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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다리’ 잡은 비정규직법 표류 조짐 

“‘기간 제한’ 무용성 논란 … 미봉책 대신 근원적 차별 해소에 힘 모아야”
‘철밥통’과 ‘금배지’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비정규직법 개정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쟁점은 ‘비정규직으로 2년 이상 일하면 회사 맘대로 자르지 못한다’는 해고제한 기준을 4년으로 늘리느냐, 아니면 그대로 두느냐다. 하지만 정치권이 2년 또는 4년이라는 기간에 함몰돼 정작 중요한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의미한 기간에 집착하다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얘기다.

5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비정규직 관련 환경노동위원회 자문회의.

2006년 2월 최모(32)씨는 그토록 원하던 A공사에 취업했다. 비록 비정규직이었지만 업무가 맘에 들었고, 능력만 인정 받으면 정규직 전환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2006년 ‘계약직이나 파견직 근로자로 일한 지 2년이 넘으면 회사가 마음대로 해고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비정규직 법안도 통과됐다. 이 법에 따르면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 근로자는 ‘무기 계약직’(정규직화)으로 간주된다.

최씨는 “곧바로 정규직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용 안전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고 말했다. 그러나 희망의 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꺾였다.

비정규직법이 통과된 직후인 2007년 1월, A공사는 최씨를 포함한 비정규직 전원을 외주 용역업체로 돌렸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라 계약직 근로자의 지속고용 부담이 커졌다(A공사 외주 용역업체 입찰 관련 문건 중)’는 것이었다.

돌연 외주업체 근로자로 전락한 최씨의 고용 안정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2007년 1월 이후 지금까지 체결한 근로계약만 해도 5건. 그 가운덴 한 달짜리 계약도 있다. 외주 용역업체도 두 차례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은 이전보다 심해졌다. 컴퓨터의 사양이 정규직보다 낮은 것은 기본. 하물며 파티션 색깔까지 다르다.

고용 부담을 털어낸 A공사로선 미소를 짓고 있을지 모르지만, 최씨는 지금 꿈도 희망도 없다. 비정규직법 개정 논란으로 여의도가 뜨겁다. 쟁점은 기간 연장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로 2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올 7월이 지나면) 해고할 수 없다’는 해고제한 기준 2년을 둘러싸고 ‘짧다(정부)’ ‘적당하다(민주당)’는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비정규직법 시행 4년 유예를 주장하고 있다. 누구 말이 옳은 것일까? 정부는 해고제한 기준이 적용되는 올해 7월 전, 비정규직이 대량 해고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언뜻 보면 설득력이 충분하다. 극심한 경기침체기를 겪고 있는 기업들은 지금 몸집 줄이기를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을 떠안을 곳은 많지 않다. 더욱이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을 7월 전 해고하면 떠안을 책임이 없다. 정부가 해고제한 기준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이유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몸소 나서 “7월까지 비정규직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향후 6개월 동안 비정규직 100만 명이 해고될 수 있다”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4년 유예’ 주장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비정규직법 허점투성이

하지만 논리가 빈약하다. 정부 주장대로 해고제한 기준을 4년으로 연장한다고 비정규직이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4년 후 비정규직은 또다시 대량 해고설에 시달릴 가능성이 작지 않다. 4년 연장의 근거자료도 허술하다. 노동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자료를 인용, 평균 근속기간 2년 4개월인 계약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14%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100명 중 2년 4개월 안에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이 14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4년으로 늘리면 정규직화 비율이 높다는 말일까? 아니다. 평균 근속기간 4년인 비정규직에 대한 통계자료는 없다. 100만 해고설도 논란거리다.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민주당)에 따르면 비정규직 100만 해고 가능성은 과장됐다.

비정규직법에 따르면 2007년 7월~2009년 7월 근로계약이 만료된 경우, 갱신된 시점부터 해고제한 기준을 적용한다. 가령 2008년 7월 갱신했다면 해고시키지 못하는 시점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10년 7월이 된다. 설사 해고되더라도, 순차적으로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6개월 내 100만 명 해고’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해고제한 기준 2년 고수론’이 타당한 것도 아니다. 민주당은 “비정규직법이 통과된 2007년을 기점으로 비정규직은 감소, 정규직은 증가했다”며 이를 비정규직법의 효과라고 주장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8월 비정규직은 전년보다 24만 명 감소한 544만 명을 기록했다.


반대로 정규직은 1018만 명(2007년 8월)에서 1066만 명(2008년 8월)으로 늘었다. 민주당이 ‘해고제한 기준 2년은 적당한 기간’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빈틈이 있다.

정규직은 2004년 이후 연평균 33만 명씩 늘었다. 정규직 증가를 반드시 ‘비정규직법 효과’로 보기엔 그래서 무리가 따른다. 해고제한 기준 2년이 오히려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성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고용 부담을 덜기 위해 비정규직을 외부 용역업체로 돌리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계약직 근로자의 용역 근로는 2006년 8월 49만9000명에서 지난해 8월 64만1000명으로 15만 명가량 증가했다.

이는 경영자들이 말 많고 탈 많은 비정규직보다 외주 용역업체를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권의 의견은 이처럼 허점투성이다. 비정규직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100만 명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비정규직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

원치 않는 외주 용역업체 근로자로 전락할 가능성도 작지 않다. 개정돼도 문제다. 정치권은 4년 후 똑같은 싸움을 반복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비정규직 보호를 명목으로 만들어진 해고제한 기준은 효과적일까?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무엇보다 사상 유례없는 ‘기간’ 제한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미국·일본·영국엔 기간제한 규정이 없다. 시장 자율에 맡긴다. 혹자는 유럽에는 있다고 하지만 틀린 말이다. 유럽연합(EU)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기간·계약횟수(반복갱신 여부)·사용사유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성신여대 강석훈 교수(경제학과)는 “학문적으로 봤을 때 비정규직법은 말도 안 된다”며 “근로기간을 2년 또는 4년으로 제한해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발상은 시장에서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HR컨설팅업체 위드스탭스 이상철 대표도 “비정규직법안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극단적인 경우, 국장급 이상 고위 계약직 근로자의 구조조정 명분으로 악용될 소지도 크다”고 주장했다.

정치 싸움에 피멍 드는 비정규직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중요한 것은 2년, 4년 등 기간이 아니다.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다. ‘2년 또는 4년이 지나면 비정규직을 무조건 정규직화한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한양대 임상훈 교수(경영학과)는 “정치권은 비정규직이 일정 기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논리에 함몰돼 있다”며 “비정규직 차별 해소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기간에 집착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4월 1일 국회 환노위에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아직 법안 소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정부는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고 비판하고, 야권은 말도 안 되는 악법이라고 쏘아붙인다. 그런 와중에 노동계는 ‘비정규직 보호법’을 새로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정부와 야권 그리고 노동계가 서로 다른 법안을 들고 옥신각신하는 사이, 비정규직의 가슴엔 피멍이 들고 있다. A공사 최씨는 “국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과연 그들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고 있는 것일까?

용어설명 - 해고제한 기준은?
- 2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근로자(계약직), 회사 맘대로 해고 못해→ 무기 계약직(정규직화)
- 2년 이상 근무한 파견 근로자, 회사 직접 고용 의무


989호 (200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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