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대학생, 그리고 더 깊은 밤엔 고시 수험생 경제 사령탑 맡아 혼신의 힘… 시대적 소명의식 절감하고 정치 입문
▎6월 27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용인 첨단 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 성공을 위한 제3차 범정부 추진지원단 회의 및 협약식’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경계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등 참석자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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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경기도지사에게 ‘반란’이란 그의 삶에서 언제나 돌파구가 돼준 한마디였다. 청년 시절 그에게 하루하루는 넘어서야 하는 벽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의 길에 올라 한층 성숙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게 반란은 유쾌한 것이 됐다. 그가 지휘하는 경기도정의 혁신 동력은 ‘유쾌한 반란’이다.김 지사는 1957년 충북 음성군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일찍이 부친의 타계로 11살 때부터 소년가장 노릇을 했다. 그의 소년기는 “세 끼를 온전히 챙겨먹기 어려웠던 시절, 끼니로 자주 먹던 수제비, 외상 달고 됫박으로 샀던 쌀, 몇 장씩 사다 쓰던 연탄”으로 묘사된다.가정형편상 원치 않은 상고에 진학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한국신탁은행(현 하나은행)에 입사했다. 하지만 고졸 출신에게 벽은 높았다. 야간대학에 진학했지만 높이는 여전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온통 명문대 출신, 경제적으로 별걱정이 없어 달리기 편한 ‘몸이 가벼운’ 사람들로 넘쳤다”고 서술한다.그러다 은행 독신자 합숙소에서 고시 수험생을 위한 잡지를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놨다. 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대학생 그리고 더 깊은 밤에는 고시 수험생이 되는 1인 3역 생활을 했다. 은행 생활 7년 8개월째인 25살, 1982년 6회 입법고시와 26회 행정고시에 동시 합격했다.1983년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경제기획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기획예산처, 기획재정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입법조사관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엘리트 관료 집단에서의 학벌주의는 상상 이상이었다. 명문대 학력을 갖지 않은 사람은 이너서클에 들 수 없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들어가 1986년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그럼에도 끝내 해소되지 않은 학벌 콤플렉스에 유학의 길을 결심했다. 낮에는 일하고 한편으로는 죽어라 영어공부를 했다. 잠꼬대도 영어로 했다. 그 결과 경제기획원 내 근무평점과 어학성적을 갖춰서 국비유학생으로 선발, 미국 미시간 앤아버에 위치한 미시간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93년, 3년 9개월이라는 ‘최단 기간’에 공공정책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해 미시간대 기록에 이름을 남겼다. 미국 정부에서 지급하는 풀브라이트 장학금도 받았다. 더 이상 성적과 학위에 연연하지 않게 됐다.귀국 후 2005년 기획예산처 전략기획관으로 공직에 복귀한 뒤, 기획예산처 산업재정기획단장과 재정정책기획관 등을 역임했다. 이때 참여정부에서 발표한 국정마스터플랜 ‘비전 2030’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비전 2030은 한국의 삶의 질 수준을 2030년까지 세계 10위로 올려놓는다는 구상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비전과 정책이라며 비판받았다. 그는“‘선 성장 후 복지’의 경제 패러다임을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으로 바꾸는 복지국가를 지향했다. 보고서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며 아쉬워했다.
선거 득표율보다 지지율 오른 유일한 광역단체장예산통으로서의 면모가 발휘된 시기는 이명박 정부 때다. 2010년 8월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에 임명된 그는 당시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을 줄이는 등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예산 정책기조 재점검을 주문하자 여름 휴가를 반납하고 예산안 검토에 집중한 일화는 유명하다. 2012년 1월 기획재정부 2차관에 오른 뒤에도 새벽 2~3시까지 일할 정도로 워커 홀릭이었다.2013년 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조정실장으로 임명됐으나, 같은 해 10월 큰아들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보를 접한다. 훗날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며 아픔을 토로했지만 당시에는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발인을 마친 당일 출근해 ‘원전비리 종합대책’을 직접 발표할 만큼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했다. 2014년 7월 청와대의 몇 차례 만류를 뿌리치고 ‘가족’과 ‘건강’ 등의 이유로 관료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퇴직 후 아주대학교 총장을 지낸 그는 2017년 6월 문재인 정부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경제 사령탑으로서 밤낮 없이 격무에 시달리는 등 공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문 정부 간판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을 놓고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2018년에는 장하성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과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같은 해 8월 고용과 분배지표가 거듭 악화하자 스스로 책임지고 사의를 표한다. 이후 사단법인을 운영하며 강연 활동에 매진하는 동안에도 주요 선거철마다 여야의 입당 제의가 쏟아졌다. 그는 “총선과 서울시장 출마 등의 권유가 있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정치는 시대적 소명의식, 책임감, 문제 해결 대안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돌이켰다.마침내 2021년 9월 고향 충북 음성군에서 ‘기득권공화국을 기회공화국으로 만들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2022년 3월에는 후보직을 사퇴,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후 2022년 6월 지방선거에서 0.15%p 차이로 김은혜 당시 국민의힘 후보를 누르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된다.취임한 지 1년째,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그는 광역단체장 평가에서 긍정평가 56.8%를 기록했다. 광역단체장 가운데 유일하게 지난 선거 득표율보다 지지율이 올랐다. 경기도정을 운영하는 철학은 “출발 선상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 청춘을 반란으로 보낸 그의 깨달음이 녹아 있다. 해외투자 유치, 청년 기회 확대를 목표로 한 미국·일본 출장에서 4조3000억원의 투자 유치를 성사시켰다. ‘수저 색깔이 미래를 결정하는 기득권 사회’를 바꾸기 위한 유쾌한 반란이 경기도에 일어나고 있다.-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