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주부 박찬희(51·가명)씨는 생계가 막막했다. 도박에 빠진 남편은 전 재산을 탕진했다. 아이들 학교 보낼 돈조차 없었다. 박씨가 돈을 벌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허리를 다쳐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박씨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던 중 TV에서 선정적인 언론 보도를 봤다. 내용은 이랬다. “음식물에서 이물질이 나왔다고 주장한 나쁜 소비자가 기업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뜯어냈다.”박씨는 무릎을 탁 쳤다. 교묘하게 식품업체를 협박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씨는 식품업체가 생산한 음식제품에 직접 이물질을 넣었다. 진공포장된 제품에도 그랬다. 이런 수법으로 그는 식품업체 네 곳을 협박해 1700만원을 뜯었고, 그러다 꼬리를 밟혀 구속수감됐다. 민원제기·고발 등을 통해 기업을 괴롭히는 소비자, 이를테면 블랙컨슈머의 전형적 사례다.블랙컨슈머 하면 흔히 식품이 떠오른다. ‘쥐 새우깡·쥐 식빵’ 사건 모두 식품업계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블랙컨슈머의 영역은 넓고 다양하다. 전자제품·통신서비스 등 소비재 업계는 블랙컨슈머 탓에 골머리를 앓는다.최근엔 “정수기 물을 마시고 배탈이 났다”며 치료비와 정신적 피해보상을 요구했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었다. 휴대전화 폭발 자작극을 벌인 블랙컨슈머가 구속되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지난해 5월 이승민(28·가명)씨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가열·훼손한 뒤 인터넷에 ‘충전 중 폭발했다’고 허위 사실을 퍼뜨려 보상금 400만원과 100만원 상당의 새 휴대전화를 받았다가 검거됐다.금융권도 예외는 아니다. 2010년 9월 김상철(45·가명)씨는 골목길에서 중소형 자동차에 부닥쳤다. 가벼운 접촉사고였지만 김씨는 곧장 A보험사에 500만원을 청구했다. 9개월이 흐른 올 3월 김씨는 “2010년 9월과 똑같은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또다시 보험을 청구했다. 청구액은 이번에도 500만원이었다. 똑같은 사고가 되풀이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A보험사는 김씨를 역추적했다.그 결과 김씨를 비롯한 가족이 동일한 사고 유형으로 7개월 동안 일곱 번에 걸쳐 보험청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의도적으로 접촉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타먹는 ‘꾼’이었던 것이다. 보험사는 김씨를 수사기관에 고발했고, 그는 법의 심판을 받았다.블랙컨슈머가 날이 갈수록 활개를 친다. 대한상공회의소(2008년)가 조사한 국내 기업 300곳 중 87%에 해당하는 261곳이 블랙컨슈머의 민원을 경험했다. KEA(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는 최근 28건의 소비자 민원을 상담했는데, 그중 18건(64%)이 블랙컨슈머와 관련 있었다.진공포장 식품에 이물질 넣은 블랙컨슈머블랙컨슈머가 기승을 부린다는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에 신고되는 이물질(음식물에 이물질이 혼합된 것) 건수는 2008년 1949건에서 2010년 9882건으로 3년 만에 5배가 됐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소비자 상담 건수는 2006년 30만9545건에서 지난해 73만2560건으로 136% 늘었다(※한국소비자원은 2010년부터 한국소비자원·소비자단체협의회·지방자치단체에 접수된 소비자 상담 건수를 종합해 발표하고 있다). 물론 식약청 등에 고발·신고하는 소비자를 모두 블랙컨슈머라고 규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 가운데 블랙컨슈머의 무리한 민원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은 크다.한국소비자원 상담건 중 40%는 사실관계를 증명하지 못한다. 한국소비자원 김지형(피해구제국) 과장은 “제도와 규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환불·교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비슷한 민원을 수차례 제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식약청에 신고된 식품 이물질의 사실관계도 분명하지 않다. 이곳에 2010년 접수된 식품 이물질 신고 건수 9882건 가운데 오인·허위 신고 또는 신고를 취소하거나 조사에 불응한 사례는 6815건으로 70%에 달한다.식약청 관계자는 “식품 이물질 검사는 정확한 원인을 찾기 힘들다”며 “이물질이 들어 있다고 신고한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은 조사를 거부하거나 자진 취하한다”고 말했다.
이물질 신고 10건 중 7건 사실무근블랙컨슈머가 늘어난 만큼 수법 또한 교묘해진다. 기존 블랙컨슈머는 업체를 구두로 협박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언론을 활용하는 데 그쳤다. 지금은 인터넷·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적극 이용한다.기업으로선 이만저만 괴로운 게 아니다. 인터넷에 기업의 문제점이 낱낱이 올라가고, SNS를 통해 퍼지면 수습할 방도가 딱히 없어서다. 그 내용이 맞든 틀리든 마찬가지다.현대홈쇼핑 관계자는 “인터넷 블로그나 포털 사이트 등에 사진과 내용을 올린 뒤 기업과 거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그는 “초기에 대응하지 못하면 기업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수 있어 실시간 조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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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컨슈머 행위 제재 수단 없어서원대 최병록(법경찰학과) 교수는 ‘건전한 소비문화 정착을 위한 방안’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부 기업은 소비자의 합리적이지 않은 권리행사가 심할 경우 전담팀에서 대응한다. 이곳엔 피해구제·분쟁조정 경험이 많은 직원을 배치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이런 대응책은 효과적이다. 소비자 유형에 따른 맞춤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블랙컨슈머를 줄이려면 정부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법 또는 제도상 부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블랙컨슈머를 제재할 기준이 없다. 블랙컨슈머를 뿌리뽑는 방법은 어쩌면 간단하다. 잘못된 민원은 곧장 바로잡으면 된다. 민원 내용이 어쩌다 맞는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신속하게 수습하면 된다.글로벌 제약사 존슨앤존슨의 타이레놀 사건은 좋은 예다. 1982년 존슨앤존슨은 벼랑 끝에 몰렸다. 대표 상품인 감기약 타이레놀에 누군가 독극물을 넣어 이를 복용한 소비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존슨앤존슨은 이 사건을 숨기지 않았다. 곧장 언론에 공개하고 타이레놀 약병 3100만 개를 전격 회수해 폐기하면서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는 약병으로 교체했다.이 과정에서 2억40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수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홍보실에 깔려 있는 전화 회선을 늘려 수천 통의 문의전화에 일일이 대응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많은 소비자는 존슨앤존슨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기업”으로 신뢰하게 됐다. 시장점유율은 사건이 터진 지 반년 만에 회복됐다.블랙컨슈머는 기업이 용기를 가지면 줄일 수 있다. 그들의 황당한 민원에 맞대응하는 덴 무엇보다 기업의 용단이 필요하다. 블랙컨슈머의 으름장에 위축되지 말고 과오가 있다면 떳떳하게 밝히고 개선하라는 얘기다. 존슨앤존슨의 용기가 모범답안이다.