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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사람] 권영걸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의 ‘공원 국가 한국’ 그랜드 비전 

“용산공원은 ‘녹지 민주주의’ 진원지,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 삼아야”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용산공원을 중심으로 한강이 관문 되는 수변도시 바람직”
“지방 살릴 최고 수단은 대학, 서울 대형 대학들 지방 이전 고려해야”


▎권영걸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은 국내에서 공공디자인의 최고 권위자다. 서울의 도시 건축을 180도 바꾼 ‘디자인 서울’ 정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용산공원과 국가상징공간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선진국에는 저마다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국가상징공간이 있다. 국가상징공간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저력이 응축돼 있다. 미국의 내셔널 몰,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 독일의 포츠담 광장 일대 등이 그 예다. 아쉽게도 우리는 이에 견줄 만한 국가상징공간을 갖추지 못했다.

다행히 용산의 주한미군 기지 반환과 대통령실 이전을 계기로 용산공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상징공간 조성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에 그동안 말을 아껴오던 권영걸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 말문을 열었다. 공공디자인의 권위자인 권 위원장은 서울시에서 부시장급인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과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을 맡으며 서울시 도시계획·건축에 디자인을 입혔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고척스카이돔 등의 건립을 이끌었다.

8월 14일 권영걸 위원장을 만나 용산 구상과 함께 도시경쟁력에 관한 철학을 물었다. 인터뷰를 진행한 회의실 벽에는 ‘공원 같은 나라, 정원 같은 도시’라는 위원회 슬로건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심각한 녹지 불평등, ‘거리 그린벨트’ 가 대안

건축정책 슬로건으로는 신선하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합니다.

“건축 환경은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의 근원이면서 그 문제의 해결 수단이기도 합니다. 신문명 시대 행복한 삶의 조건은 정주 공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은 기후위기가 당면한 현실이 되면서, 건축 분야에서도 생태성을 담보하는 녹지율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과밀화된 도시에서는 경제력에 따라 녹화 수준이 차이 나는, ‘녹지 불평등’(green inequality)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의 ‘녹지 향유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저희 국건위가 지향하는 정책 방향이 이 슬로건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죠.”

‘숲세권’이란 말 들어보셨는지요. 도시 녹지의 접근성이 부동산 가치의 척도가 되는 시대입니다.

“숲세권이라는 말에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관계성이 암시돼 있습니다. 녹지와 인접한 주거지에 대한 선호를 넘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시와 건축 환경의 새로운 지향점이 숨어 있죠. 역세권이 접근 편의성에 의한 부동산 가치 추구라면, 숲세권은 도시건축 환경에 생태적 관점을 반영해 지속가능한 도시로 나아가겠다는 가치 전환의 표명입니다.”

서울에는 숲세권을 형성할 수 있는 지대가 그리 많지 않은게 현실이죠.

“그래서 도시공원을 잘 가꿔 나가는 일이 매우 중요해요. 국건위는 보행 생활권 안에 있는 유휴공간의 녹화 비율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속적인 띠 녹지인 ‘거리 그린벨트’라는 정책과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구로구에 있는 거리공원은 시민과 공공이 합작해 20년 넘도록 녹지를 가꿔온 사례입니다. 생활권 주변의 공간을 그린벨트에 준하는 ‘녹색 인프라’로 조성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이 절실합니다.”

도심 녹지의 성공사례로 꼽으신 구로 거리공원이 요즘 시끄럽더군요.

“거리공원 지하에 공영주차장을 만들겠다는 구청 계획에 주민 반대가 상당합니다.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면 지력이 약해져 수목이 자랄 수 없습니다. 생태 환경이 무너지는 거죠. 20년 넘게 근사하게 키운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나갈 수밖에 없어요. 녹지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도시 녹지를 늘리는 추세에도 역행하는 겁니다.”

도시건축을 문화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아직 부족한 걸까요?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 중심으로 판단되어 왔고, 건축도 대개 부동산 가치로만 평가됐습니다. 건축이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을 잘 담아내는 것이 건축적 가치일 텐데, 우리는 오랫동안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상품건축에만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소프트 자본주의(Soft Capitalism) 시대입니다. 산업화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던 도시건축이 이제 하나의 사이클을 마감하고 인구감소 지방소멸이라는 다음 사이클로 넘어가고 있는 만큼, 건축에도 지속 가능한 ‘시민문화’로 자리 잡기 위한 능동적 고민이 중요해졌습니다. 도시 재정비 과정에서도 건축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기능을 고려한 ‘가이드라인’이 절실합니다.”

‘서울시 디자인 가이드라인’ 제정한 일 가장 보람


▎서울 구로구의 랜드마크인 거리공원 풍경. 구로구가 지하 공영주차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 사진:구로구
서울시에서 공공디자인을 총괄하실 때 탄생한 서울의 명물이 많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진입한 당시 서울의 모습은 무질서와 부조화의 극치였습니다. 제가 도시디자인 방법론을 적용해 서울을 바꾸려는 노력을 시작할 때 ‘삽질행정’, ‘전시행정’이라는 온갖 비난이 있었습니다. 퇴임 후 세어 봤더니 대략 200가지 프로젝트를 주도했더군요. 한강르네상스, 남산르네상스, 거리르네상스 등이 그중 큰 프로젝트였지만,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디자인 가이드라인 제정입니다. 공공 공간, 공공 건축물, 공공 시설물, 공공 시각매체, 옥외 광고물 등 5대 부문에서 법전을 쓰듯이 디자인 펀더멘털을 정립했습니다. 원칙과 표준이 있는 도시로 가는 기초를 닦은 것이지요.”

최근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 설치 구상이 논란이 됐습니다.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국가상징공간 조성,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급자인 관료, 설계자인 전문가, 향유자인 시민을 포함하는 깊은 공론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령 가까운 미래에 광화문광장에 대한민국 정체성을 기념할 만한 공간을 설치한다면, 그다음 상징물이 어디에 어떻게 설치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전문적·기술적 검토가 건설 전에 이뤄져야 합니다. 한번 조성된 상징물과 상징공간은 변경도, 이전도, 폐기도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국가상징공간을 구현하는 방식이 과감할 수는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정신과 가치의 변화까지 고려하는 원시안(遠視眼)으로 기획하고 추진되어야 합니다.”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용산공원에 대한 위원장님의 관심과 열정도 익히 알려져 있죠.

“용산국가공원 조성은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겁니다. 용산공원 부지는 ‘금단의 영역’처럼 격리 보존되어 온 곳입니다. 그 덕에 우리는 역사상 가져보지 못했던 100만 평 규모의 자연생태공원을 통해 녹색도시 서울과 기후환경 선도국을 꿈꿀 수 있게 됐습니다. 따라서 이 공간을 단순한 공원으로 볼 게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도시 비전을 보여주는 ‘그린 플랫폼’으로서, 녹지 향유가 국민의 보편적 권리가 되는 ‘녹지 민주주의(Green Democracy) 한국’으로 나아가는 진원지로 삼아야 할 겁니다.”

외국 군대 주둔지라는 아픈 역사가 오히려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데 공헌한 역설의 공간이 바로 용산이죠. 이런 인문·환경적 특징이 공원 개발 콘셉트에 반영되나요?

“용산공원은 군 기지로서의 독특한 풍광과 함께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세계사의 변화가 응축된 곳이라는 특수한 장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시작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리고 한국전쟁과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한 세계사의 흐름은 용산기지가 가진 유일하고도 독특한 콘텐트입니다. DMZ와 함께 역사의 아픔이 우리에게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특유의 장소성을 용산공원에 충분히 담아내야 합니다. 미군뿐만 아니라 유엔군 사령부가 자리했던 곳으로, 전 세계에서 파견되어온 사람들의 삶과 전우애가 배어 있는 곳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세계인에게도 공명이 있을 겁니다.”

“용산공원은 센트럴파크보다 내셔널 몰에 더 가까워”


▎과거 외국군의 주둔지에서 시민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용산공원 전경. 공원 뒤로 대통령 집무실이 보인다. / 사진:연합뉴스
용산공원과 한강은 또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변화할지 궁금합니다.

“용산은 둔지산(屯地山)을 중심으로 다양한 구릉이 한강을 향해 펼쳐지는 전형적인 한국적 지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용산의 원(原) 지형과 기존 상태를 살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잘 조화시키면 훌륭한 공원이 될 겁니다. 기후변화와 스마트도시로의 변화에 대한 대응, 보행자 중심의 도시전략 등 다양한 요구조건들에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강과의 관계성 설정이 특히 중요합니다. 용산공원 조성으로 서울은 내륙 도시에서 한강 중심 수변도시로 변화할 명분과 비전을 갖게 될 거예요. 도시의 중심기능이 수변에 집중돼 수변이 도시의 얼굴이고, 관문이며, 중심인 도시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용산의 수변 변화가 강동에서 강서에 이르는 미래 서울의 새로운 구조적 변화를 이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공원의 대명사라면 뉴욕 센트럴파크를 꼽을 수 있죠. 국가상징공간으로서 용산공원이 센트럴파크와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일까요?

“뉴욕 센트럴파크는 도시의 고속성장으로 피폐해진 공간과 도시민의 심성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낸 철저한 ‘계획 공원’입니다. 군부대의 이적지에 자연생태공원과 역사문화공원의 개념을 결합해 조성하는 용산공원은 개발 배경이 전혀 다릅니다. 설계의 지향점 측면에서 용산공원은 센트럴파크보다 워싱턴 DC의 국민 영웅 기념공원인 ‘내셔널 몰’이 좀 더 중요한 참조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인접한 공원 부지를 ‘프레지덴셜 에어리어(presidential area)’로 삼겠다고 했으니 용산공원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문화에 어떻게 기여할지 고려하면서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인구 감소, 지방 소멸, 초고령사회 등 우리 사회가 처한 여러 어려움의 해법을 공간에서 찾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결국 ‘청년’ 문제로 귀결됩니다. 교육과 일자리 때문에 청년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현상이 가속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높은 집값 부담으로 청년층이 경기도로 빠져나가고, 서울시민의 평균연령은 높아졌습니다. 이제 젊은 세대가 합리적인 주거비용을 지불하고 서울로 유턴하거나 근교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돕고, 은퇴하기 시작한 1·2차 베이비붐세대는 지방으로 내려가 안착하도록 하는 주거공간 정책이 절실합니다. 그것은 젊은 세대가 주거비용을 치르는 과정에서 겪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을 완화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방안이 될 것입니다.”

“대학은 지방 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권영걸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 서울시에서 디자인정책을 총괄할 때 추진한 결실 중 하나다. 빛 축제가 열리는 DDP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수도권과 달리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의 도시경쟁력을 끌어올릴 공간적 대안도 궁금합니다.

“모든 지방도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축소도시’(compact city)와 ‘거점도시’를 지향해야 합니다. 전략적으로 비우는 공간과 채우는 공간을 잘 설정해야 하고, 도시의 매력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국가적 투자와 행·재정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서울은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 중심의 뉴욕, 정치 중심의 워싱턴, 교육 중심의 보스톤의 기능을 모두 갖기 위해 확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공공기관 이전뿐만 아니라, 서울·경기권에 있는 대학과 문화시설이 지방으로 갔을 때 어떤 극적인 효과가 나는지까지 고려하면 투자 의욕이 높아질 겁니다. ”

대학이 지방으로 내려가려 할까요?

“대학은 지방 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입니다. 수도권의 국립대가 통째로 지방이전을 한다면, 사립대학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와 문화·경제 여건이 비슷한 일본의 경우 도쿄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치오지(八王子), 쓰쿠바(筑波), 교토(京都), 벳푸(別府) 같은 ‘대학 도시’ 사례가 일차적인 참조원이 될 수 있겠죠. 대학에는 시민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구가 많기 때문이죠. 대학이 지역사회와 협력해 혁신적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지역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면, 지방의 도시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녹지로 도시 경쟁력을 높인 사례로 순천만국가정원이 대표적이죠. 순천의 성공을 보고 국가정원 지정에 사활을 걸고 있는 지자체들에 조언을 주신다면?

“순천만국가정원은 세계적인 생태자원과 우수한 관광자원, 시장의 탁월한 리더십, 정부 차원의 지원, 적극적인 시민 참여 등이 결합해 이루어낸 쾌거입니다. 국가정원도 한번 조성하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고 꾸준한 관리와 축적이 필요합니다. 도시와 권역의 성장전략이 맞물린 ‘그린 인프라’ 작업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국가정원 프로젝트는 의욕만으로 추진되지 않고 효과적인 거버넌스와 다차원의 추진 동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다른 지자체들도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겁니다.”

※ 권영걸 -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 ㈔한국공공디자인학회장, 서울시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부시장), ㈜한샘 사장, 계원예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신문명디자인], [나의 국가디자인전략], [서울을 디자인한다], [공공디자인행정론], [공간디자인16강] 등 43권의 저서를 펴냈다. 국가로부터 황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고, 제9대 대한민국 디자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인류건축문명권 78개국 680여 도시를 현지 조사하였고,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 서울예고 교장, 동서대학교 석좌교수, ㈔문화창조연합 이사장이며, 현재 대통령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다.

- 글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choi.eunseok@joongang.co.kr /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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