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위기 결정체 ‘소통’으로 정면돌파 

불황 탈출 비법은 소통경영 … 상하좌우 모든 벽 허물어야 효과적 소통 가능
장벽을 허물어라! - 벽 털어 성공한 6개 기업 

이윤찬·한정연·임성은 기자·chan4877@joongang.co.kr
글로벌 불황이다. 한국 경제는 유령 같은 안개의 숲 한가운데 있다.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어디가 비상구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지금이야말로 ‘소통’이 필요할 때다. 소통으로 위기를 빠르게 감지하고, 소통을 통해 불황 탈출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러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은 높고 종류도 많다. 벽은 어떻게 무너뜨려야 할까?

1. HP
빌 휼렛 & 데이브 패커드 ‘전설의 방’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위치한 HP 본사엔 창업주 빌 휼렛과 데이브 패커드가 1940년대 사용했던 ‘전설의 집무실’이 보존돼 있다. 170여 개국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기업 HP 창업주의 방은 어떤 모습일까? 흥미롭게도 이들은 방이 없었다. 직원들과 같은 공간을 사용했다.

창업주와 직원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은 낮은 칸막이가 전부다. 열린 공간, 이를테면 오픈 도어(Open door) 시스템이다. HP의 이념을 보면, 이들에게 왜 방이 없는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HP에 회사란 모든 직원의 목소리를 듣는 곳, 직원들의 말이 즉각 반영되고 해결되는 곳, 사내 소통이 직급·성별에 관계 없이 이뤄지는 곳이다.

휼렛과 패커드에게 꽉 막힌 사무실은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을지 모른다. 한국HP도 오픈 도어 정책을 이어받고 있다. 최준근 한국HP 사장은 CEO에 오른 지 14년이 흘렀지만 아직 개인 방이 없다. 책상에 걸쳐 있는 파티션이 사장과 직원을 나누는 유일한 벽이다. 이는 다른 기업 관계자를 종종 당황하게 한다.

창조경영아카데미 김영한 대표가 전하는 한국HP-컴팩코리아 M&A(2002년) 당시 비화다.“컴팩코리아 임원들이 M&A가 결정된 후 한국HP를 방문했다. 그런데 이들은 아연실색했다. 임원 방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 좀 마련해 달라고 떼를 썼지만 통할 리 만무했다. 오픈 도어에서 비롯되는 원활한 소통이 HP의 조직문화였기 때문이었다.”

2008년 매출 330억 달러로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컴퓨터·인터넷의 역사를 다시 만드는 회사…. 글로벌 반도체 기업 인텔을 잘 보여주는 수식어다. 전 세계 45개국에서 8만5000명이 근무하는 회사 인텔의 사장실은 어떨까? 어마어마한 규모를 한껏 뽐내진 않을까? 아니다. 인텔 본사엔 사장실이 따로 없다.

모든 직원에게 열려 있는 개인공간 ‘큐브’에서 일한다. 고든 무어 인텔 명예회장의 경영관은 ‘탁월한 인재가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이다. 인텔에 최적의 근무환경은 열린 사무실인 것이다. 세계적 불황기다. 숱한 변수가 넘쳐나고, 경제환경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모든 것이 불가측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눈을 가리고 트랙을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주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질주했다간 낭떠러지로 추락할 게 뻔하다. 사방에서 들리는 경고음을 귀담아들어야 할 때다. 세상과 소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소리다. 소통하기 위해선 벽을 깨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벽은 상징적이다. 유·무형의 벽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사장실·임원실을 없앤다고 소통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유형의 벽을 허무는 것보다 무형의 벽을 부수는 게 더욱 중요하다. 기껏 열린 공간을 만들어 놓고 마음의 벽을 허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는가? 다음은 유·무형의 벽을 모두 허물어뜨린 기업 사례다.

2. 인텔
큐브의 미학


오픈 도어 시스템의 효시 HP가 주는 교훈
회사란?
■ 상사와 직원 간의 솔직 담백한 열린 커뮤니케이션이 매일 이뤄지는 곳
■ 직원의 목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요구에 조언과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멘토링 문화가 존재하는 곳
■ 상사가 직원의 고충을 공유할 수 있는 상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책임을 다하는 곳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넷엡은 스토리지 전문업체다. 2008년 매출은 33억 달러.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지난해 하반기 10%(전년비)가 넘는 성장을 기록했다.

이 회사 역시 오픈 도어 업체다. 임원은 물론 사장도 직원들과 한 공간에서 일한다. 130개국 8000여 명의 넷엡 직원은 아마도 자신의 옆자리에서 일하는 CEO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일일 업무성과가 우수한 직원에게 CEO가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하는 문화도 있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에 놓여 있는 유·무형 장벽을 CEO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4. ADT캡스
“회장은 지금 48시간 대기 중”


보안업체 ADT캡스는 사내 커뮤니케이션 채널인 ‘닥터 캡스’를 가지고 있다. 이는 회장과 직원의 핫라인. 직원들은 이를 창구로 이혁병 회장에게 건의사항을 보낸다. 독특한 것은 이 회장이 48시간 안에 답변을 해준다는 점. 여기에 예외는 없다. 좋은 건의내용이 있으면 게시판에 올려 전 직원과 공유하기도 한다.

최근 대학원 수업을 듣는 직원을 위해 근무시간을 조정했는데, 이는 닥터 캡스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이 회사 송지현 팀장은 “닥터 캡스는 임원·직원 간의 장벽을 깨주는 시스템”이라며 “상급자는 이를 통해 하급자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듣고, 직원들은 의사전달 기회를 부여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열린 경영은 우리에겐 낯설다. 널찍한 사무실과 화려한 소파는 기업 임원실의 상징이다. 임원실을 따로 갖추고 있는 중소기업도 많다. 하지만 외국 CEO에겐 반대로 이런 문화가 낯설다. DHL코리아 30년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CEO 앨런 캐슬스 전 사장은 부임 첫날(2006년) 화들짝 놀랐다.

임원들이 자기 방문을 잠그고 나와 줄줄이 서 있는데, 문득 ‘여기가 군대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큰 걱정도 엄습했다. DHL 업무 특성상 스피드 있는 사내 소통은 필수. 그런데 이런 폐쇄적 구조에서 빠른 소통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캐슬스 전 사장의 부임 후 첫 번째 지시는 그래서 사무실 문을 모두 열어놓으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방은 물론 24시간 개방했다. “한국 임원들은 늘 사무실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대체 소통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그래서 ‘문 안 열어놓으면 당신 해고야’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문을 개방하더라.” 한국 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상하를 나눠놓는 벽이라는 일침이다. 하지만 벽은 또 있다.

부서 간 소통을 저해하는 장벽도 많다. 송병무 MK C&I 대표는 이를 “기능의 벽”이라며 “상하관계의 벽도 문제지만 부서이기주의를 초래하는 기능의 벽은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경고했다. 다소 낯선 개념인 ‘기능의 벽’은 뭘까? 송병무 대표는 파산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1980년대, 로저 스미스 전 CEO는 북미 사업부를 B-O-C(뷰익-올즈모빌-캐딜락), C-P-C(시보레-폰티악-캐나다), 트럭·버스로 개편했다. 기능을 중요시한 것이었지만 조직 간 소통을 단절함으로써 차량의 품질에 문제가 발생하고, 사업부별로 인력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GE의 위기는 시작됐다는 시각도 많다.”

이런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부분의 국내 기업은 본사와 생산공장이 구분돼 있다. 수도권에 공장을 건설하지 못하는 규제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기업에는 ‘한 지붕 두 가족’이 많다. 스태프와 생산조직이 이질적 문화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 적지 않다는 것. 이는 불통을 넘어 내부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업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생산·마케팅·판매 등 모든 부서가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며 “이런 기반을 만들어야 독창적 전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부서이기주의를 극복해야 지혜를 모을 수 있다는 조언이다. 송병락 교수는 또 “경제전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P&G그룹처럼 상하는 물론 수평(부서) 소통이 원활한 효율적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종합생활용품업체 P&G그룹은 실제로 ‘수직·수평’ 소통이 가능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이와 비슷한 국내 기업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5. 삼성전자
마케팅·개발팀 “수원으로 집합”


200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의 마케팅·상품기획팀, 개발팀은 각각 서울과 수원에서 근무했다. ‘고속도로에서 버리는 시간이 더 많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두 팀의 소통은 어려웠다. 동시공학(생산·판매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 트렌드에도 맞지 않았다. 최지성 사장은 취임 직후 2007년 마케팅·상품기획팀의 수원 이전을 결정했다.

이 팀의 절반 이상이 “절대 반대”라고 맞섰지만 CEO의 영(令)은 이미 떨어진 상태. 2년여가 흐른 지금, 수원에 집결한 두 팀은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회의를 연다. 만나는 것도, 의사를 전달하는 것도 쉽다. 신속하고 유기적 의사결정도 가능해졌다. 거리 때문에 높아진 기능의 벽을 허물어뜨린 결과다.

6. LG전자
한 지붕 두 가족 “묶어”


LG전자엔 DD(디지털 디스플레이)사업본부와 DM(디지털 미디어)사업본부가 따로 있었다. DD본부는 LCD·PDP TV 완제품과 PDP 모듈을 생산, 판매한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15조843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인원은 2865명(국내 기준).

반면 DM사업본부는 오디오·비디오·광스토리지·텔레매틱스·보안장비 등을 생산·판매하는 조직. 지난해 전 세계에서 4조3477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인원은 국내 기준 2246명에 이른다. 모두 LG전자의 핵심 부서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TV와 오디오·비디오·저장장치는 통합구매 성향이 짙었다.

하지만 2개 사업본부로 분리돼 있는 탓에 디자인·연구개발·마케팅 활동이 개별적으로 수행됐다. 이런 이유로 고객 대응은 물론 부서 간 소통의 길도 막혔다. 이에 따라 LG전자는 최근 결단을 내렸다. DD사업본부와 DM사업본부를 하나로 합쳐, HE(Home Entertainment)사업본부로 만든 것이다. 기능의 벽을 깨고, 소통의 기회를 모색했다는 얘기다.

LG전자 조중권 부장은 “디지털TV와 주변기기의 컨버전스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해 두 사업본부를 합쳤다”며 “디지털TV와 홈시어터 등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를 묶어 공동 개발·공동 마케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계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그야말로 경제 ‘빙하기’다. 한계를 절감하는 기업은 수없이 많다.

이럴 때 현장의 경고음을 정확하게 들어야 한다. 듣지 못해서도, 왜곡 전달돼서도 안 된다. 소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상하의 벽은 그래서 무너져야 한다. 또 불황 탈출의 비법을 찾기 위해선 전 직원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부서이기주의는 조직의 위기를 키우는 불쏘시개다. 기능의 벽이 무너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상하관계를 가로막는 벽, 기능의 벽이 무너져야 우리는 소통다운 소통을 할 수 있다.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창조 경영을 대한민국의 국가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며 “상하좌우에 놓여 있는 벽을 깨는 것은 창의적이고 혁신적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982호 (2009.04.14)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