만이 컸을 것 같다.

“결혼 당시 ‘내 일을 가로막지 말라. 와이셔츠 다리고 밥해줄 자신 없다. 각자 벌어서 각자 쓰자’고 선언했다. 그때 약속을 지금껏 지켜준 남편이 고맙다. 실제론 남편을 등쳐먹은 꼴이 됐다. 사진 작업한다며 남편 퇴직금마저 당겨 썼다. 미안할 뿐이다.”

이동춘의 사진은 편안하다. 모난 곳이 없다. 안이든, 밖이든 한옥의 고즈넉한 정경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바람에 사각대는 댓잎 소리가 들릴 듯하고, 안방에서 단장하는 여인네, 사랑방에서 책 읽는 선비가 떠오르기도 한다. 도시의 찌든 먼지를 걸러내는 공기정화기라고나 할까. “조선의 정신을 좇아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다. 수선스럽지 않다”(정재숙 전 문화재청장),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지 않으려는 옛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의 흔적을 찾아냈다”(엄광현 문화평론가)는 평가다. 한옥의 재발견이 문화계 주요 트렌드로 떠오른 요즘이지만 시대의 유행을 뛰어넘는 한국 문화의 웅숭깊은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전남 보성 강골마을의 열화정. 다듬지 않은 돌을 주춧돌로 쓴 덤벙주초가 눈에 띈다.
한옥의 백미를 차경(借景)에서 찾았다.

“차경은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마치 액자처럼 집 밖의 경치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시시각각 사계절 변하는 자연의 경치를 소유하지 않고 즐긴다는 의미다. 자동차, 경운기, 컨테이너 등 집 바깥에 경관을 방해하는 물건도 많기에 한동안은 안개 낀 날에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한옥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손글씨다. 자로 잰듯한 글씨가 아닌,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글씨다. 구부러진 나무를 닮은 글씨다. 컴퓨터로 만든 폰트와 정감이 천양지차다. 손편지와 이메일이 같을 수 있겠나. 한옥은 닮은 건 있어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처마 밑에 숨은 한옥의 비밀


▎안동 오미마을 학암 고택. 시렁에 놓인 밥상이 정겹다. 독립운동가 김재봉 선생의 집이다.
한옥 촬영만의 어려움이 있을까?

“건축가가 지은 집은 조명이 훌륭하기에 언제 찍어도 잘 나온다. 반면 한옥은 자연광에서 찍어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원하는 빛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일례로 현판·서까래 등 한옥의 비밀은 처마 밑 그늘에 숨어 있다. 인공조명을 터뜨리면 맛을 살릴 수 없다. 실내와 실외의 노출이 같아지는 순간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매일 다르다. 시쳇말로 죽 때려야 한다.”

촬영 장비도 만만치 않겠다.

“대문 밖에서 집안을 찍으려면 놓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 높이 5m가량의 사다리가 필요하다. 삼각대도 그만큼 받쳐줘야 한다. 크기·용도가 각기 다른 카메라와 사다리, 삼각대 등 장비가 많다. 요즘은 드론도 많이 쓴다. 이래저래 수십㎏이 나갈 것이다. 내 이름이 동춘, 추억의 동춘서커스단에 빗대 ‘동춘서커스단 출동’이라고 한다. SUV로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도 잦아 보험사 블랙리스트에 올랐다(웃음).”

한옥 정신을 나눔과 베풂으로 요약했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고 했다. 조상을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 300년 동안 나누는 삶을 실천한 경주 최부자댁을 보라. 안동 임청각의 항일투쟁도 유명하다. 꼿꼿한 선비정신이 요즘 많이 퇴락하긴 했지만 선인들의 기품과 자존심은 우리가 지켜야 할 유산임이 분명하다.”

기억에 남는 문구를 꼽는다면?


▎낙선재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창호. ‘만(卍)자살’ 문양이 유려하다. 궁궐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군자마을 후조당의 후조(後彫)다.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서 따왔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뜻으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지조를 가리킨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도 등장하는데, 후조당의 후조가 시기가 훨씬 앞선다. 부박한 이 시대를 꾸짖는 죽비다.”

그렇다면 잊지 못할 어르신은?

“2009년 12월 퇴계 선생의 15대 종손이 만 100세로 돌아가셨다. 관례를 따르면 3년상을 해야 하는데 16대 종손이 ‘형식에 얽매이지 말자. 현실에 맞게 살자, 그게 바로 퇴계 정신’이라며 1년상으로 치렀다. 그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16대 종손도 올 3월에 93세 나이로 별세했다. 그분의 좋은 말을 더는 들을 수 없어 아쉽다.”

오늘도 출동하는 ‘동춘서커스단’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 안채. 사대부가 99칸집 구성을 표현했다.
남녀 공간이 분리된 한옥은 가부장문화의 상징이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나?

“21세기의 가치관으로 옛 건축을 재단하면 곤란하다. 물론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양반이 아닌 몸종으로 태어났다고 상상해보라, 끔찍했을 것이다.”

아직도 못 찍은 사진이 있을까?

“지금껏 20만~30만 장을 찍은 것 같다. 한데 온종일 찍어도 A컷 한 장 건지지 못할 때도 잦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찍어야 할지를 이제 훤히 안다. 외경이든, 실내든 더 나은 앵글을 향한 ‘찰칵’ 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옥에서 살고 싶은 꿈은 없나?

“외갓집 한옥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껏 돈이 생기면 길거리에 기름값으로 뿌리고 다녔다. 큰딸 시집 보낼 때 해준 게 없어 제일 미안했다. 한옥 생활은 언감생심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책을 팔 시간이다. 30년을 바친 이 책들이 해외 공관이나 도서관 등에 나가 우리 문화를 더욱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창덕궁에서 나오는 길, 햇빛은 따갑고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그것 아세요, 한옥 앞마당엔 나무를 심지 않아요. 대신 뒷마당에 심죠. 대청 뒤쪽의 판장문(나무널로 짠 문)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마당의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 뒷마당 쪽으로 흘러갑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대청마루에 5분 정도 앉아 있으면 땀이 다 날아갑니다. 에어컨이 따로 없죠. 또 추녀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어떤가요. 한옥이 선물하는 최고의 여름철 낭만이 아닐까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한옥사진가 이동춘, 한옥에 미칠 만큼 미친 게 확실하다.

[박스기사] '한옥' 영문판 번역자 트와이닝 린지의 한국 사랑


한옥은 형태가 다양하다. ‘ㄱ자집’ ‘ㄷ자집’ ‘ㅁ자집’ 등 필요에 따라 칸을 눌려갈 수 있다. 이를 영어로 어떻게 옮길까. 기존에는 ‘ㄱ-shaped house’ ‘ㄷ-shaped house’ ‘ㅁ-shaped house’ 등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에겐 상형문자 같았다.

[한옥·보다·읽다] 영문판을 책임진 트와이닝 린지(사진)는 이런 표현은 외국인에겐 매우 불친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또 여기서 ‘집’은 가옥 전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한 채의 구조를 의미하기에 ‘house’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의 선택은 이랬다. ‘one-wing layout (building)’ ‘two-wing layout (building)’ ‘square layout (building)’ 등으로 표현했다. 그런데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의 관점에선 한글을 이용해 건축물의 구조를 설명하는 게 더욱 흥미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역 용어를 따로 모아 ‘더 배우기’ 섹션에 추가했다.

린지는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정보학과에서 박사 논문이 통과된 한국문화 전문가다. 지난 8년간 전국에 산재한 문화유산 5300여 건의 영문 해설판 작업에 참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등 여러 기관과도 협업해 왔다.

그가 한국문화를 처음 접한 건 미국 중학교에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면서부터다. K-드라마·영화에서 시작해 한국 전통문화로 관심을 넓혀 왔다. 한국에서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언어·문화 장벽 등 외국인이 한국문화에 접근하는 게 아직도 쉽지 않아요. 종합적·장기적 전략이 필요합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한국 문화유산 소개 및 해설입니다. 외국인이 한국문화로 건너오는 다리를 설계·구축한 셈이죠. 서버 운영, 데이터 관리 인력 등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 글 박정호 월간중앙 기획위원 park.jungho@joong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실장 park.jongkeun@joongang.co.kr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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